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한 편의 소설이다 '종이여자 La fille de papier'

사색거리들/책 | 2011. 1. 28. 13:45 | ㅇiㅇrrㄱi

그가 그녀의 어깨를 세게 밀쳤다. 그녀는 바닥에 나가떨어지면서...
우리 사는 세상으로 떨어져 나왔다죠? 세상에...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과학으로 입증 못할 기적이 비일비재하다지만 한낱 소설책의 파본 미완성 문장에서 툭 튀어나왔다니... 더군다나 빌리 도넬리라면 톰 보이드의 베스트셀러 <천사 3부작>에 등장하는 가상의 인물이잖아요. 현실이 각색되어 허구를 곁들인 소설로 구현되는 경우는 있어도, 허구의 일부가 현실세계로 제 모습을 갖춰 나타날 수 없다는 건 상식이라 덧붙일 필요도 없는 사실이니... 맹랑한 장난이겠지 했습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구현 가능할 일이라 볼 수밖에요.

그러나 이제... 빌리 도넬리 양 당신이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맹탕으로 마무리될 한 인간의 삶을 필시 죽음이 도사리고 있을 벼랑 끝 가장자리로부터 벗어나게 했음을 인정합니다. 단지 텍스트에 누군가의 상상력이 덧대어 존재할 당신이 인간의 삶 자체가 한 편의 소설이 되고, 소설이 다시 누군가의 삶 일부를 담아낼 수 있을 거라는 가능성을 입증한 당사자이자 증험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네요. 낭창낭창할 긴 다리의 각선미만큼이나 웃음기 어린 표정 하나하나가 사랑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걸 인정하겠습니다.

톰 보이드라는 소설가 얘기 좀 해볼게요. 그 작자 그리 될 줄 알았습니다. 베스트셀러 몇 권으로 갑부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LA의 빈민가 맥아더파크 출신이라는 저열한 근본은 숨길 수 없었던 겝니다. 좀 밸이 꼴리기도 했습니다만 처음부터 삐딱하게 바라보진 않았습니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발판삼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는 자수성가형 스토리도 그렇고, 모교에 수십만 달러를 기부했다는 선행사례를 전해 듣고는 본받을 만한 사회지도층 인사가 되겠다 싶어 일말의 존경심까지 짜내곤 했었죠.

그런데... 주제를 모르고 전 세계 뭇 남성들의 로망인 미모의 천재 피아니스트 오로르 발랑꾸르 양을 넘보다니요. 어디 가당키나 합니까? 그녀가 숱하게 갈아 치우는 명사 대열에 이름 하나 올린 걸로 만족했어야지 감히 어딜... 사랑...? 웃기시네...!
한 여자가 인생 낙오자를 만나 멀쩡한 사람으로 만들겠다고 결심하면 성공 가능성이 없지 않다. 한 여자가 멀쩡한 남자를 만나 인생 낙오자로 만들겠다고 결심하면 무조건 성공한다. - 체사레 파베제
고(故) 파베제 선생님 씨의 명언이죠. 딱 이 꼴이 난겁니다. 소설가가 아무리 순진무구한 상상력 하나로 먹고 산다지만, 삶의 전부를 걸만큼 사랑의 영속성 따위에 신뢰하고 있었나보죠...? 음주운전, 약물중독도 모자라 애꿎은 이들에게 폭언과 폭행... 아무리 실연당했기로서니 선을 너무 넘어서버렸죠. 남자가 말이야. 여자 하나 놓쳤다고 주접떠는 꼴이라니... 아무튼 <천사 3부작> 중 마지막 3편이 나오길 기다리느라 목이 빠질 지경이었는데... 저를 포함해 세헤라자데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전 세계 팬들의 바람은 실현되기 힘들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래도 친구들은 잘 뒀어요. 같은 빈민촌 출신의 밀로와 캐롤을 말하는 겁니다. 출판 에이전트를 맡고 있는 밀로 그 친구... 그간 모은 돈을 다 날려먹는 대형 사고를 치긴 했지만 어떻게든 실연의 우울증에 시달리는 제 친구를 구제하겠다고 발버둥이잖아요. 하긴 끈끈한 우정은 둘째 치고 연말까지 3부를 내지 않으면 둘 다 알거지로 거리에 나 앉게 생겼으니 급박하기도 했을 테죠. 유능한 경찰로의 일상을 꾸려나가는 멋진 캐리어우먼 캐롤은 우정 말고도 뭔가 있어 보이긴 해요. 톰과 공유한... 밀로도 모를 은밀한 비밀 같은 거...? 여튼, 두 친구가 그리 지극정성으로 위로하고 다그치고 격려하는데도 원망과 자포자기, 도피의 감정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톰 그 작자... 참으로 모자란 위인이랄 밖에요.

사람들은 늘 굶주려 있기 마련이랍니다. 그래서 주린 배는 음식으로 채울 테고, 주린 마음은 예술이나 어떤 열정 등으로 채우곤 하죠. 배는 불러오겠지만 마음은 아니에요. 마음이란 게 어디 하나만 있겠습니까? 연꽃 씨가 떠나버린 꽃받기 위의 상흔처럼 숭숭 비어있을 여러 공동(空洞)이 그와 같을 겁니다. 이 마음과 저 마음, 여러 마음이 제 자리를 찾기 위해 각기 떠돌 수밖에요. 예술이나 사랑, 어떤 열정으로 충만한 듯해도... 오로지 그 하나만으로 채워낼 수 없어요. 각기 하나씩만 제 자리를 지닐 뿐이니... 사람이, 사랑이 빠져나가고 그렇게 삶의 기대가 홀연히 사라졌더라도 소중하게 채워진 다른 자리와 저만의 가치 또한 분명 있는 겁니다. 이들을 둘러보려는 시도 없이 광기와 죽음으로 모든 자리를 억지 메꿈 하려는 건... 무모한 결단 아닐까요? 이렇게 요약해보면 어떨까요...? 단 하나로 채워지지 않을 게 사람 마음이라고... 단 한 사람으로 채워지지 않을 게 사람 속이라는 걸 톰은 잊은 거죠... 
 
종이여자
카테고리 소설 > 프랑스소설
지은이 기욤 뮈소 (밝은세상,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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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당신 얘기를 해보죠. 톰의 거실에 호리호리하고 낭창낭창한 실루엣으로 나타났을 때만해도 광팬이겠거니 했습니다.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미친X... 뭐 이정도... 하하... 기분 나빠하진 말아요. 그때 그랬다는 것뿐이니. 그런데 당신이 충격 선언을 하죠. 자신은 톰 보이드가 쓴 <천사 3부작>의 2권 디럭스 에디션의 266페이지 미완성 문장 속에서 떨어져 나왔다고...? 우울증과 약물에 쇠락한 톰의 육신이 위로 차원으로 내보낸 환상이 아닐까도 했던 대목입니다. 밝혔지만... 톰과 마찬가지로 저 또한 믿지 않았습니다. 누가 믿어요? 그런 말을... 하지만 인정할 밖에요. 톰 자신만이 알고 있는 빌리 도넬리란 인물의 시시콜콜한 대목까지 모두 꿰고 있으니. 광팬이라면 충분히 알 수 있을 생년월일이나 출생지, 가족관계, 음식취향 등은 물론이거니와 출간된 소설에 언급하지도 않은 음악취향, 관계한 남자 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나 마지막 울었던 기억들의 소소함까지 다 알고 있으니... 믿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겁니다.

여차저차해서 당신이 톰과 오로르를 다시 맺어주겠다고 멕시코 행 여정 길에 오를 때는 좀 의외였네요. 이미 다른 남자와 공개열애 중인 처자를 찾아가 뭘 어쩌겠다는 건지... 어쩔 수 없기야 했겠죠. 실연의 상심을 어떻게든 만회해줘야 그 작자가 3부를 써내려갈 테고, 그래야 당신이 다시 책 속 보금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니... 당신의 행복한 귀가를 위해 톰이 백지 공포증을 이겨내길 내심 응원했습니다.
책을 통해 옹호해온 가치들, 가령 불행을 돌파하는 의지, 역전을 이끌어내는 투지, 고꾸라져도 다시 일어나 재도약하는 승부근성 따위는 글로 표현하기 쉬울지 몰라도 실천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죠.
당신의 이런 강변에 톰이 서로의 인생을 되찾기 위해 멕시코 행을 결정하는 장면은 자못 엄숙하기까지 했답니다. 많은 일들이 일어나죠. 바닥난 은행잔고 때문에 명품시계를 헐값에 넘기질 않나. 속도위반으로 차까지 버리고, 기껏 마련한 고물차마저 도둑맞아 고물 스쿠터를 얻는 등의 지지리 궁상 끝에 목적지에 도착하죠. 아무튼 그 와중에 톰은 자신을 다시 돌아보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겁니다. 당신의 즉흥적인 행동과 말에 대응하고, 여러 상황과 타인들과의 시시콜콜한 조우를 통해 마음을 채우고 있었던 다른 연꽃 의 존재를 알아차리게 된 거죠. 아마 자신을 돌아보지 못할 만큼 경황이 없을 때조차도 끊임없이 살아갈 가치를 찾으려 두리번거려야 한다는 간단한 교훈 하나를 얻는 과정이 그리 고단했던 건지 모르겠습니다. 부러움으로 배 아파올 것 같은 마법의 상황이 예상돼 못마땅하기야 했지만 어떤 생명조차도 하찮을 수 없다는 존엄 앞에서 보자면 그 작자에겐 잘 된 일이기도 하겠죠?

아무튼...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의 불만족에 대한 도피처로 소설을 읽는다는 톰의 말에 당신이 이렇게 대꾸해요. 삶의 소금이 되는 깊은 맛을 담아내지 못한다면 아무리 멋들어진 스토리와 뛰어난 묘사로 덧칠이 되어 있더라도... 소설은 과일의 오묘한 빛깔과 살이 붙은 입체감을 놓아버린 우중충한 세계일뿐이라고. 어쩌면 톰을 비롯한 작가들이 늘 상기시켜야할 명언을 남긴 게 아닐까도 싶었습니다.
헛고생을 하며 찾을 때는 없다가도 막상 찾는 일을 그만두면 발견될 때가 있다. - 제롬 K, 제롬
다음은 숨이 가뿌더만요. 뒤쫓아 온 친구들, 사랑의 영속성을 믿지 않았기에 상처받을까 불안에 떨었을 뿐인 오로르와의 조우와 톰의 깨달음, 당신이 떨어져 나왔다는 디럭스 에디션 10만여 권의 파쇄작업과 동시에 찾아온 심장병과 수술, 톰의 집 쓰레기통에 버려졌던 단 한권에 걸린 당신의 삶, LA와 로마, 대한민국과 다시 뉴욕으로까지 방랑하게 되는 책의 여정, 캐롤이 털어놓는 비밀... 그리고 조우... 그야말로 모든 것이 마무리되는 조우와 다른 시작

재미있는 대목 중 하나는 제가 살고 있는 나라 대한민국이 등장한다는 겁니다. 다소 낯간지러운 묘사로 살갗이 우툴두툴해질 느낌이었지만 뭐 그래도 반갑긴 했습니다. 드디어 톰이 어떤 각성 아래 털어놓는 고백도 인상적이었어요. 소설이 독자 각각의 상상력에 힘입지 못하면, 작가가 그린 상상의 세계는 죽어버린 세계일뿐이라는... 도식까지 그려가며 절절히도 설명하기에 깨달음의 정도가 몹시 지나쳤나? 싶기도 했습니다만, 처음부터 톰 그 작자가 연이어 쏟아내는 글쓰기와 작품, 독자나 독서에 대한 여러 잡소릴 떠올려보니... 평소 지녀왔던 작가로서의 신념과 같은 고백을 누구 대신 털어놓는 게 아닐까 싶더군요. 누구냐고요...? 참나... 다 아시면서...?
삶은 한 편의 소설이다...!
우와... 사실은 빌리 도넬리 당신에게 쏟아내는 일종의 연서(戀書)이지 싶었는데 쓸데없이 딴 놈팡이 얘기만 늘어놓고 있었군요. 솔직히 고백컨대, 전 애 둘 딸린 품절남(?)입니다. 마음 가는대로의 연정 또한 불륜과 다를 바 없다는 상식이 지배한 현실이지만, 정말 마음가는대로 당신의 사랑스러움을, 그저 떠올림만으로도 입 꼬리가 올라가는 흐뭇함을 감춰둘 수가 없어서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으로 인해 많은 것들을 접할 수 있었어요. 무엇보다 허구와 현실 사이를 잇는 상상력의 소중함에 대한 깨달음이 새삼 컸습니다. 소설 속 허구 또한 옴팡진 현실이든 말랑거릴 현실이든 그에 대한 솔직한 고백일 수 있으니 행간을 읽어내야 한다는 책 읽기의 기본자세를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허구가 현실이 되고 현실이 소설 속 허구가 될 수 있는 바탕에 각자가 지닌 환상과 꿈에 대한 순박한 바람이나 믿음이... 마치 아이마냥 순백할 심정으로 놓여 있게 된다면 삶의 활력이 될 수 있음 또한 느꼈네요. 삶이 한 편의 소설이 되고, 소설이 한 편의 삶이 되는 모호함의 연속인거죠. 물론 낭창낭창 하다는 당신의 미끈한 다리에서 떠올리는 어떤 연상도 없지 않아 있었음을 아저씨의 심정으로 씁쓸히 고백해야겠군요.

그래서 부탁 말씀 드리겠습니다. 톰이란 작자에게 그리하였듯... 제 앞으로도 뚝 떨어져 주지 않으시렵니까? 물론 당신이 들락거렸던 책이야 톰이 어딘가로 꽝꽝 감춰두었을 테니, 그 책을 통하기는 불가능할 여건입니다만... 제가 다른 책을 준비하여 둘 터이니 표식 해놓은 대목에서 빠져 나오시면 되는 겁니다. 이미 가능하다는 선례가 있으니 불가능하다는 변명거리는 거두어 주셨으면 싶네요. 오늘 저녁... 식구들 다 재우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당신과 나 말고는 어느 누구도 이 사실을 알 수 없을 거라 비밀의 서약도 하겠습니다. 불안해할 필요 없어요. 안심하고 나타나시면 됩니다.

무슨 책의 무슨 대목이냐고요...? 심사숙고해서 또 당신의 품격을 고려해 명망 있는 고전으로 두 권을 골랐는데요. 당신 마음에 드는 걸로 선택하셔도 무방하겠습니다.

제목은요... 음... 좀 쑥스럽지만... <채널리 부인의 사랑>과 <데카메론>입니다. 페이지는...? 어... 그게... 뭘 물어요...? 부끄럽게... 아... <데카메론>에선 길 잃지 마시고, 셋째 날 이야기 중 세 번째 이야기에서 나오셔야 해요! 물론 수도사 말고 소녀로요! 흐흐흐...


인간이 지닌 광기의 끝 '아메리칸 사이코 American Psycho'

사색거리들/책 | 2011. 1. 25. 16:28 | ㅇiㅇrrㄱi

psycho [sáikou] 1 정신병자, 괴짜, 기인(奇人) 2 정신 의학의, 정신병 치료의...
서가 사이를 배회하다 인간의 광기 한 대목과 마주하게 된다. 두툼함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여, 엔간해선 손대지 않았을 책이었지만 제목에서 오는 강렬함에 건드린 것이 화근이었다. 정신병자가 널린 세상에서... 신문과 방송, 인터넷 여기저기에서도 정신병자의 흔적을 발견해내기란 별다른 첨언이 불필요할 만큼 흔한 일상인데... 유난히 책등의 단어가 눈을 혼란시키는 게 무언가 있어 보인다. 책 표지 앞뒤로 붙어있는 19세 미만 구독 불가 스티커가 장난같다. 도서관 책 몇 페이지쯤이야 예사로 오려내 챙기는 세태에서 애교로 봐줄만한 장난이다. 어찌나 꽁꽁 붙였는지 좀처럼 떼어지질 않는다. 포기해 버린다. 몹쓸 인간이다. 19세 미만 구독 불가의 장난 한 뭉치를 남겨놓은 채로 첫 장을 넘긴다. (누군가의 장난질이 아닌 실제 19세 미만 구독 불가 판정을 받아서 경고스티커가 부착되고 밀봉상태에서 판매되었고 판매금지의 수난까지 겪었다 한다)

브렛 이스턴 엘리스의 <아메리칸 사이코 American Psycho>... 언젠가 보았던... 십 수 년도 전에 보았던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 American Psycho>의 원작이다. 크리스찬 베일이 여피족 주인공 역에 분해 도끼를 휘두르는 슬래셔풍의 영화였단 기억... 칼날이 수시로 번득였고 난해한 의도가 있었다는 추가된 기억... 주인공 페트릭 베이트먼이 애인 애벌린에게 찾아가는 광경을 묘사한 초반부의 어수선함이 상당하다. 의미 없는 대화가 뒤섞이듯 이어지고,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이... 그가 자위 중 떠올리는 캘빈클라인 광고만큼이나 무의미한 관념들이 나열된다. 줄거리 따라잡기 방식의 책읽기로는 읽었던 부분을 두서없이 돌아봐야할 지경이다.

뉴욕의 상류층, 여피족(yuppie)인 27살의 '나', 베이트먼의 1인칭 시점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는 인간 자체가 물질로 표식화 되는 당시 그리고 지금에도 적용될 물질주의 세태의 만연함을 세밀하게 늘어놓는다. 독자는... '나'의 방과 거실이 어떤 초호화 명품기기들로 치장되어 있으며, 그 기기들은 어떤 스펙과 우월함을 갖는지, 피부진정을 위해 사용하는 값비싼 팩의 메이커나 심지어 치실과 칫솔의 종류 등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식사비로 수백 달러는 예사인 고급레스토랑(반드시 Zagat에 등재된) 예약에 열 올리는 모습과 식사하는 광경, 그 와중에 나누는 무의미한 잡담들에도 익숙해져야 한다. 사람들이란 그저 입고 있는 옷과 신발의 브랜드, 스타일링의 조화로움이 갖는 가치와 동격이다. 명품유행을 놓치고, 돈이 없거나, 무능력하다는 건, 인간으로서의 모든 가치를 상실 당했음에 다름 아니다. 이렇듯, 베이트먼의 모든 일상은... 주변 인물과 나누는 대화에서조차도 감흥 없는 물질이 우선한다.
그는 카날리 밀라노제 아마포 양복에 이케 베아르 면 셔츠, 빌 블라스 실크 넥타이, 브룩스 브라더스의 캡토 가죽 구두 차림이다. 나는 가벼운 느낌의 아마포 양복에 주름 잡힌 바지와 면 셔츠에 물방울무늬 실크 넥타이 차림으로 모두 발렌티노 쿠튀르 제품이다. 해리스에 들어서자 맨 앞쪽 자리에 앉은 데이비드 밴 패튼과 크레이그 맥더모트가 눈에 띈다. 밴 패튼은 마리오 발렌티노의 안주름 잡은 양모와 실크 혼방 소재의 바지에 지트먼 브라더스의 면 셔츠에 빌 블라스의 실크 소재 물방울무늬 넥타이와 브룩스 브라더스 가죽 구두 차림이다. 맥더모트는 아마포 소재의 더블 브레스트 슈트, 실크 소재의 스포츠 코트, 단추로 앞을 여미는 양모와 실크 혼방 소재의 바지, 바질레의 면과 아마포 소재에다 단추로 채우는 셔츠, 조지프 아부드의 실크 넥타이, 수전 베니스 워렌 에드워즈의 타조 가죽 로퍼 차림이다....
세심하고 구체적인 명품브랜드에 대한 소개는 베이트먼 그가 속한 세대를 잠식한 물질주의 자체를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방편으로, 그의 가치판단에 전제된 시선이란 게 무얼 바닥삼아 있음을 환기시키기 위해서인지 쉴 새 없이 반복되는 대목 중 하나다. 이런 물질로도 채워질리 없을 공허함을 극대화하기 위한 방편일까...? 갖가지 호사로 가득한 삶 너머 뒷 그늘을 베이트먼은 가학적인 섹스, 살인 그리고 식인으로 묘사되는 광기 가득한 분열의 과정으로 채워나간다. 당혹스럽게도... 이런 과정에 대한 묘사에서도 망설임 없는 작가의 대담함으로 인해 '눈 너머, 텍스트 너머'로 조망할 뿐인 입장에서조차 참담함이란 게 그 경계를 모를 지경에 이른다.

텍스트로 묘사되는 잔혹함이란 게 영상물에 비할까 했는데... 돌연 노숙자의 눈을 찔러대고, 개의 복부를 가르더니, 사람(특히 여성)을 세밀히 절단해 내며, 입술을 물어뜯고, 뇌를 파먹질 않나, 시간(屍奸)은 예사... 텍스트가 선사(?)할 수 있는 잔혹함의 끝이 이정도구나 싶을 정도다. 지나버린 단락을 다시 거스른다는 게 두려울 정도로 잔혹하다. 잔혹하고 잔혹해서... 무미건조하게 살육을 행하는 베이트먼을 따르다보면 혀 아래로 침이 잔뜩 고인다. 불편하게 숨 쉬며 멀거니 읽다보니 침 한번 삼키는 동작조차 부담스러웠을지도, 끝 간 데 없이 고약해져 가는 장면의 나열에 쓴물이 고이는 것일 수도 있었을 게다. 19세 미만 구독 불가가 아닌 <19세 미만과 더불어 건전한 상상력의 소유자는 평생 구독 불가 / 본 작품이 갖는 문학적 교훈과 가치는 차치하고라도 읽는 중이나 그 후의 후유증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음>이라는 긴 경고 스티커로 교체해도 무방하지 싶다.

이런 세밀한 묘사는 1인칭 시점의 전개방식에 힘입어 읽는 이의 코 앞까지 쓴 기운을 들이미는데, 달리 보자면 베이트먼의 황폐해져가는 정신세계를 조망하기엔 최적의 요건이 되기도 한다. 그저 살인을 했다라는 식이라면 냉혈한의 살인행각 이야기인가 싶어 거리를 두겠지만 참혹한 살인과 그 와중 행하는 신체훼손의 엽기행위에 '같은 시선, 같은 느낌'으로 동참하다보니 떨어져 관찰하기보다 나와 그의 경계가 사라진 것 같은 밀착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베이트먼의 광기 언저리로 점점 빠져들어 가는 동시에 돈으로 상징되는 물질로 하여 제반 가치를 평가하는 물질주의·배금주의 생활상(비단 과거 1980년대 물 건너 미국에서의 일로 매듭지어지지 않고 지금도 주변에서 혹은 내 자신의 일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이 인간이 지닌 악한 본성의 같은 쪽으로 서 있음을... 그 잔혹한 살육행위를 통해 적잖이 동감할 수 있는 것이다.
어느 순간... 모든 것들의 실재라는 게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한다...!
돌연, 나가 아닌 베이트먼으로, 그리고 다시 나로 서술시점이 오락가락하면서 잔혹한 살육극의 피해자였던 인물이 무탈하게 살아있다는 게 밝혀지면서부터 의구심이 치민다. 사실 100여건이 넘는 살인의 규모(?)를 감안할 때 단 한 차례도 체포에 대한 두려움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허무맹랑함에서부터 진즉 눈치 챌 수도 있었으려나...? 경찰부터 시작해 맞닥뜨리는 모든 이들에게 가차 없이 총알을 박아버리고도 태평스럽게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즐기는 태평스러움이란 게 가능이나 한 세상인가...?

앞서의 모든 것들이 한낱 망상이었을까? 정신분열증이 악화되어가는 병자의 참혹한 환상에 불과했던 것인가? 아니... 진정 현실일까? 라는 의문이 있겠지만 이 대목에서조차 굳이 이해를 목적으로 그간의 행적들을 되짚어 볼 필요가 없을 테다. 읽는 나는 이미 베이트먼의 미쳐갈 수밖에 없는 수순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을 테니... 저리도 건조한 강박의 시선 속에서 자아의 황폐해져감에도 끝 간 데가 없을 것임을 동감하고 있을 테니... 실재였든 허상 이였든 중요할 이유란 건 하나 없는 것이다.

숨 쉴 곳 없이 막혀버린 사각의 방, 정결한 하얀색 벽지로 사방이 도배된 그런 공간에 갇혀 살아가는 '나' 베이트먼에겐 출구란 애초부터 없었을 바람이었을까? 마지막 장을 넘기는 순간 다시 숨이 턱하니 막힌다. '여기는 출구가 아닙니다'는 곧 어느 곳도 출구가 될 수 없음을, 출구란 애당초 없었으며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임을 알리는 우울한 증표와 같다. 광기는 끝없이 이어지지만... 어떤 해결책도 없다. 무미건조, 씁쓸함, 잔혹, 끔찍, 미쳐감, 분열, 쓴물, 울렁거림과 속쓰림, 토악질, 돈과 자본주의, 살인, 거짓, 가식, 동정, 환상과 망상, 외면, 허기와 외로움, 식욕, 지독함, 지독함 그리고 지독함... 막혀버린 출구와 같이 따라오는 단어들이고 그 끝에 인간의 광기가 있다.

크리스챤 베일의 핏빛 기운이 느껴지는 광기보다 100만 배만큼 더 씁쓸할 한 인간의 안쪽을... 어쩌면 우리 모두가 가졌을지 모를 내면의 조각 일부를 들여다보거나 의심하고 싶어진다면... 크게 심호흡을 하고 책 읽기를 시작해도 좋다...!

아무래도 <아메리칸 사이코>의 인상을 아래 크리스챤 베일의 스틸 컷만큼 제대로 표현해 내기가 힘들지 않을까? (클릭하고 놀라지 말 것!!!)




보고 싶고 또 보고 싶으오 '저승차사 화율의 마지막 선택'

사색거리들/책 | 2011. 1. 24. 13:38 | ㅇiㅇrrㄱi

어금니가 알아차리는 냉기...
양 어금니가 저릿해지는 추위가 연일이다. 지독스러운 냉기는 시린 발이나 얼어버린 귓불보다 어금니가 먼저 알아차린다. 시린 바람이 채 와 닿기도 전, 참아보자! 우악스레 어금니를 마주 물고 발걸음을 놀리다보면 바람에 잔뜩 실린 냉기와 비례해 악력에 힘을 보태곤 하니... 속수무책의 포갬 질에 시달리는 어금니 무리들이 절절매는 것이다.

냉기를 알아차린 어금니처럼 그저 제 몸 일부가 먼저 알아채는 책 읽기가 있다. 도대체가 곧장 들어오질 않아 눈 주위가 빡빡한 읽기가 있고, 에둘러 우겨넣어 본들 이해와는 멀고 먼 탓에 뒤통수만 어뜩할 읽기가 있으며, 넙죽 받아들임에 경황이 없어 뇌 속 시냅스 따위에 과부하가 걸린 모양새로 머리 전체가 욱신거릴 읽기도, 반전이나 속도감 등의 쾌감에 따르는 오금의 저릿한 읽기도 있을 테다. 무료하고 지루해 연신 하품질이니 애꿎은 턱관절만 뻐그극 하는 읽기도 매한가지다.

그리고... 흔히 마음이라 하는 저 안 깊숙이 지적질 당하는 묘한 저릿함의 읽기란 게 있다. 김진규의 <저승차사 화율의 마지막 선택>에서는 그 한가지만을 느껴낸다. 그것만으로도 족하긴 하다.
맺힌 게 많은지 하늘이 연일 비만 뿌리는 조선 영조시대. 기청제(祈晴祭)에도 불구한 빗속으로 사람들이 죽어 나간다. 왕의 악의로 인해 대역 죄인들이 호야나무 가지에 목 매달리고, 호역(戶疫)으로 애꿎은 이들이 널려 나가며... 인간지사 속 잡다한 이기와 트집으로 일상의 죽음이 이어지는 나날이다. 이승세계엔 일가 잃은 소녀 연홍이 한 많은 제 어미의 마지막 길을 통곡중이고, 왕의 성심으로 참수 대신 혀를 잃은 정혼자 수강은 왕실의 염색공장으로 내쫓긴다. 저승세계 한편에선 수습차자 화율이 이승으로의 첫 넋걷이 채비에 한창인데... 이승도 저승도 아닐 중간 어딘 게에 마음 걸치고 있는 염색장 채관 또한 있다. 이들의 이승과 저승에서의 삶이, 전생과 후생에서의 기억 그리고 슬픈 회한이 현생의 앞뒤로 얽히고 얽혀든다.
마음을 지적질 하는 덴 사랑이나 죽음, 어긋난 관계 등 누구나 공감하기 쉬울 소재거리들로의 유혹이 클 수밖에 없다. 천하의 목석이나 외곬수가 아닌 이상에야 직접 겪어봤거나 혹여 겪지 못했더라도 익숙히 들어 감 잡고는 있을 테니, 보편적인 정서만을 건드리겠다! 작정한 작가에겐 한결 수고가 덜어질 수밖에... 애틋할 시선교환 두어 차례 정도면 그게 남녀(男女) 간이든 남남(男男) 간이든 죽고 못 사는 관계로 맺어버릴 수 있으니, 사랑이 무얼까 되물을 요량의 철학·심리서가 아닌 그저 보이고 싶을 뿐의 소설류라면 사랑을 개입시키는 게 작가에겐 그리 극단의 기교를 요구하는 작업은 아닐 테다. 그에 대한 정의 따위야 각자가 하나쯤 갖고 있을 경험이나 지식의 전폭적 지원에 맡겨놓고는, 형태를 각색하고 정도의 깊이만 조율하면 될 일이다. 각색과 조율의 방법만이 남는다.

본래 절절한 사이였소... 라고 유형화된 인물을 앞세우는 막무가내식 전제로 일관할 수도, 구체적인 언행으로 밑그림을 마련해주곤 빈 곳을 채워나가라 책임지울 수도 있다. 파격적이거나 절절한 정황을 동원해 치명적의 수준을 한껏 높일 수도 있을 테고, 시대적 상황에 적절하게 온갖 치장을 일삼거나 약간은 달리 보이도록 눈을 속여 낼 수도 있다. 그 외에, 수도 없을 방법들은 모두 작가의 능력이고 소관이고 이해의 정도겠지만... 이리하나 저리하나 최대한으로도 사랑은 남을 테고, 최소한으로도 사랑 따위는 남을 테니, 작가 입장에서는 손해 볼 일이 없다. 해보지 않은 이에겐 한번쯤 해보고 싶고, 하고 있다면 더욱 하고 싶고, 했더라도 다시 하고 싶거나, 이왕이면 이 정도까지는 하고 싶다는 누구나 들의 바람 정도는 남길 테니 말이다.

<저승차사 화율의 마지막 선택>은 사랑 이야기일 뿐이다. 연홍의 사랑, 수강의 사랑, 화율이라는 사명(使命)을 갖는 저승차사 황우재의 사랑, 염색장 체관의 사랑, 궁녀 가시의 사랑, 별관인 어느 남정네의 사랑, 또 누구의 사랑과 또 다른 누구의 사랑이 줄곧 이어져 시작부터 끝까지 꽝꽝 채워져 있다. 저마다의 곡절이 이리저리 겹치고 겹쳐서 다소 혼란스럽기는 해도 그것 또한 사랑일 뿐이고, 죽음과 윤회 그리고 삶이나 희생 등에 대해 무겁게 던져지는 물음도 그저 사랑에 따르는 부산물로만 남게 된다. 하나가 더 있긴 하다. 슬픔...

저승차사 화율의 마지막 선택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한국소설일반
지은이 김진규 (문학동네,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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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 <남촌 공생원 마나님의 280일>에서와 마찬가지로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수도 없이 많은 그 시대만의 것들이 등장한다. 당시 사회와 문화에 대한 묘사의 능력이 탁월하다 인정할 밖에 없는 옛 것의 연이은 등장은 여전히 이채롭다. 정치나 경제, 각종 풍습이나 문화 일체에 대한 것은 기본이고, 이번은 소리, , 나비, 저승이나 , (恨) 등에 대한 나열이 보태진다. 의붓아비에 의해 한 노인에게 팔려, 치질 앓던 노인의 헌데를 핥아주다 똥 찌꺼기에 독이 올라 죽었다는 수습차자 곤주의 이야기에서처럼 평민들의 삶 또한 지독하게 생생하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르다. (2010/12/31 - [사색거리들/책] - 공처가 드디어 득남하나? '남촌 공생원 마나님의 280일')

전작의 경우, 내내 들고 있어야 할 문제가 하나 주어졌다. 대체 공생원 마나님을 수태케 한 이가 누구인가? 라는 중대한 물음. 작가가 세밀하게 보여주는 당시의 삶은 이 물음에게 가까이 붙어, 자체를 풍성하게도 하고 보태기도 하는 지원의 역할을 제대로 해낸다. 아마도... 물음과 그에 대한 답 자체가 당시 인들의 삶 전반을 통하는 가운데로 위치해있기에 가능할 성 싶었을 테고, 물음이 극을 이어가는 힘을 갖고 있었을 테다. 반면, 이번은 끝까지 이어 갈 중대한 물음이 없거니와, 있다 해도 편편이 사방으로 있는 듯 보이기에, 작가의 공부한 이력은 어디로도 방향을 잡아내질 못하고 배회하는 장치수준의 신세에 머무른다. 문장은 여전하지만, 문장을 돋보일 힘을 놓아버린 태세다.
사랑이 너무나 많고, 하나같이 진심들이어서 그 자체만으로도 벅차 보인다.
어쩌면... 사랑 이야기일 뿐이고, 하나를 더 보태, 영 이루어지지 않을 사랑이어서 남게 되는 슬픔의 이야기일 뿐인지라... 나머지는 치장에 불과해 보이는지 모르겠다. 저승차자 화율의 마지막 선택이란 것도 그저 사랑일 뿐이라 치부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아쉽다. 하지만 마음의 저릿함은 있다. 사랑이니까... 그것도 지독하게 슬픈 사랑이니까... 참람하다는 넋걷이의 때, 짙은 청색의 쇳빛부전나비로 변이한 수습차사들의 하늘하늘할 날갯짓이 애처로울 따름이고, 등장하는 이 누구나 진심에 매진하는 진정의 소유자인지라 답답하면서도 안타깝고, 이승에서 못한 사랑이 저승에서 어긋나는 걸로 모자라, 전생에서도 현생에서까지도 겉돌고 있으니... 사랑과 슬픔의 정도를 측정할 지표가 있다면 이들의 것은 분명 측정 불가 수준이다.

아무튼, 나 또한 사랑해보았거나 사랑하는 중의 사람일 테니, 그들의 것이 내 것에 비해 불행하다면 위로하는 마음으로, 내 것에 비해 어긋남의 정도가 크다면 재회를 바라는 기대로, 내 것에 비해 열렬하다면 부러운 듯 시샘으로, 그들의 것이 내 것에 비해 숭고하다 못해 아름다울 지경이라면 무릎 꿇음의 경탄으로... 바라볼 수 있다.

그냥 '보고 싶다...' 가 아니라 '보고 싶으오...' 라서 느끼는 뻔한 사랑에 대한 색다를 정서와 그 와중의 마음 속 묘한 저릿저릿함 뿐이지만... 왠지 따스해질 듯싶은지라 그거로도 충분하지 싶다. 자연발화난로 하나쯤이 절실한 시기니까...


자신의 내밀한 곳과 조우하는 산책길 '어느 작가의 오후 Nachmittag eines Schriftstellers'

사색거리들/책 | 2011. 1. 20. 13:38 | ㅇiㅇrrㄱi

'내 스스로에 대해서만 서술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다른 사람의 삶을 서술하는 데는 흥미가 없다'거나, '나는 작가로서 일상적인 현실을 제시하거나 극복하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비록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나의 현실을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는 페터 한트케에게 문학이란 일종의 언어적 유희에 불과할 뿐이다. 작가로서 자신의 할 일은 여태 별 문제없이 받아들이고 있던 현실에 대해 독자들 스스로가 새로이 바라볼 수 있는 저만의 작업실을 만들어주는 것뿐이니... 당연히도 사고와 언어라는 기본요소만으로 무형의 틀을 만들어내는 순수문학에 대한 지지자이며, 작가 개개인의 해결책을 강하게 담아내는 유형의 틀에 따르는 참여문학은 문학의 본 갈 길이 아니라 비난하기도 한다. <내면세계의 외부세계의 내면세계>라는 페터 한트케의 시를 보면, 그의 세계관 일부가 엿보인다.
어떤 때 우리가 근심이 없으면
파란색의 트레이닝복을 입고 조깅하는 사람이
우리 곁을 지나가는 것을 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의 마음이 편치 않게 되면
그 조깅하는 사람이 내리막길을 달리는 것을 본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불안하게 되면
그 조깅하는 사람이 트레이닝복을 입은 것이 아니라
달리는 것에 방해가 되는
긴 외투를 입고 내리막길을 달리는 것을 본다.
그리고 나서 다시 근심이 없어졌다는 표시로서
우리가 기차 안에서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 때에
그 조깅하는 사람이 파란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우리에게 어떻게 눈짓을 보내는지를 본다.
외적인 세계는 자체로 존재하기보다 인식의 주체가 되는 자아의 다양한 감정상태에 기반을 두고 그 속성을 달리한다. 그러니 가치를 얻는 쪽은 외부세계나 객관화된 관계가 아닌 내 자신의 내면세계에서 진행되는 감정의 동요나 주관의 흐름이 되고, 문학의 중요성은... 작가 자신의 의식 너머로 걸어들어갈 수 있는 수단으로서, 독자 자신에게는 기존의 익숙한 시선을 거두고 작가가 제시한 일체의 것들을 의심하거나 재해석할 수 있는 장소로서의 가치를 가질 뿐이다. 외부세계가 부여하는 편견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며 고양시킬 수 있는 방법은 내면세계 속으로의 탐닉 외에 방법이 없다는 의미로,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의 원작인 <베를린의 하늘>의 작가로도 알려진 한트케가 세계와 문학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12월초의 어느 날, 오후 시간... 작가는 서재를 벗어나 도심으로 산책길에 나선다. 그리고 다시 서재로 돌아온다...
작가가 들판을 가로지르고 있을 때 날리는 첫눈을 제외하곤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출판사의 안내 문구가 그리 과장되지 않았음에 수긍하며, 페터 한트케가 1987년 발표한 <어느 작가의 오후>를 정리하자면 이렇다. 물론 이건 서사를 기준으로 할 때의 요약으로, 서사를 제외한 나머지에 대한 정리는 필요도 못 느끼지만, 실상은 정리 자체가 불가능하다. 한 인간의 내밀한 공간 속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흐름을, 내적인 감정들의 반영을 거쳐서만 보이고 들리는 대상의 요란스러움을 단출하게 결정내리기란 어려운 탓이기도 하다.

보통, 작가라고 하면 하나쯤 갖고 있을 그만의 작업실이 있을 테다. 은밀하고도 폐쇄적인 분위기로 메워져 있을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별도의 공간은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외부의 세계이기도 하지만, 자아탐색이 진행되는 내면의식이 여러 갈래 흐름으로 뭉뚱그려 지거나 갈라서는 지점의 상징일 수 있으니, 작가 개개인의 독특한 시선은 이런 물리적이면서도 상징성을 갖는 작업실을 통해 물씬 우러나오기 마련이다. <어느 작가의 오후>의 화자이며 페터 한트케의 분신일 작가가 산책에 나서기 직전 머물러 있던 물리적 공간이면서도,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영 머물러 있어야할 상징적 공간에 대한 비유로 작업실이 이해되는 이유이기도 한데... 
 
어느 작가의 오후
카테고리 소설 > 독일소설
지은이 페터 한트케 (열린책들,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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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12월초의 어느 오후, 작업실인 자신의 서재 책상 앞에서 몸을 일으킨다. 여러 상념을 흘리고 흘리면서, 주변 보이는 것들과 미처 보이지 않았던 대상들과 끊임없이 관계하며 작가는 산책길을 나선다. 그가 몸을 일으킨 작업실은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집 2층의 서재일 수도, 아니면 작가 내면의 은밀한 어느 지점일 수도 있다. 그러니 도심 여기저기로의 산책길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거니는 평범한 일상의 형태일 수도 있지만, 머릿속 깊이 감춰진 공간을 파고드는 의식의 거닐음에 불과할 수도 있게 된다.

사실, 진정 산책길에 나서지 않았다면, 첫 눈과 조우하던 그때를 포함해 지나쳤던 곳, 만났던 사람들의 시선이나 대화, 만지작거렸을 대상 일체에 대한 거짓부렁의 나열에 불과해지지만, 정말로의 산책길인지 그저 의식 저 너머로 침전하는 재잘거림에 불과했을지는 별반 중요치 않을 성 싶다. 데면데면한 듯 다가오는 주변들에 대한 묘사와 비유, 상상을 동원한 훼손의 과정 그리고 몇 가지 화두를 산책하듯 따라다니면 될 일이다. 그 안에서 남는 건 독자 자신의 과제뿐이다. 작가가 무어라 하는 것들엔 별다른 의도가 없어 보이는 탓인데, 의도가 없다함은 언어적 유희만이 지나치다는 비난이기보다 독자인 당신은 이래라 저래라 라는 식의 강요가 없다는 쪽에 가깝다. 그러니, 한 문장, 한 문장 속을 산책하듯 거닐어야할 사람은 작가가 아닌 독자 스스로가 되어 버린다. 작가에게 있어 글쓰기에 대해, 필연적으로 따를 소외에 대해, 작품이란 것의 정의나 단조로운 텍스트 읽기에 진력난 사람들의 분노, 글쓰기 이후의 강박 등에 대해 쉬지 않고 중얼거리기만 한다. 어떤 의미로, 어떤 사정으로 받아들일 지를 작가의 의무가 아닌 독자의 과제로 몰아붙이는 듯하다.

나는 평생 동안 자신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제시켰다며 작가의 사회적 위치를, 말뿐만 아니라 그들의 호흡도, 소리마저도 모두 그를 향한 것이었다며 작가의 인식을, 내가 이웃을 갖기를 바란 적이 있느냐 물으며 작가의 고립을, 자신이 쓴 내용이 어느 선구자의 저서에 대한 재판(再版)에 불과했다 탄식하며 작가의 고뇌를, 재료란 거의 중요하지 않고 구조가 무척 중요하며 모든 요소들이 자유로운 상태로 열려 있어 누구나 접근 가능할 뿐 아니라 사용한다 해서 낡아 떨어지지 않는 것이 작품이라고 말하며 작품이 갖는 가치를... 그리고 우리 세기에 작가란 직업의 사람이 존재하느냐며 글쓰기의 불안을... 그 외 많은 것들을 던져두고 만다. 친절한 답 따위는 없다. 독자가 스스로의 이해와 인식정도를 밑바탕으로 곱씹고 되뇔 고단함만 남는다.
에필로그...
문학을 세계와 단절된 자아탐색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듯한 한트케의 비정치적 작풍에 대한 저항도... 대상을 세밀하게 훑어보는 작업 밑으로 흐를 자신으로만 향하는 이기적 애정에 대한 경외도... 뒤범벅이 될 뿐이다. 다만, 어떤 주장을 담고 있지 않다 해서... 순수문학에 대한 동경자이며 참여문학에 대한 혐오자라고 비난할 일만은 아니다. 한트케의 의도와는 전혀 다를 해석이겠지만... 제시된 해결책을 받아들이든, 제시되지 않은 해결책을 궁리하기 위해서든... 당신이 제시한게 대체 가치있는 일이냐 투정하기 위해서라도 내 자신의 내밀한 곳과 조우하기 위해 들여다보고 의심하고 거부하는 산책은 필수일 테니까...
에필로그...
'휴…….' 고백하건대... 120여 페이지 분량에 불과한 문고판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는 얕은 한숨만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작가와 작품에 대한 관심보다는 순전히 얇은 두께에 대한 끌림 탓으로 책을 손에 들었으니 소용없을 넋두리일 테지만, 다시는 책의 분량 따위에 스스로를 속여 넘기는 일 따위는 없으리라는 투덜거림만 난무한다. 페이지에 비례해 크기를 불리는 당혹스러움 앞에서는 내 자신의 얄팍한 식견 때문이라는 자책만이 깊어질 뿐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줄거리라는 서사의 유무에 집착해 단어와 문장 하나하나를 곱씹지 못했던 그릇된 읽기 습관이 못내 아쉬워... 읽기는 읽었으되 제대로 읽어내지 못해 다시 읽어야할 처지의 곤혹스러움이 얕은 한숨으로 이어진다.

텍스트는 온전히 읽었다 치고... 도대체 작가가 어느 사회와 어느 시대를 발 딛고 있으며, 어떤 의혹을 들이밀고 있는지에 대한 사전 이해가 없으니, 읽기를 통한 내 자신과의 조우는 애당초 물 건너 가버렸고 작가의 물음에 대해 기껏 내놓은 답 또한 곤궁하다. 그저, 영화의 감독 따라가기를 떠올리게 된다. 단 한편의 영화로는 감독이 영화를 통해 무얼 말하고픈 건지, 이전에는 어쨌으며 지금 내세우려는 것이 무언지에 대한 취향을, 그가 툭툭 비치는 시선의 흐름을 잡아내는데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가 만든 영화를... 모든 영화를 본다. 시간의 흐름에 맞춰 데뷔작부터 지금 당장의 작품들을 접하다보면, 감독으로서 갖는 저만의 시선이라는 거창한 영역까지는 몰라도 최소한의 취향정도는 슬쩍 알아챌 수 있으니까...

내 자신과의 조우를 위해 몇 번이고 다시 펼쳐야할 책이 분명히 있음에 다시 한번 동의하게 된 계기. 단 한편에 몇 시간을 길게는 몇 날을 꼬박 투자해야한다는 부담이 있기야 하지만, 책 읽기 또한 한 작가만을 극성으로  좇아가려는 시도 자체가 이해에 보탬이 될 수 있음을 교훈으로 각인하게 된 계기. 좀더 다양하게 바라보고 되묻자라고 새삼 떠올린 계기. 페터 한트케의 <어느 작가의 오후>가 남긴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