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처가 드디어 득남하나? '남촌 공생원 마나님의 280일'

사색거리들/책 | 2010. 12. 31. 13:51 | ㅇiㅇrrㄱi

조선 성종시대, 한성부 남촌 사는 공평은 과거와 영 인연이 없어 동네 훈장 노릇도 못할 만날 생원 신세다. 불알친구인 참봉 박기곤이마저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있는 마당에 마나님 최씨의 늦고 늦은 수태소식이 쌍수를 들어 반길 일이지마는 영 미심쩍은 구석이 하나 있어 이마에 세골 주름을 드리운 채 마나님의 불러오는 배를 바라보며 후우, 끄응 탄식으로 허송세월이다. 처가덕 보겠다고 냉큼 상대로 골라버린 최씨로 말하자면 키는 한 뼘이나 더 크고, 몸무게도 너덧 근 더 나가는데다 성격 또한 쾌활하기 그지없어 심약자 공생원이 이길 엄두를 내지 못할 위인이니, 의원 서지남이로부터 불임의 책임이 생원에게 있어 영 아이를 포기하란 선고까지 받은 마당에 배속 아이의 씨가 자신의 것은 아님이 분명하겠지만 감히 추궁할 처지가 못 되는 것이다. 나라님도 공처한다 하여 자신의 공처는 충(忠)의 발현이라 자위하는 공처가 공생원님. 주변 의심 가는 인물들을 용의선상에 올려놓고 나름 수사망을 좁혀가기 시작한다.
불혹의 나이에 등단한 늦깎이 소설가 김진규의 <남촌 공생원 마나님의 280일>에서 280일은 마나님 최씨의 수태기간이다. 당연 이 기간 중 일어난 일들이리라.

남촌 공생원 마나님의 280일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한국소설일반
지은이 김진규 (문학동네,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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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사고 후 종적을 감춘 서의원의 능력에 슬쩍 의심이 가긴하지만 당신은 불임이야! 라는 사형선고의 무게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공생원은 이 수태기간 내내 안달복달하며 용의자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가니, 이야기의 주된 골격은 의처증에 시달리는 공생원의 소심한 탐정놀음일테고 그 알알은 용의자들이 펼쳐내는 사연과 내력으로 꽁꽁 채워져 있다.
이 자식이...
기껏 당사자들과 대면하면서도 '이 자식이...' 라고 속말이나 나부꺼리고, 끙끙 배앓이나 하는 심약함에 그래도 양반인데 하는 체면치례까지 수습해야하는 처지의 공생원. 에둘러 꺼낸 말 한마디에 떨어지는, 상대의 별찮은 대꾸에도 맞대응키 아슬아슬한 인사로, 각 인물들의 길고 긴 사연과 이에 접근해가는 공생원의 줄다리기가 해학의 극치로 펼쳐지며 긴장과 웃음을 동시에 이어간다.

귀한 외아들을 독사에게 빼앗긴 이웃 앵두네의 절통함을 시작으로, 마나님의 배꼽성형을 집도한 의원 채만주, 평생의 붕우이자 숙적인 참봉 박기곤, 마나님의 입맛을 사로잡은 두부장수 강자수, 울퉁불퉁 체구로 아녀자들의 로망인 노비 돈이, 이웃 사는 괴팍쟁이 알도 임술증과 마나님의 절친인 저포전 황용갑, 뜬금없이 마나님께 안부 전하라며 실실거리는 악소배 백달치 등등의 용의자들이 줄줄 등장하는데...

작가는 이들 개개인의 면면에 그치지 않은 간단찮은 낱낱의 이력을 굴렁굴렁 엮어내고 있어, 읽는 이의 시선은 조선이란 나라의 한 때를 살았던 평민 그들의 그렇고 그런 일상의 언저리로 늘어져 간다. 그런 점에서 <남촌 공생원 마나님의 280일>은 지루할 틈이 없다. 공생원의 단순 의처증 기록으로 머물라치면 당시人들의 삶이 꼼꼼히 끼어들어와 시선을 돌리고, 그들의 삶이 지루할만해지면 '이 자식이...' 라며 주위를 환기시키는 공생원의 여전한 의심이 저 갈 방향으로의 기운을 이어간다. 여기에 공생원의 소갈머리나 마나님 최씨의 새침스럼처럼 등장하는 모든 이가 나름의 위치에 적당한 해학과 풍자로 뭉쳐 있으니, 책을 읽다 보면 공생원 마냥 종종 실없이 웃음이나 흘리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될는지 모르겠다. 또 하나, 작가의 철저한 고증노력이 받침 되었을 생소한 옛 용어들마저 초반 가독성을 저해하는가 싶더니만, 중반 이후로는 제 자리를 찾은 듯 그럴싸하게 어우러지고야 마는 것이다.

여차저차해 마나님의 280일이 마무리되어가는 시점. 여전히 홀로 탐정놀이 중인 공생원 앞으로 종적을 감추었던 의원 서지남이가 돌연 나타나서 뜬금없이 아는 체를 하는데... 혹 서지남이 이놈이...? 용의자 한 놈을 더 확보한 공생원에게 드디어 마나님이 출산하려한다는 급한 전갈이 떨어지고. 진통 중 마나님 최씨의 실토는 충격적이다.
당신 자식이 아닙니다...
끝 무렵에 머물다 보면 반전과 반전을 돌고, 시원스럽지만 서럽디 서러운 발차기에 숨이 턱 하니 막혀버려 웃지도 울지도 못할 난망함에 처하는 자신을 보게 될지 모른다. 들여다보고 다시 확인 해봐도 숨만 턱 하니 막혀버리니 나 또한 남자이기에 공생원의 의처에만 덜컥 시선을 실어버렸다는 일종의 원죄 탓일 테다. 불쑥 나타난 범인에게 애꿎은 물볼기라도 날리고픈 심정이다.

문득 고개를 돌려보면... 면면으로 살펴보았던 이들의 후일담도 펼쳐지고, 그제서야 알아차린다. 여태 티격태격 중이었던 이들 모두는 훌쩍 시대를 건너 띈 우리네 모습들일 수도 있다는 걸... 시간이 지나면 슬핏 웃어버릴 수 있는 나름 행복할 동시대인일 수 있다는 걸... 이래도 살아가고 저래도 살아가는 그저 흘려버릴 일상의 숨은 애틋함 속에 공처가 공생원과 마나님 최씨의 거리라는 게 딱 고만큼만 있었던 거라고... 거리만큼만 서로 알고 있고 알고자 했던게 달랐을 뿐이라고...

그나저나, 도대체가 누구의 아이인가? 공처가 공생원과 마나님 최씨는... 이혼이라도 하셨을라나?

읽은 사람만이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