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이 의미를 갖다... '붉은 손가락'

사색거리들/책 | 2011. 1. 4. 12:09 | ㅇiㅇrrㄱi

47세 중년 가장 아키오 아내 야에코, 중학생 아들 나오미, 치매에 걸린 노모 마사에와 한 집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샐러리맨이다. 고부간 갈등, 아들의 엇나감 등에서 빚어진 아내와의 잦은 마찰로 피곤한 일상을 보내던 아키오는, 어느 날... 황망한 목소리로 급기 귀가해달라는 아내의 전화를 받는다. 아내가 가리킨, 정원에 놓여있는 검은색 비닐봉투에는 한 소녀의 싸늘하게 식어버린 시신이 들어있다. 소녀를 교살한 나오미는 태평스럽게 게임에 몰두해있고, 아키오는 가족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결단을 내리는데...
추리소설에서 범죄과정 특히나 범인을 드러내놓고 시작한다는 건, 작가 입장에선 상당한 위험일 수밖에 없으니... 독자의 긴장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지극히도 간편스러운 수단인, 숨겨진 범인 찾기 과정이 갖는 극적 효과를 대체할만한 비장의 카드를 제시해야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최초에 사건의 진범이 공개되어 있으니 독자 입장에서는 자연스레 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게 무얼까 라는 뜬금없는 평론가적 혜안(?)들을 갖추게 될 진데 이에 철저하게 대비해야할 부담까지 생겨버린다. 추리소설에서 가장 중요할 사건을 저지른 범인이 이미 드러나 있으니, 그렇다면 남은 분량에서 다른 무언가를 써내려갔을 것이다 라고 추측하거나 일종의 바람을 갖는 이들이 적지 않을테니까 말이다.
평범한 우리, 전혀 평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붉은 손가락>의 아키오네 가족은 그리 특별하지가 않다. 정원에 놓여있는 시체 한구를 제외해놓고 보자면, 아키오네의 일상을 태반으로 채우고 있는 고민거리들... 예를 들어, 며느리와 시댁간의 갈등, 육아관의 차이로 인한 다툼, 학교 문제, 청소년 범죄, 고령자 특히 병약자에 대한 사회적인 책임문제 등은 내 주변에서도 흔하디흔하게 맞닥뜨리게 되는 대상들이니, 아키오가 지난 삶속에서 이들에 갈등하고 결정해내는 과정들의 고단함도 그리 낯설지만은 않다. 근본적인 해결책이란 게 있을 턱이 없으니, 무게에 무게를 더한 이 일상들은 결국 나락으로 떨어질 아슬아슬함을 내재하고 있는 불안한 일상일 뿐이다. 평범함을 가장한 채 살아가고 있는 우리, 하지만 그 평범함의 허울을 언제든 벗어버릴 수 있는 위험천만한 줄타기 인생이 우리네 살아가는 모습인 것이다.
상식의 선 안에서 살고 있다고 굳게 믿으며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 작품을 통해 그런 믿음이 사실은 얼마나 허술한 것인지 날카롭게 짚어내고 있다. 읽어나갈 수록 화가 치미는 주인공들의 행태, 그러나 그것이 바로 나와 우리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아키오네 일가가 맞닥뜨리는 비극적인 살인과 공모의 현장에는 동의하기 힘들지 몰라도, 그런 불안요소들을 내재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삶을 바라보는 마음이 불편하기까지 한건, 우리 누구도 크게 다른 길을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씁쓸함 때문일 테니, 가늘게 떨리는 어머니의 등을 바라보는 흘리는 아키오의 참회의 눈물이란 게 마찬가지로 가슴 메어질 뿐이다.

붉은손가락
카테고리 소설 > 일본소설 > 공포/추리소설
지은이 히가시노 게이고 (현대문학,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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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히가시노 게이고가 추리소설의 전형인 숨겨진 범인 찾기 과정 대신 택한 것은 등장인물에 대한 인간적인 시선으로, 좁게는 아버지로서, 아들로서 고뇌하는 아키오의 일상에 대한 집중이다. 물론, 가족문제나 노령화 또는 청소년범죄 등에 대한 깊은 성찰의 단계에 이르지는 않겠지만, 적당한 거리에서 등장인물들의 고뇌하는 과정에 개입하고 있다. 독자 입장에서 일부 수긍할 수 밖에 없는 보편적인 선택과 갈등의 문제를 제시해 극적 긴장감 만큼이나 책에 몰입할 수 있는 훌륭한 요소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반전이 의미를 갖다.
이제 나름대로의 반전이란 것과 맞닥뜨리게 되는데, 이 반전이란 것이 사람인줄 알았는데 실상 귀신이었다 라는 식의 극적 반전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세밀한 관찰력의 소유자라면 이미 눈치 채고도 남을만하니, 일부작품에서 보이긴 했지만, 히가시노 게이고의 경우, 결말의 조합이 가능할 복선들을 사전에 철저하게 배치해두는 친절함을 베풀기 때문이다. <붉은 손가락>에서의 반전은, 앞전의 흐름을 완벽히 뒤집어버리는 극적 요소이기보다는, 여태까지의 이야기에 대한 맺음말에 지나지 않는다. 독자의 충격을 기대하기 보다는, 그 속 이야기가 담아내고 있는... 다시 상식화된 인간들로 제자리를 찾아가는 '우리 주인공들의 상식적이고, 인간적이면서, 평범할 모습들에 대한 공감'을 참으로 절묘하게 이끌어낸다. 일탈로 이어지는 아슬아슬한 줄타기 인생이라 하더라도 인간으로서 지녀야할 보편적인 인성이란 건... 적당히 균형을 유지하는 셈이다.

결국, 우리의 '쾌걸형사' 가가형사가 싸늘하게 아버지의 죽음을 지키는 것 또한 감동적인 가족애의 발로였음을 알았을 때, 반전은 더 이상 극의 흐름을 바꿀 뿐인 장치가 아닌 작가가 끝까지도 인간적인 시선을 거두지 않았음의 의미를 갖는다. 마지막 한 마디는 너무나 단촐한 탓에, 더 큰 울림으로 와 닿을 수밖에 없다. (가장 많이 곱씹게 될 대목이 될 것 같다)
 
이번에도 히가시노 게이고의 글은 참 잘 읽힌다. 화려하고 복잡해 보이는 문장 대신, 사건과 인물의 단면에 대해 파고들었다 다시 관망하는 자세로 물러나는 깔끔함이 간결한 문장으로 표현되고 있어, 적어도 책 읽기에선 느림의 미학이니 어쩌니 하는 것들에 진력내는 요즘 정서에도 적당히 부합하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그리 인기 있는 이유 중의 하나가 아닐까? 각종 첨단 멀티미디어기기로 중무장한 출퇴근 인파들이 전혀 부럽지 않을, 가볍지만 결코 무게감 또한 잃지 않을 책 한권을 들고 다닐 수 있다는 건, 그의 작품이 지닌 큰 장점 중 하나일 듯. 기복이 심하고 너무나 다작(多作)한다는 아쉬움은 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