곰스크로 향하는 아름답고 슬픈 기차여행 '곰스크로 가는 기차 Reise nach Gomsk'

사색거리들/책 | 2011. 1. 17. 13:49 | ㅇiㅇrrㄱi

곰스크는 내 유일한 목표이자 운명이었다. 그곳에 가서야 비로소 내 삶은 새로 시작될 터였다.
기차여행에는 모든 탑승객을 아이마냥 진득한 설렘으로 달뜨게 하는 목적지가 있기 마련이다. 여태 키워왔던 소소한 바람이 이루어질 것 같은, 예상치 못했더라도 흐뭇하게 웃음 지을 수밖에 없는 눈요깃거리들로 가득일 풍경에 대한 기대 그리고 기다림이 뒤범벅되는 심정이란 게 있다. 아마... 여행이 가진 속성일 수 있을 테다. 적어도 기차에 올라 덜커덩 거리는 진동을 몸으로 받아내고 있는 자신은 출발지에서 기차에 오르기 직전까지의 자신과 조금은 다른 존재인 듯... 어딘가로 가까워져 가는 만큼 어딘가로 부터는 멀어지는 자신을 돌아보면서 플랫폼 뒤로 남겨 두고 온 자신은 묘한 이물감으로 슬며시 갈라서 버린다.
 
버리고 소외시켜 놓아도 개의치 않을... 하찮아 보이면서도 구체적인 짜증으로 이어지는 우리 자신의 일상종착역인 그곳이 갖게 되는 이상(理想)의 사이로 선택의 문제가 주어진다면...? 누구에게나 한번쯤 찾아올 그 순간... 그간의 모든 가치와 맞바꾸어야할 값비싼 특급열차 티켓 하나로 선택할 수 있다면...? 가야할까... 지금 여기에 머물러야할까... 가게 된다면 그곳엔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려나...?

그 남자의 목적지인 '곰스크 Gomsk'... 어린 시절 아버지의 무릎위에 앉아 들었던 그 도시는 멀고도 멋진 도시일 뿐, 어떤 곳인지... 가게 되면 무얼 하게 될지 알지는 못한다. 출발해 언젠가는 반드시 가야할 운명과도 같은 무게로만 담겨져 있을 뿐... 자신을 제외한 누군가가 이 운명에 동의할지 않을지, 여정 길의 동반 석에 동행할 이가 함께일지 아닐지 또한 알 수 없다. 
 
곰스크로 가는 기차
카테고리 소설 > 독일소설
지은이 프리츠 오르트만 (북인더갭,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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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츠 오르트만의 <곰스크로 가는 기차>엔 곰스크가 인생의 목표인 그 남자 그리고 그의 부인인 한 여자의 여정길이 오롯한 슬픔으로 그려져 있다. 곰스크가 실재하는 곳인지 아닌지, 무얼 실현해줄 곳이기에 한 남자의 삶의 목표가 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반드시 가야한다는... 평생에 단 한번은 가고 싶다는 필연가득한 바람이 집약된 상징적인 공간이며 이전의 삶과 다른 새로운 삶을 위해 남자가 가야할 곳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남자는 아직 도착하지 못했다. 슬픔은 곰스크행 여정을 포기한 남자의 귓가에 늘 사라지곤 하는 열차의 기적소리로 맴돌게 된다. 

남자는 결혼직후 아내와 곰스크행 특급열차를 타고, 익숙한 곳에서 멀어지는... 모든 것으로부터 멀어져가는 여정 길에 오른다. 경유지에 내렸다 마을의 풍경에 취한 나머지 열차를 놓치는데... 이제부터 또 다른 현실이 되어버린 외딴 마을에서의 일상 탓에 곰스크행 기차여행은 기약 없이 미루어진다. 티켓 살 돈이 없어서... 아내가 마련한 안락의자를 싣지 못해서... 태어난 아이 때문에, 정원 딸린 새 집과 새로 구한 안정적인 직업 탓에 삶의 목표는 점점 희미해진다. 여전한 꿈의 크기에 시달리는 남자에게 마을 노(老) 선생님의 기이한 한마디가 던져진다. 
사람이 원한 것이 곧 그의 운명이고, 운명은 곧 그 사람이 원한 것이랍니다. 당신은 곰스크로 가는 걸 포기했고 여기 작은 마을에 눌러앉아 부인과 아이와 정원이 딸린 조그만 집을 얻었어요. 그것이 당신이 원한 것이지요.... 그 모든 순간마다 당신은 당신의 운명을 선택한 것이지요...
삶의 목표를 져버리고 눌러앉아버린 삶이 결코 나쁘다거나 의미 없는 삶은 아니라는 그 한마디에 남자는 자신의 운명이 곰스크란 저 머나먼 곳에 있기 보다는, 이미 결행한 몇 번의 선택과 선택 사이로 주어지는 소소한 현실위에 놓여있음을 깨달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다락방에 올라 홀로 곱씹는 미루어진 꿈의 미련과 알 수 없는 쓸쓸함은 계속되고 있을 것이다.

프리츠 오르트만의 <곰스크로 가는 기차>엔 이 외에도 총 8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대부분의 작품들에서... 지금 누군가들이 덤덤하게 살아가고 있을 현실럼주차처럼 달콤하게 안겨들 꿈 사이의 긴 단절을 애잔한 톤으로 그려내는 편인데,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선물하려던 양귀비꽃을 잿빛으로 말라붙어 하나의 꽃잎만 남겼을 때야 건네게 된다는 <양귀비>편이나, 인생이 시시하다는 철학자와 당장의 선택과 선택에 의해 살아갈 수 있었다는 화가를 대비시킨 <철학자와 일곱 곡의 모차르트 변주곡>편에서처럼 꿈과 희망이 갖는 모호함보다는 당장의 현실이 갖는 순간순간의 소중함에 더 호소하는 편이다.

곰스크에서 느끼게 될 '삶의 목표가 갖는 가치'와 안락의자에서 상징되는 '현실의 안락함 내지 비루함' 사이에서 결국엔 곰스크로 가야할거라는 이상의 실현에 무게가 쏠려있진 않다. 안락하거나 비루할지 모를 현실로의 선택 또한 결코 나쁘다 할 수 없는 선택된 운명이라고 강조하고 또 강조하고 있으니... 처음엔 곰스크로 상징되는 삶의 목표 내지 꿈 저편으로 가보겠다는 바람마저 망각한 이들에 대한 힐난일까 싶다가도... 꿈이고 뭐고 간에 그냥 주저 앉아버린 수많은 현대인들에 대한 프리츠 오르트만의 진심어린 위로 한 말씀이 아닐까도 싶다. '당신의 선택 또한 틀리지 않았어. 도착하지 못했더라도 너무 괴로워는 말게' 라는...
그러나 당시에 곰스크에 걸었던 희망을 나는 거의 잊어버렸다. 곰스크로 가려 했던 이유조차도 이미 오래전에 희미해져 더 이상 뚜렷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곰스크를 향한 열망이 식은 것은 아니다. 다만 언젠가는 그 도시에 도착한다는 명백한 확신이 시들해진 것뿐이다.
어느 누구에게나 곰스크란 도시는 수도 없이 서로 다를 이름으로 분명 자리 잡아 있을 테다... 언제부터 가야한다고 꿈꾸고 있었는지, 가고 있다 무얼 볼모잡혀 중간에 내렸는지, 혹 다시 열차에 오를 수 있다면 티켓을 구매하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할는지... 중간에 내리지 않고 끝가지 갈 수나 있을는지 모를 일이지만...

행여 중도에 내려 기약 없이 경유지에 머물러 있다 해도, 그 정체(停滯)가 제 아무리 환멸스러워도... 그 열정을 놓아버리지 않았던 순간순간의 삶이었다면 나쁜 삶이었다 스스로를 폄하할 일은 아닐 테다.

무릇 그렇다 하더라도 아직 가보지 못했기에 신물처럼 문득 치밀어 오를 '곰스크로의 그리움'이 썩 유쾌하진 않을게 뻔하지만 말이다.


다른 시대, 다른 사람들의 서로 다른 사정들 '자살의 연구'

사색거리들/책 | 2011. 1. 14. 18:22 | ㅇiㅇrrㄱi

나는 옴찟하지 않는다.
서리가 꽃이 된다.
이슬이 별이 된다.
죽음의 종이 울린다.
죽음의 종이 울린다.
누군가의 목숨이 끝났다.
죽음이 연일 저로 향하는 긴 끈을 이 사람 저 사람의 손에 쥐어주며 당기는 일이 반복된다. 누구나 한번은 잡을 수밖에 없을 끈이지만, 자신의 순서가 아님에도 서둘러 줄을 찾아 이끌려가는 이들이 있다. 자살하는 사람들이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도 내일도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리는 일들은 누군가의 폐쇄된 공간 속에서 여전히 반복될 것이고, 살고 있는 자들의 애통하거나 안타까운 심정 또한 이어지며, 분노나 호기심뿐일 시선의 뒤엉킴도 계속될 테니... 지켜보는 이 태반은 자살자의 참담한 심정에서 한참이나 비켜나 있는 관망자일 수밖에 없어 늘 자살의 이유나 원인 등에 대한 의견개진에 열을 올리곤 한다.
 
불안하거나 폭력적이었던 행로에 주목해 삶의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도록 몰아간 우리사회의 경직된 제도 전 방위를 비난하기도 하고, 한번쯤 도와 달라 내밀었을 손길을 미처 알아채지 못한 각박한 정서에 안타까워하기도 하며, 스멀스멀 차오르는 고름처럼 오염중인 병증을 자각하지 못한 개인만의 치명적인 질병 탓으로 전락시키기도 하고, 생명에 대한 존중심이 결여된 죄악이라 여기기도 한다. 어떻게 해석을 내리더라도... 의문이 남는다. 그들은 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을까...? 어떻게 떠올림만으로도 고통스러움이 빤히 전해지는 절차에 개의치 않고 삶을 끊어내야만 했을까...? 우리는 왜 종종 무의식중에도 죽고 싶다...를 연발하며 죽음의 상징을 놓아버리지 못하는 걸까...? 도대체 자살이란 무엇일까...?
자살만큼 모호하고 복잡한 동기를 가진 행위를 단일 이론으로 해석해낼 수는 없다.
알프레드 알바레즈는 <자살의 연구>에서 이에 대한 명쾌한 해석이란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머리말에서 자살의 의미를 '서로 다른 시대의 서로 다른 사람들의 서로 다른 사정들'이란 표현으로 요약하며 자살에 대한 그 어떤 해답도 제공할 수 없으며 자기 스스로도 해답의 존재를 기대하지 않는다고 명확히 선을 긋고 있다. 자살만큼 모호하고 복잡한 동기를 가진 행위를 단일 이론으로 해석할 수 없기에 단지 발생 원인을 찾아보려는 시도로 보아달라고 집필의 변을 달고 있으니... 사실 그 해답을 바랄 요량은 애당초 놓아버렸다. 

 

자살의 연구
국내도서
저자 : 알바레즈 / 최승자역
출판 : 청하출판사 1998.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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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의 연구>는 여류 시인 실비아 플라스가 자살에 이르는 과정을 담은 1장과 작가 본인의 자살미수 경험을 고백하는 5장의 사이로 자살의 역사, 자살의 심리적 요인 그리고 문학과의 연관에 대한 학술적인 해석이 삽입된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아무래도, '서로 다른 시대'에 해당하는 자살의 역사적 배경쪽으로 눈길이 많이 가는 편이다. 

우선, 자살금지령이 종교적 교리로 자리 잡은 배경에 대한 설명은 상당히 흥미롭다. 작가는 기독교의 순교 또한 자살의 한 형태이자 극단적인 교리해석의 결과물이라 해석한다. 삶이란 죄악의 유혹에 부침당하는 초조한 시간의 이어짐에 불과하니 죽음을 통해 천국으로의 구원 길에 오르자 라는 교리가 자살로 이어지는 강력한 유인책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순교시켜 달라 울부짖는 기독교도 무리에 둘러싸인 로마 식민지의 한 지방총독이 가서 목매달아 죽든지 물에 빠져 죽든지 해서 자신을 좀 편하게 해달라고 외쳤다거나, 길 가던 이에게 나를 죽여주지 않는다면 도리어 죽이겠다 협박했다는 도나티스트(Donatist) 종파의 예를 들어, 기독교도들에게 불어 닥친 순교의 열풍은 결국 자살의 한 유형일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죽음의 열풍을 막아내기 위한 방책으로 살인하지 말라 라는 제 6계명을 끌어들여 자살 또한 살인의 한 유형으로 명백한 교리 위반임을 강조하고, 연이은 종교회의에서는 자살자의 장례식을 거부하거나 자살 미수자마저 파문시키도록 결의한다.

천국으로 가는 열쇠였던 자살로 이르는 문이 굳게 닫혀버린 연유이자 여직까지 자살이 신의 섭리에 반하는 반종교적·반도덕적 죄악으로 이어지는 인식의 배경이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에서, 에밀 뒤르켕에 의해 자살을 둘러싼 도덕적, 종교적 방벽들이 허물어지기 이전까지 자살은 죄악과 동일시 여겨지는 처지를 유지한다. 뒤르켕은 모든 자살이 과학적으로 세 가지(이기적 자살·이타적 자살·아노미적 자살) 일반적 유형의 하나로 분류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살이 구제불능의 죄악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사회적 사실일 뿐이라 역설하는데, 뒤르켕의 <자살론>의 출현은 이후 자살에 대한 심리학적·사회학적 접근을 증폭시키는 중대한 계기가 된다. 개인으로부터 사회로, 도덕으로부터 하나의 문제로 전이되는 자살의 위상 변화는 자살을 죄악의 문제에서 순전히 지적인 문제로 변형시키는 주된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아무튼... 자살에 대한 시선은 도덕이나 영혼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심리학적·사회학적으로 통계되고 분류되는 연구·분석의 문제이기도 하는 식으로... 여전히 이 둘의 갈림길에 놓여 있는 형국이다. 

이렇게 자살을 세밀히 들여다보다 보면 '산다는 게임에서 가장 큰 판돈인 삶 자체가 걸려있지 못할 때엔 삶의 흥미는 줄어든다'고 했던 프로이트의 말에서 느껴지듯 죽음의 반대편 즉 살아가야할 가치 또한 선연하게 드러난다. <자살의 연구>에는 자살이 실패로 점철된 생애의 역사에 내리는 하나의 파산 선고라거나, 무의미한 삶에 대한 실패의 고백이라거나, 단지 죽음에 대한 동경일 뿐이라는 식의 다양한 정의와 해석들이 넘쳐나지만, 이런 식의 학문적 수사와 숱하게 언급되는 다양한 죽음의 사례들을 접하다 보면 삶의 의미에 대한 진중한 물음이 툭 불거지는 것이다..
삶의 마지막까지 살아내야만 청구할 수 있는 권리...
굳이 자살에 대해 정의해 보자면, 작가의 말처럼 자살은 도덕을 초월하고 심리학적·사회학적 예방을 초월한 문제이며 궁지에 몰리거나, 자연에 어긋난 숙명에 대해 우리들 스스로를 위해 만들어내는 무시무시하지만 전적으로 자연스러운 반응이라 요약할 수 있을지 모른다. 아니면, '자살 역시 그 자체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것이 아닐까' 라는 누군가의 의문처럼 여전히 알 수 없는, 자살자 본인들만의 고유하고 개별적인 심정으로만 남는 모호함 자체로 여겨질 수도 있다. 
 
다만... 눈여겨 봐야할 대목은 자살에 대한 정의나 배경 등이 아닌 삶에 대한 시선이다. 누구에게나 스스로를 죽이고 싶은 시달림이 종종 찾아올 수 있음엔 동의한다해도... 끝나지 않을 성 싶은 소란스러움과 너저분함, 억눌린 답답함이 우리를 극단적으로 괴롭힐 수 있는 여지에 동의한다해도... 적어도 죽음을 해결책 삼지 말 것을 작가는 자신의 자살미수 경험을 언급하며 거들고 있는데... 죽음이 해결책이 아니라면... 해결책은 삶이란 모양새를 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죽음이란 한꺼번에 설명되어지고 정당화되어지는 즉각적이고 완벽한 해답 따위가 될 수 없음을, 그 모든 혼란을 정화시켜줄 체험이 될 수 없는 완전한 무(無)에 불과할 뿐이다...
삶은 행복하거나 불행하다는 이분법으로 즉각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닐테다. 단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인 온갖 문제들로 뒤섞여 있어 참으로 고단히 끌어가야 하는 스무고개일 수 있다. 문제가 있으면 반드시 해답 또한 있다는 걸 인정하는 자세, 그렇게 문제에 답하며 삶의 마지막까지 살아내야만 죽음이든 뭐든 간에 청구할 권리가 있는 게 아닐까....?

온갖 왜곡과 부조리로 가득한 세상이고, 순간 참지 못할 무언가가 분명 있겠지만, 그런 부조리를 견뎌내지 못하겠다는 불같은 욕정 또한 건강한 사고의 특성일테니 죽음이 최후로 닥쳐왔을 때엔 자살보다 더욱 불결하고, 틀림없이 자살보다 상당히 더 불편할 것이라는 자살미수자의 쓸쓸한 회한을 참고삼아 한번 다시 살아보자 다잡아보는 건 어떨까...? 그저 건강한 것 뿐이라고 다시 한번 넘겨보려 시도함은 어떨까...? 라고 감히 생각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의 다른 사정들'에 대해 감히 무어라 할 만한 입장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이미 죽음에 이끌려간 자들이 여전히 '살고 있는 자들에게 남겨놓은 과제들'로 우리 자신의 사정이란 것 또한 나날이 묵직해져 가고 있지만 말이다.


어른들을 위한 코믹 잔혹 우화집 '넌 동물이야 비스코비츠 Sei Una Bestia, Viskovitz!'

사색거리들/책 | 2011. 1. 11. 13:39 | ㅇiㅇrrㄱi

무더위로 사방이 달아오르는 여름날이다. 마당 위를 팽팽히 가로지르는 주홍빛 빨래줄 위로 겹눈을 반짝이며 커다란 파리 한마리가 내려앉는 것이 아이의 눈에 띈다. 아이의 손에는 장난감 총 한 자루가 거머쥐어져 있다. 얼마 전 조립한 것으로 실린더 스프링의 탄력이 아직 싱싱히도 살아있는 탓에 가능할법한 한도 내의 공기를 잔뜩 그러쥐고 있는 상태다. 한 낮의 햇살에 찡긋거리듯 한 눈을 감고 일이 미터 남짓한 파리와의 거리에 총신을 가지런히 하고는 숨을 잠시 멈춘다.

지금이야... 퉁~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플라스틱 비비탄 하나가 순식간에 날아간다. 파리는 사라져버렸다. 잠시 후, 다른 볼 일차 마당으로 나간 아이가 이상한 움직임을 찾아낸다. 파리 한 마리다. 아니 파리 반 마리... 아니 파리 삼분의 이 마리...? 끊임없이 비비적거리는 앞다리의 분주함이란 게 여전해, 살아있음이 분명한 파리에겐 있어야할 머리가 사라져버린 상태다. 아까 사라져버린 플라스틱 비비탄과 함께 있으리라. 앞다리 청소에 여념 없고, 짧은 거리를 날아다니기도 하지만 녀석이 무얼 보고 있는 건지, 왜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건지... 왜 살아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무얼 느끼고 있는 중인지 아이도... 파리도... 알 턱이 없다.
그 파리의 이름은 비스코비츠다.
<넌 동물이야, 비스코비츠!>는 비스코비츠란 이름의 동물을 주인공으로 한 우화 여러 편이다. 20여 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기 다른 동물이 주인공으로 출현하지만 그 모든 편의 주인공 이름은 비스코비츠가 된다. 주코틱, 페트로빅, 로페즈 등 고정 등장동물들 또한 비스코비츠를 좇아 매 에피소드에서 동일한 종족으로 변화하게 되는데, 이들 주변존재들에게는 친구이거나 가족구성원 내지 주변의 관망자 역할이 고루 주어진다. 눈여겨 봐야할 존재는 리우바다. 꿈결처럼 아름답고 하품처럼 달콤하고, 베개처럼 부드럽다 표현된 그녀는 비스코비츠의 연인이자, 배우자 또는 동경의 대상으로 나타나며 당연히도 여성이자 암컷이고 애틋한 존재에서 교활하거나 냉혹한 조력자로서의 변모를 거듭하며 비스코비츠의 삶과 고민에 깊숙하게 자리 잡는다. 
 
넌 동물이야, 비스코비츠!
카테고리 소설 > 기타나라소설 > 이탈리아소설
지은이 알레산드로 보파 (민음사,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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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에피소드에서, 비스코비츠는 동면 속 에로틱한 꿈 사이와 후질 근한 현실 사이를 오가는 겨울잠쥐 역할을 해내는데, 다음 에피소드에서는 1년 가까이 이상향에 가까워지려 달음박질하는 자웅동체 달팽이로 나타난다. 이어서, 머리를 잃어가며 본능적 사랑에 순종하는 사마귀, 뻐꾸기 새끼가 태어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되새, 암컷들을 차지하고 보호하기 위해 피투성이 격전을 되풀이 하다 기분 더러워지는 엘프, 퀴퀴한 똥 냄새 속에서 정체성을 부정하는 쇠똥구리, 춤추는 재주 하나로 백만장자를 넘어서 대통령을 꿈꾸는 돼지, 약육강식의 세계 속에서야 존재의 의미를 되찾는 실험쥐, 사랑에 대해 말장난하는 앵무새, 단절된 의사소통에 괴로워하는 가시고기, 살육의 본능에 휘둘리는 전갈, 권력의 허상을 뒤늦게 깨닫는 개미, 자아를 찾지 못하는 카멜레온, 전직 마약국 소속 형사 견이자 현재는 깨달음의 명상중인 수도승 ,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는 기생충, 참을 수 없는 식욕에 시달리는 상어, 미의 기준에 대해 자각하는 미남 수벌, 성 정체성을 찾을 길 없는 해면, 가젤과 노년의 고뇌를 나누고픈 사자, 동물로 형태를 달리하곤 죽음의 숙명을 알아차리는 세균 등으로 그 역할을 달리한다.

저자인 알렉산드로 보파는 생물학 전공, 동물유전학 연구소에서의 근무경력 그리고 동양에서의 오랜 체류 등에서 습득했을 인간에 대한 시선을, 비스코비츠란 서로 다른 동물을 통해 그럴듯하게 담아내어 다소 기괴한 우화 여러 편을 만들어내고 있다. 매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비스코비츠에겐 철저하게 동물로서 갖는 과학적인 본능과 습성을 부여하는 한편,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욕망에 대한 상상력을 결합해 삶의 다양한 면모에서 이어지는 철학적 화두를 제시하는데, 너무 무겁지 않은 그렇다고 동물의 세계일뿐이라 넘겨버릴 수 없는 진지함 또한 시종일관 유지해낸다. 기본적으로 본능에 충실할 밖에 없는 동물의 삶인지라... 꽤나 잔혹하고 끔찍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설정되고 비스코비츠 등과 상황 자체가 의인화되며 빚어내는 유머와 풍자 탓에... 유쾌하면서도 입맛 쓴 심정이 뒤엉켜 버린다고나 할까...
"아빠는 어땠어요?" 난 엄마에게 물었다. "바삭바삭하고 약간 짭짤한 데다 섬유소도 풍부했지." "엄마가 아빠를 먹기 전에 어땠느냐고요." "불안하고 위태롭고 신경질적인 유형이었어. 너희 수컷들이 다 그렇듯 말이야, 비스코."
누구나 한번쯤은, 수사마귀가 교미의 대가로 암사마귀의 한 끼 식사거리로 전락하고야 만다는 사실을 들어봤을 테다. 안정적인 수태를 위해 영양분을 제공하기 위한 본능적인 행위라는 과학적인 견해가 있겠지만, <네 머리가 없어지고 있어, 비스코비츠>편에서 작가는 더 깊숙이 시선을 들이민다. 사마귀 비스코비츠는 아빠의 양분으로 태어날 수 있었던 자신의 탄생비화를 떠올리면서도 자신에게도 어김없이 주어지는 죽음의 본능에 묵묵히 몸을 맡기기로 하는데, 아빠의 희생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기도 하고, 암컷 리우바의 아름다움을 예찬하며, 다리 한 짝과 앞다리 그리고 머리를 잃어가면서도 그녀의 차가운 숨결에 전율하는 것이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놓을 수 있음을 선(善)이라 믿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미화하기도 하고 바삭바삭 짭짤했다는 엄마 사마귀의 미각을 빌어 우스꽝스럽게 비웃어 보이기도 하는데... 이렇듯 흔히 보아 넘겼거나 들어서 알고 있는 동물들만의 생태 낱낱에서 발견되는 인간 군상들의 희화화된 모습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넌 동물이야, 비스코비츠!' 라는 작가의 단언이란 게 비스코비츠 이하 등장동물 일동은 '인간의 빗댄 모습일 뿐이야!' 라는 표현의 반어일 뿐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리게 된다.
동물의 삶과 인간의 삶이 있다.
인간 또한 동물이기에 그 둘의 분리가 어색스러울 수도 있다. 그 둘이 동일하게 갖고 있을 짐승스러움에 비춰 보자면, 인간들만의 자존이나 자만을 위해 사용되는 억지스러운 구분에 불과할지 모른다. 흔히, 본능이라 폄하해 마지않는 동물들의 짐승스러움에 내제된 잔혹함과 폭력, 사랑의 헌신 등이 우리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는 가능성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심정이다.

빨래줄 위에서 한가로이 다리를 비비다 머리가 날아가 버린 파리 비스코비츠는 모든 걸 단념해야 한다는 죽음의 진면목을 순간 알아차렸을지 모른다. 아니면 보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상황속에서도 본능에 충실해야 하는 자신의 숙명을 저주하고 있었을지 모르고, 마지막 기억속 세상의 빛에서 떠올려 낸 일상의 아름다움에 찬양하는 심정으로 다리를 마주 비비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둥지에서 기다리고 있을 암컷 리우바의 안녕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을지도... 평소 사모하면서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대상이었던 인간 아이에게 마지막 숨결을 박탈당했음에 기뻐하는 중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보지 못했던 걸 들여다보고, 잔잔한 열거의 가운데 인간의 삶을 놓치지 않는 이탈리아 작가 알렉산드로 보파의 시선에 감탄하게 된다.


사라진 꿈과 희망을 찾고 있을 미국의 송어낚시에게 '미국의 송어 낚시 Trout Fishing in America'

사색거리들/책 | 2011. 1. 7. 17:20 | ㅇiㅇrrㄱi

이것은 여전히 알 수 없는 존재, 미국의 송어낚시에게 보내는 길고 긴 잡담 내지 편지 한통입니다. 조만간 다시 뵈었음 싶군요.
안녕? 네가 세상 빛을 본 게 1967년이니 한참 형님, 누님 연배이지만... 사람인지 뭔지 모를 존재인 만큼 인간의 나이를 기준으로 위아래를 정한다는 게 어색스럽기도 하니 편하게 말을 놓으려고 해.

잘 알다시피 난 도시인이야.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서울에서 태어나 여태 벗어나지 못하는 평범한 회사원일 뿐이지. 태생이 도시인이라는 자격지심 탓인지 언제일지 모를 날부터 키워왔던 꿈과 희망이 하나 있었어. 구체화되지 못한 탓에 설명하긴 어렵지만... 우리 인간들, 특히 나부터가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뭐 그런 내용이야. 물론 죽어서 흙으로 화할 시기를 서둘러 맞이하고픈 비극적 결말의 의미는 아니야. 귀경이나 전원생활에 대한 동경과는 한참 거리가 있는 막연한 자연숭배사상이라고나 할까...? 그래서인지 누군가 당신의 종교가 무어냐고 물을 때면... 제 종교는 자연입니다 라는 뜬금없을 답을 날리곤 했단 말이지.

학창시절 때는... 인간에겐 자연과 어우러져야 할 숙명 같은 게 있다며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 말고 바로 앞 화단으로 뛰쳐나가 흙을 꾹꾹 밟으면서 인디언 아이처럼 빙글빙글 돌기도 했어. 실성했나 싶어 주변에서들 실실 흘리던 웃음조차 무시할 만큼 가볍지 않은 바램이었던 시기였지. 아... 그만하자. 이런 식으로 조각조각을 연결하다보면 끝 간 데 없이 늘어질 테니 듬성듬성 다 생략할께. 이제 어른이 되어 버렸어. 자연에 대한 막연한 꿈과 희망은 어쨌냐고? 앞서 얘기했지만... 도시인으로서의 삶만을 용케 끌어안고 달음박질 중인거지 뭐. 들고 마시는 이 공기 정도만이 자연의 감흥인 그런 수준...? 그러던 중 너를 만나게 된 거야. 우연히...

책 한권의 형태를 하고 있는 너는... <미국의 송어낚시 Trout Fishing in America>란 이름표를 달고 있었어. 제목보다 더 눈길을 끌었던 건 너의 부제였어. '사라진 꿈과 희망을 찾기 위해 떠나는 송어낚시 여행'이라는... 네 뒤쪽으로 땀땀이 적혀있는 각종 매체들의 찬사야 으레 그리들 하니 지나쳤지만, 부제로 인해 순간 매혹당하는 심정이란 건 꽤 강렬해서... 한 시절 간절했고 설명 불가능할 무형의 믿음 한 조각으로 길게 이어져있지 않을까 싶은 기대 같은 게 일었는지 몰라. 

미국의 송어낚시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 영미소설일반
지은이 리처드 브라우티건 (비채,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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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브라우티건
(Richard Brautigan)이란 생소한 작가이름이 눈에 들어오기에 찬찬히 약력과 서문을 살펴봤지. 가난에 시달리다 못해 교도소밥이라도 먹어보겠다고 경찰서에 돌을 날렸다 정신병원에서 전기충격치료까지 받았다는 일종의 기행부터 시작해서 미국의 반문화운동을 주도하며 시집을 냈다는 소개 글이 이어지더군. 1967년 <미국의 송어낚시>라는 특이한 형태의 너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 전 세계의 관심을 받았다고 하는데, 당시 미국의 젊은이들이 성서처럼 너를 늘 들고 다녔고 달나라에서 최초로 가져온 운석을 '미국의 송어낚시 쇼티'라고 명명했다는 대목만으로도 네가 얼마나 인기 있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어.

http://www.goodreads.com

당시인 들은 네가 담고 있다는 강렬한 반체제 정신, 기계주의와 물질주의 비판, 물질문명의 시달림 속에서 목가적 꿈을 잃어버린 현대인의 허무감 등에 매료되었다고 하던데...

진보주의와 생태주의, 미국 반문화 운동에 미쳤다는 지대한 영향은 별도로 하고 내 눈에 확 들어올 만한 대목이 하나 있지 뭐야. 맞아... 목가적인 꿈... 왠지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내 꿈과 희망에 닿아있어 보이니 그 여정에 동반할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이 클 수밖에... 역자인 김성곤 교수의 옮긴 글 제목도 '읽어버린 어린 시절의 꿈을 찾아서...' 라니... 기대감에 잔뜩 부풀었지.

예전 <오래된 미래>에서 라다크가 서구문명의 이기적 논리로 인해 훼손되어져가는 슬픈 풍경과 다시 마주하지 않을까? 자연을 거스르는 인간만의 오만함속에 숨어있는 상처기를 벌려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지켜보면 되살려야할게 무언지 알아차릴 수 있을 거라는 그런 기대...

아무튼... 읽으면서 47개의 에피소드가 파편처럼 이어져가는 생소한 구성에 대한 거부감을 애써 누를 수 있었던 건 네가 소설에 속해 있었다는 점이야. 흔히 말하는 이야기의 이어짐 즉 서사라는 게 또렷할 거라 속단했어... 첫 번째로 읽을 때, 내가 저지른 가장 큰 실수였지. 바로 난관에 부딪쳤어.

워싱턴 광장에 서 있는 벤자민 프랭클린 동상 앞으로 몰려드는 굶주린 이들의 발걸음에 대한 묘사부터 시작하더니... 바로 이어지는 <나무 두드려보기> 편에서는 미국의 송어낚시인 네게 대사가 주어지잖아. 네 이름은 그저 소설 속 등장인물이 미국 전역을 떠돌며 송어낚시를 하려한다는 그 행위 자체에 다름없다 확신하고 있었는데 네가 어떻게 말을 하는 거지? 이어서, 화자가 버몬트 주에서 만난 할머니와 나눴다는 대화에서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어. 이런 대목이었지...?
나는 버몬트 주에서 한 노파를 송어하천으로 착각하고 용서를 구했다. "실례했습니다." 나는 말했다. "전 할머니가 송어하천인 줄 알았어요." "난 아냐." 할머니가 말했다.
참았어... 뭔가 착오가 있는 거야 당황하는 마음을 애써 눌러버렸지. 하지만... 한두 편 정도 넘어가다 <호두 케첩을 만드는 또 다른 방법>편에서 결국 두 손을 들어버렸어. 그리스의 유명한 성악가 마리아 칼라스와 네가 저녁오찬 중인거야. 일개 책 제목에 불과한 네가, 송어낚시 여행이라는 행위에 불과할 네가 온갖 레시피를 열거하더니 그녀와 먹을 햄버거에 호두케첩을 부어버리는 행동...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겠어?

또 참고 읽었어... 그래... 책 제목이 아니라면, 주인공의 분신 내지 다른 의미의 단순한 상징에 불과할거야 라고 자신을 다독거리며 읽고... 읽었어. 편지, 광고문, 주석 등등 형태의 생소함 그리고 앞뒤가 뒤엉킨 혼란스러움을 눈으로 우겨넣어버렸어. 그리고 끝...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뭐가 남았는지 알아? 당혹스러움뿐이었어. 역자의 설명 따위는 필요 없다 결심하곤 건드리지 않았어. 오로지 본문에서 중요한 걸 놓치고 있었다는 낭패스러움에 매달렸지. 네 이름에 대한 그 어떤 설명조차도 해내지 못하겠다는 자책 따위였어.

다음 날... 네 이름으로 검색이란 걸 해봤지... 국내 영미문학자들의 논문이 몇 편 보이기에 모조리 출력했어. 오랜만의 진정한 자유 시간을 너에게 할애하겠다 결심한거야. 넌 아려나...? 아이 둘의 아빠에게... 몇 년 만에 처음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의 홀가분함 아니 행복한 뭐 그런 기분... 예전 모 기업의 CF에서 올레~ 하던 그 귀중한 시간을 너를 위해 사용한거지. 기다렸던 드라마 보기도, 영화 관람도 포기한 채, 늦은 저녁, 따뜻한 방바닥에 납작 엎드려서는 학창시절로 돌아간 마냥 고루할 밖에 없는 학술자료들을 넘기는 광경... 상상이 가? 그렇게 네게 가는 길을 찾으려 끙끙거리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어. 단순한 결론에 도달했지.
내가 영미문학도도 아닌 마당에, 고작 책 하나를 이해하기 위해 공부란 걸 하고 있다는 자체가 영 낯설었고, 단지 특이한 형태의 소설일 뿐인데... 그 생소함에 너무 매달리는 게 아니냐 라는... 낯설어서 그런 거니 다시 읽어보면 뭔가 잡힐 거야... 라는 결론. 뭐... 사실... 졸리기도 했고.
그래서 두 번째의 읽기가 시작되었어. 사실 첫 번째 읽기에서도 <클리블랜드 폐선장>편처럼 어느 정도 납득이 되는 부분도 있기야 했지. 폐선장에서 피트 단위로 팔리고 있는 중고품 송어하천이라니... 송어하천과 함께 폭포나 나무, 새, 꽃, 곤충, 동물 등도 별도로 판매 중이라며 점원과 화자가 흥정중인 광경이 묘사되잖아. 둘러보겠다고 나선 화자는 실제 조각으로 나뉘어 상품으로 진열되어 있는 대상들과 마주하게 되지. 드러내진 않았지만... 동물이라고 남아 있는 게 수백 마리의 쥐떼 정도라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파괴된 자연에 대한 화자의 슬픔도 슬쩍 알아챌 수 있었고, 누더기 천 조각으로 감춰진 숲과 송어하천을 발견하고 손을 담갔을 때 느꼈다는 차갑고 상쾌한 그런 기분이란 게... 어쩌면 물질주의에 의해 철저하게 파편화된 자연에 대한 풍자 내지 목가적인 풍경으로의 회귀에 대한 갈구일거라고... 꿈과 희망이 흘러내릴 유일한 장소인 송어하천을 되찾기 위해 반성하고 끊임없이 상상하거나 상기시켜야 한다는 그런 울림이 느껴지기도 했어.

그러나 어쨌든 실패야. 저런 몇몇 경우를 제외하곤 앞뒤가 맞질 않았으니. 여전한 당혹스러움뿐이었지.

너를 가방 속에 넣어 들고 다녔어. 읽고 싶은 책들이 저리 많이 쌓여 있는데 좀처럼 건드릴 수 없더라고... 그래도 이 상태에서 세 번째로 너의 표지를 넘긴다는 건, 또 다른 당혹감속으로 나를 밀어 넣을 테니 감히 건드릴 엄두도 못 냈지.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 미국의 송어낚시 너는... 그냥 은유 내지 상징일 뿐이라는데 동의하기로.
나 같이 기계화된 문명에 절여져 살고 있는 우리들이 놓치고 있는 무언가에 대한 상징일 뿐인 거지. 인간이 자연과의 어우러짐을 포기하는 순간부터 상실한 한낱 피조물로서의 심성 그 자체이자 목가적인 풍경으로의 회귀를 위해 사용되는 수단이 아닐까 싶었어. 고정된 형태란 게 없는 거지. 모래상자, 아이, 책이나 음악, 황금펜촉, 호텔이나, 쇼티라는 이름의 누군가 등등으로 옮겨다니는 거야. 브라우티건씨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걸 형식으로 하며 그에 대해 노래하고 상상하고 중얼거렸을 뿐인 거였어. 은유들이 넘쳐나는 시 한편을 쓴 거라고 봐도 될까 싶었지.

세 번째 너를 읽을 때는... 느즈막이 출근하는 지하철 안이었어. 그냥 마음을 차분히 하고... 이해하지 않으려 했지. 은유나 상징의 실체가 무언지 캐내지 않으려 했고... 시를 읽듯 한 땀 씩 글과 글 사이를 이어갔지. 사실... 포기하는 심정으로 읽은 셈이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널렸지만... 여러 대목들이 아름답게 그려지는 거야. 브라우티건씨의 무형태 라는 형태, 초현실적인 작법이라는 게 거슬리긴 해도... 이게 누군가의 상념이라면... 늦은 밤, 무거운 듯 낮게 차오르는 나무내음과도 같은 차분함 내지 우울함, 화남과 같은 감정의 일부에 대한 잡담이라면 이럴 수 있겠구나 수긍할 수 있겠다는 기분이었어.

그러다보니 개연성 있어야할 행위보다는... 잠깐씩 언급하고 마는 풍경 한컷한컷이 눈에 들어오는거야. 송어가 뛰어 오르는 맑고 차가운 물줄기가 느껴지기도 했어. 고백하자면, 묘지나 죽은 물고기, 시체, 총과 같은 죽음의 상징들이 더 많이 눈에 띄기는 했지. 어쩌면 지금 미국의 송어낚시 네 저변에 흐르고 있는 파괴와 폭력, 황폐함에 대한 상징이려나? 너의 조물주인 브라우티건씨의 마지막 순간이 떠오르기도 했어. 헤밍웨이 씨처럼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했다지...? 그것도 출판사에서 고용한 사설탐정에 의해 부패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니... 왠지 그 분의 자살과 네 곳곳에 넘쳐나는 죽음의 분위기라는 게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되어 있지나 않을까 싶더군. 아무튼... 아직 잘 모르겠지만, 조금 더 보태보면... 
서구문명에 의해 파괴된 태곳적 자연에 대한 향수가 느껴지기도 하고, 그런 공간으로 발걸음을 돌리고 싶지만 불가능해져버린 누군가들의 슬픈 좌절을 노래하는 듯싶기도 해. 결국 자신의 머리에 총을 들이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중인지도 모르는 무지몽매한 현대인의 삶을 비아냥거리거나, 책 읽기나 글쓰기, 음악 등 예술행위가 가져오는 구원의 메시지를 담고 있어 보이기도 하고... 살인자의 속내를 한 채 송어낚시를 갈구한다는 위정자·위선자들의 끔찍함에 부들거리는 떨림 같은 것도 보이는 듯싶어.... 또... 이렇게도 얘기해볼게...
현실이 '자연과의 조화를 깬 왜곡된 인간들의 현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좌절이나 죽음 등'으로 대변된다면, 동경할 지점엔 아무리 그렇더라도 '우리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생태적인 조화와 균형을 되찾아야 하고 그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놓여 있는 거지. 브라우티건씨는 미국의 송어낚시라는 거대하고 포괄적인 은유와 상상을 통해, 그 양쪽인 현실과 동경 자체를 표현하기도 하고, 그 둘을 이어버리거나 틈을 메운 셈이라고 하면 되려나...?

마지막으로 흥미로왔던 것 또 하나를 얘기하자면... <미국의 송어낚시 펜촉>편에 언급된 황금펜촉에 대한 언급이야.
이걸로 써, 하지만 이건 세게 눌러쓰면 안 돼. 황금펜촉이거든. 황금펜촉은 예민해서 말이야. 얼마 지나면 이건 쓰는 사람의 성격을 닮게 돼. 다른 사람은 쓸 수가 없게 되는 거지. 이 펜은 쓰는 사람의 그림자와도 같아. 이 펜만 있으면 돼. 하지만 조심해야 해.
글쓰기가 갖는 중요성 내지 작가들이 구현해내야 할 생태주의자로서의 사명에 대한 언급으로 보이는데... 황금펜... 어디서 많이 보았던 단어거든... 혹 대한민국의 모 포털사이트 메타블로그 담당자가 이 대목에서 영감을 받지 않았으려나 싶은 그런 상상이 떠오르길래... 우습지...?

자... 아무래도 마무리 해야겠다... 정리하자면... 난 아직 답을 얻지 못했어. 미국의 송어하천 네가 왜 중요한지, 왜 내가 너에게로 돌아가야 하는지... 대체 네 정체가 무언지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해. 그저 중요하다는데 끄덕끄덕 동의하고픈 심정이란 것만 있는지도 모르지.

여태 주절거린 게 다 무어냐고...? 난 그저... 너를 대하는 태도만 살짝 언급했다 싶어. 누군가가 너에게 다가가려 한다면, 무턱대고 달려가기보다는 가볍게 심호흡하면서, 천천히 다가가라는... 폭탄주 마시듯 벌컥 마셔버리지 말고, 조금씩 음미하는 듯 속도를 조율하라는 그런 얘기가 하고 싶었던 건가 봐...

이젠 너를 손에서 놓으려고 해. 영영은 아니고... 시간을 슬쩍 지나보내고 나서... 다시 찾아보려고. 그땐 지금보다는 더 네게로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싶은 희망을 가져보면서... 이만 줄일께...

그때까지 난 한국의 붕어 낚시라도 찾아봐야 하지 않으려나 싶네... 정말 안녕... 이만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