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한 편의 소설이다 '종이여자 La fille de papier'

사색거리들/책 | 2011. 1. 28. 13:45 | ㅇiㅇrrㄱi

그가 그녀의 어깨를 세게 밀쳤다. 그녀는 바닥에 나가떨어지면서...
우리 사는 세상으로 떨어져 나왔다죠? 세상에...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과학으로 입증 못할 기적이 비일비재하다지만 한낱 소설책의 파본 미완성 문장에서 툭 튀어나왔다니... 더군다나 빌리 도넬리라면 톰 보이드의 베스트셀러 <천사 3부작>에 등장하는 가상의 인물이잖아요. 현실이 각색되어 허구를 곁들인 소설로 구현되는 경우는 있어도, 허구의 일부가 현실세계로 제 모습을 갖춰 나타날 수 없다는 건 상식이라 덧붙일 필요도 없는 사실이니... 맹랑한 장난이겠지 했습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구현 가능할 일이라 볼 수밖에요.

그러나 이제... 빌리 도넬리 양 당신이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맹탕으로 마무리될 한 인간의 삶을 필시 죽음이 도사리고 있을 벼랑 끝 가장자리로부터 벗어나게 했음을 인정합니다. 단지 텍스트에 누군가의 상상력이 덧대어 존재할 당신이 인간의 삶 자체가 한 편의 소설이 되고, 소설이 다시 누군가의 삶 일부를 담아낼 수 있을 거라는 가능성을 입증한 당사자이자 증험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네요. 낭창낭창할 긴 다리의 각선미만큼이나 웃음기 어린 표정 하나하나가 사랑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걸 인정하겠습니다.

톰 보이드라는 소설가 얘기 좀 해볼게요. 그 작자 그리 될 줄 알았습니다. 베스트셀러 몇 권으로 갑부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LA의 빈민가 맥아더파크 출신이라는 저열한 근본은 숨길 수 없었던 겝니다. 좀 밸이 꼴리기도 했습니다만 처음부터 삐딱하게 바라보진 않았습니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발판삼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는 자수성가형 스토리도 그렇고, 모교에 수십만 달러를 기부했다는 선행사례를 전해 듣고는 본받을 만한 사회지도층 인사가 되겠다 싶어 일말의 존경심까지 짜내곤 했었죠.

그런데... 주제를 모르고 전 세계 뭇 남성들의 로망인 미모의 천재 피아니스트 오로르 발랑꾸르 양을 넘보다니요. 어디 가당키나 합니까? 그녀가 숱하게 갈아 치우는 명사 대열에 이름 하나 올린 걸로 만족했어야지 감히 어딜... 사랑...? 웃기시네...!
한 여자가 인생 낙오자를 만나 멀쩡한 사람으로 만들겠다고 결심하면 성공 가능성이 없지 않다. 한 여자가 멀쩡한 남자를 만나 인생 낙오자로 만들겠다고 결심하면 무조건 성공한다. - 체사레 파베제
고(故) 파베제 선생님 씨의 명언이죠. 딱 이 꼴이 난겁니다. 소설가가 아무리 순진무구한 상상력 하나로 먹고 산다지만, 삶의 전부를 걸만큼 사랑의 영속성 따위에 신뢰하고 있었나보죠...? 음주운전, 약물중독도 모자라 애꿎은 이들에게 폭언과 폭행... 아무리 실연당했기로서니 선을 너무 넘어서버렸죠. 남자가 말이야. 여자 하나 놓쳤다고 주접떠는 꼴이라니... 아무튼 <천사 3부작> 중 마지막 3편이 나오길 기다리느라 목이 빠질 지경이었는데... 저를 포함해 세헤라자데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전 세계 팬들의 바람은 실현되기 힘들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래도 친구들은 잘 뒀어요. 같은 빈민촌 출신의 밀로와 캐롤을 말하는 겁니다. 출판 에이전트를 맡고 있는 밀로 그 친구... 그간 모은 돈을 다 날려먹는 대형 사고를 치긴 했지만 어떻게든 실연의 우울증에 시달리는 제 친구를 구제하겠다고 발버둥이잖아요. 하긴 끈끈한 우정은 둘째 치고 연말까지 3부를 내지 않으면 둘 다 알거지로 거리에 나 앉게 생겼으니 급박하기도 했을 테죠. 유능한 경찰로의 일상을 꾸려나가는 멋진 캐리어우먼 캐롤은 우정 말고도 뭔가 있어 보이긴 해요. 톰과 공유한... 밀로도 모를 은밀한 비밀 같은 거...? 여튼, 두 친구가 그리 지극정성으로 위로하고 다그치고 격려하는데도 원망과 자포자기, 도피의 감정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톰 그 작자... 참으로 모자란 위인이랄 밖에요.

사람들은 늘 굶주려 있기 마련이랍니다. 그래서 주린 배는 음식으로 채울 테고, 주린 마음은 예술이나 어떤 열정 등으로 채우곤 하죠. 배는 불러오겠지만 마음은 아니에요. 마음이란 게 어디 하나만 있겠습니까? 연꽃 씨가 떠나버린 꽃받기 위의 상흔처럼 숭숭 비어있을 여러 공동(空洞)이 그와 같을 겁니다. 이 마음과 저 마음, 여러 마음이 제 자리를 찾기 위해 각기 떠돌 수밖에요. 예술이나 사랑, 어떤 열정으로 충만한 듯해도... 오로지 그 하나만으로 채워낼 수 없어요. 각기 하나씩만 제 자리를 지닐 뿐이니... 사람이, 사랑이 빠져나가고 그렇게 삶의 기대가 홀연히 사라졌더라도 소중하게 채워진 다른 자리와 저만의 가치 또한 분명 있는 겁니다. 이들을 둘러보려는 시도 없이 광기와 죽음으로 모든 자리를 억지 메꿈 하려는 건... 무모한 결단 아닐까요? 이렇게 요약해보면 어떨까요...? 단 하나로 채워지지 않을 게 사람 마음이라고... 단 한 사람으로 채워지지 않을 게 사람 속이라는 걸 톰은 잊은 거죠... 
 
종이여자
카테고리 소설 > 프랑스소설
지은이 기욤 뮈소 (밝은세상,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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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당신 얘기를 해보죠. 톰의 거실에 호리호리하고 낭창낭창한 실루엣으로 나타났을 때만해도 광팬이겠거니 했습니다.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미친X... 뭐 이정도... 하하... 기분 나빠하진 말아요. 그때 그랬다는 것뿐이니. 그런데 당신이 충격 선언을 하죠. 자신은 톰 보이드가 쓴 <천사 3부작>의 2권 디럭스 에디션의 266페이지 미완성 문장 속에서 떨어져 나왔다고...? 우울증과 약물에 쇠락한 톰의 육신이 위로 차원으로 내보낸 환상이 아닐까도 했던 대목입니다. 밝혔지만... 톰과 마찬가지로 저 또한 믿지 않았습니다. 누가 믿어요? 그런 말을... 하지만 인정할 밖에요. 톰 자신만이 알고 있는 빌리 도넬리란 인물의 시시콜콜한 대목까지 모두 꿰고 있으니. 광팬이라면 충분히 알 수 있을 생년월일이나 출생지, 가족관계, 음식취향 등은 물론이거니와 출간된 소설에 언급하지도 않은 음악취향, 관계한 남자 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나 마지막 울었던 기억들의 소소함까지 다 알고 있으니... 믿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겁니다.

여차저차해서 당신이 톰과 오로르를 다시 맺어주겠다고 멕시코 행 여정 길에 오를 때는 좀 의외였네요. 이미 다른 남자와 공개열애 중인 처자를 찾아가 뭘 어쩌겠다는 건지... 어쩔 수 없기야 했겠죠. 실연의 상심을 어떻게든 만회해줘야 그 작자가 3부를 써내려갈 테고, 그래야 당신이 다시 책 속 보금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니... 당신의 행복한 귀가를 위해 톰이 백지 공포증을 이겨내길 내심 응원했습니다.
책을 통해 옹호해온 가치들, 가령 불행을 돌파하는 의지, 역전을 이끌어내는 투지, 고꾸라져도 다시 일어나 재도약하는 승부근성 따위는 글로 표현하기 쉬울지 몰라도 실천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죠.
당신의 이런 강변에 톰이 서로의 인생을 되찾기 위해 멕시코 행을 결정하는 장면은 자못 엄숙하기까지 했답니다. 많은 일들이 일어나죠. 바닥난 은행잔고 때문에 명품시계를 헐값에 넘기질 않나. 속도위반으로 차까지 버리고, 기껏 마련한 고물차마저 도둑맞아 고물 스쿠터를 얻는 등의 지지리 궁상 끝에 목적지에 도착하죠. 아무튼 그 와중에 톰은 자신을 다시 돌아보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겁니다. 당신의 즉흥적인 행동과 말에 대응하고, 여러 상황과 타인들과의 시시콜콜한 조우를 통해 마음을 채우고 있었던 다른 연꽃 의 존재를 알아차리게 된 거죠. 아마 자신을 돌아보지 못할 만큼 경황이 없을 때조차도 끊임없이 살아갈 가치를 찾으려 두리번거려야 한다는 간단한 교훈 하나를 얻는 과정이 그리 고단했던 건지 모르겠습니다. 부러움으로 배 아파올 것 같은 마법의 상황이 예상돼 못마땅하기야 했지만 어떤 생명조차도 하찮을 수 없다는 존엄 앞에서 보자면 그 작자에겐 잘 된 일이기도 하겠죠?

아무튼...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의 불만족에 대한 도피처로 소설을 읽는다는 톰의 말에 당신이 이렇게 대꾸해요. 삶의 소금이 되는 깊은 맛을 담아내지 못한다면 아무리 멋들어진 스토리와 뛰어난 묘사로 덧칠이 되어 있더라도... 소설은 과일의 오묘한 빛깔과 살이 붙은 입체감을 놓아버린 우중충한 세계일뿐이라고. 어쩌면 톰을 비롯한 작가들이 늘 상기시켜야할 명언을 남긴 게 아닐까도 싶었습니다.
헛고생을 하며 찾을 때는 없다가도 막상 찾는 일을 그만두면 발견될 때가 있다. - 제롬 K, 제롬
다음은 숨이 가뿌더만요. 뒤쫓아 온 친구들, 사랑의 영속성을 믿지 않았기에 상처받을까 불안에 떨었을 뿐인 오로르와의 조우와 톰의 깨달음, 당신이 떨어져 나왔다는 디럭스 에디션 10만여 권의 파쇄작업과 동시에 찾아온 심장병과 수술, 톰의 집 쓰레기통에 버려졌던 단 한권에 걸린 당신의 삶, LA와 로마, 대한민국과 다시 뉴욕으로까지 방랑하게 되는 책의 여정, 캐롤이 털어놓는 비밀... 그리고 조우... 그야말로 모든 것이 마무리되는 조우와 다른 시작

재미있는 대목 중 하나는 제가 살고 있는 나라 대한민국이 등장한다는 겁니다. 다소 낯간지러운 묘사로 살갗이 우툴두툴해질 느낌이었지만 뭐 그래도 반갑긴 했습니다. 드디어 톰이 어떤 각성 아래 털어놓는 고백도 인상적이었어요. 소설이 독자 각각의 상상력에 힘입지 못하면, 작가가 그린 상상의 세계는 죽어버린 세계일뿐이라는... 도식까지 그려가며 절절히도 설명하기에 깨달음의 정도가 몹시 지나쳤나? 싶기도 했습니다만, 처음부터 톰 그 작자가 연이어 쏟아내는 글쓰기와 작품, 독자나 독서에 대한 여러 잡소릴 떠올려보니... 평소 지녀왔던 작가로서의 신념과 같은 고백을 누구 대신 털어놓는 게 아닐까 싶더군요. 누구냐고요...? 참나... 다 아시면서...?
삶은 한 편의 소설이다...!
우와... 사실은 빌리 도넬리 당신에게 쏟아내는 일종의 연서(戀書)이지 싶었는데 쓸데없이 딴 놈팡이 얘기만 늘어놓고 있었군요. 솔직히 고백컨대, 전 애 둘 딸린 품절남(?)입니다. 마음 가는대로의 연정 또한 불륜과 다를 바 없다는 상식이 지배한 현실이지만, 정말 마음가는대로 당신의 사랑스러움을, 그저 떠올림만으로도 입 꼬리가 올라가는 흐뭇함을 감춰둘 수가 없어서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으로 인해 많은 것들을 접할 수 있었어요. 무엇보다 허구와 현실 사이를 잇는 상상력의 소중함에 대한 깨달음이 새삼 컸습니다. 소설 속 허구 또한 옴팡진 현실이든 말랑거릴 현실이든 그에 대한 솔직한 고백일 수 있으니 행간을 읽어내야 한다는 책 읽기의 기본자세를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허구가 현실이 되고 현실이 소설 속 허구가 될 수 있는 바탕에 각자가 지닌 환상과 꿈에 대한 순박한 바람이나 믿음이... 마치 아이마냥 순백할 심정으로 놓여 있게 된다면 삶의 활력이 될 수 있음 또한 느꼈네요. 삶이 한 편의 소설이 되고, 소설이 한 편의 삶이 되는 모호함의 연속인거죠. 물론 낭창낭창 하다는 당신의 미끈한 다리에서 떠올리는 어떤 연상도 없지 않아 있었음을 아저씨의 심정으로 씁쓸히 고백해야겠군요.

그래서 부탁 말씀 드리겠습니다. 톰이란 작자에게 그리하였듯... 제 앞으로도 뚝 떨어져 주지 않으시렵니까? 물론 당신이 들락거렸던 책이야 톰이 어딘가로 꽝꽝 감춰두었을 테니, 그 책을 통하기는 불가능할 여건입니다만... 제가 다른 책을 준비하여 둘 터이니 표식 해놓은 대목에서 빠져 나오시면 되는 겁니다. 이미 가능하다는 선례가 있으니 불가능하다는 변명거리는 거두어 주셨으면 싶네요. 오늘 저녁... 식구들 다 재우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당신과 나 말고는 어느 누구도 이 사실을 알 수 없을 거라 비밀의 서약도 하겠습니다. 불안해할 필요 없어요. 안심하고 나타나시면 됩니다.

무슨 책의 무슨 대목이냐고요...? 심사숙고해서 또 당신의 품격을 고려해 명망 있는 고전으로 두 권을 골랐는데요. 당신 마음에 드는 걸로 선택하셔도 무방하겠습니다.

제목은요... 음... 좀 쑥스럽지만... <채널리 부인의 사랑>과 <데카메론>입니다. 페이지는...? 어... 그게... 뭘 물어요...? 부끄럽게... 아... <데카메론>에선 길 잃지 마시고, 셋째 날 이야기 중 세 번째 이야기에서 나오셔야 해요! 물론 수도사 말고 소녀로요! 흐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