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꿈과 희망을 찾고 있을 미국의 송어낚시에게 '미국의 송어 낚시 Trout Fishing in America'

사색거리들/책 | 2011. 1. 7. 17:20 | ㅇiㅇrrㄱi

이것은 여전히 알 수 없는 존재, 미국의 송어낚시에게 보내는 길고 긴 잡담 내지 편지 한통입니다. 조만간 다시 뵈었음 싶군요.
안녕? 네가 세상 빛을 본 게 1967년이니 한참 형님, 누님 연배이지만... 사람인지 뭔지 모를 존재인 만큼 인간의 나이를 기준으로 위아래를 정한다는 게 어색스럽기도 하니 편하게 말을 놓으려고 해.

잘 알다시피 난 도시인이야.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서울에서 태어나 여태 벗어나지 못하는 평범한 회사원일 뿐이지. 태생이 도시인이라는 자격지심 탓인지 언제일지 모를 날부터 키워왔던 꿈과 희망이 하나 있었어. 구체화되지 못한 탓에 설명하긴 어렵지만... 우리 인간들, 특히 나부터가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뭐 그런 내용이야. 물론 죽어서 흙으로 화할 시기를 서둘러 맞이하고픈 비극적 결말의 의미는 아니야. 귀경이나 전원생활에 대한 동경과는 한참 거리가 있는 막연한 자연숭배사상이라고나 할까...? 그래서인지 누군가 당신의 종교가 무어냐고 물을 때면... 제 종교는 자연입니다 라는 뜬금없을 답을 날리곤 했단 말이지.

학창시절 때는... 인간에겐 자연과 어우러져야 할 숙명 같은 게 있다며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 말고 바로 앞 화단으로 뛰쳐나가 흙을 꾹꾹 밟으면서 인디언 아이처럼 빙글빙글 돌기도 했어. 실성했나 싶어 주변에서들 실실 흘리던 웃음조차 무시할 만큼 가볍지 않은 바램이었던 시기였지. 아... 그만하자. 이런 식으로 조각조각을 연결하다보면 끝 간 데 없이 늘어질 테니 듬성듬성 다 생략할께. 이제 어른이 되어 버렸어. 자연에 대한 막연한 꿈과 희망은 어쨌냐고? 앞서 얘기했지만... 도시인으로서의 삶만을 용케 끌어안고 달음박질 중인거지 뭐. 들고 마시는 이 공기 정도만이 자연의 감흥인 그런 수준...? 그러던 중 너를 만나게 된 거야. 우연히...

책 한권의 형태를 하고 있는 너는... <미국의 송어낚시 Trout Fishing in America>란 이름표를 달고 있었어. 제목보다 더 눈길을 끌었던 건 너의 부제였어. '사라진 꿈과 희망을 찾기 위해 떠나는 송어낚시 여행'이라는... 네 뒤쪽으로 땀땀이 적혀있는 각종 매체들의 찬사야 으레 그리들 하니 지나쳤지만, 부제로 인해 순간 매혹당하는 심정이란 건 꽤 강렬해서... 한 시절 간절했고 설명 불가능할 무형의 믿음 한 조각으로 길게 이어져있지 않을까 싶은 기대 같은 게 일었는지 몰라. 

미국의 송어낚시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 영미소설일반
지은이 리처드 브라우티건 (비채,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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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브라우티건
(Richard Brautigan)이란 생소한 작가이름이 눈에 들어오기에 찬찬히 약력과 서문을 살펴봤지. 가난에 시달리다 못해 교도소밥이라도 먹어보겠다고 경찰서에 돌을 날렸다 정신병원에서 전기충격치료까지 받았다는 일종의 기행부터 시작해서 미국의 반문화운동을 주도하며 시집을 냈다는 소개 글이 이어지더군. 1967년 <미국의 송어낚시>라는 특이한 형태의 너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 전 세계의 관심을 받았다고 하는데, 당시 미국의 젊은이들이 성서처럼 너를 늘 들고 다녔고 달나라에서 최초로 가져온 운석을 '미국의 송어낚시 쇼티'라고 명명했다는 대목만으로도 네가 얼마나 인기 있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어.

http://www.goodreads.com

당시인 들은 네가 담고 있다는 강렬한 반체제 정신, 기계주의와 물질주의 비판, 물질문명의 시달림 속에서 목가적 꿈을 잃어버린 현대인의 허무감 등에 매료되었다고 하던데...

진보주의와 생태주의, 미국 반문화 운동에 미쳤다는 지대한 영향은 별도로 하고 내 눈에 확 들어올 만한 대목이 하나 있지 뭐야. 맞아... 목가적인 꿈... 왠지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내 꿈과 희망에 닿아있어 보이니 그 여정에 동반할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이 클 수밖에... 역자인 김성곤 교수의 옮긴 글 제목도 '읽어버린 어린 시절의 꿈을 찾아서...' 라니... 기대감에 잔뜩 부풀었지.

예전 <오래된 미래>에서 라다크가 서구문명의 이기적 논리로 인해 훼손되어져가는 슬픈 풍경과 다시 마주하지 않을까? 자연을 거스르는 인간만의 오만함속에 숨어있는 상처기를 벌려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지켜보면 되살려야할게 무언지 알아차릴 수 있을 거라는 그런 기대...

아무튼... 읽으면서 47개의 에피소드가 파편처럼 이어져가는 생소한 구성에 대한 거부감을 애써 누를 수 있었던 건 네가 소설에 속해 있었다는 점이야. 흔히 말하는 이야기의 이어짐 즉 서사라는 게 또렷할 거라 속단했어... 첫 번째로 읽을 때, 내가 저지른 가장 큰 실수였지. 바로 난관에 부딪쳤어.

워싱턴 광장에 서 있는 벤자민 프랭클린 동상 앞으로 몰려드는 굶주린 이들의 발걸음에 대한 묘사부터 시작하더니... 바로 이어지는 <나무 두드려보기> 편에서는 미국의 송어낚시인 네게 대사가 주어지잖아. 네 이름은 그저 소설 속 등장인물이 미국 전역을 떠돌며 송어낚시를 하려한다는 그 행위 자체에 다름없다 확신하고 있었는데 네가 어떻게 말을 하는 거지? 이어서, 화자가 버몬트 주에서 만난 할머니와 나눴다는 대화에서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어. 이런 대목이었지...?
나는 버몬트 주에서 한 노파를 송어하천으로 착각하고 용서를 구했다. "실례했습니다." 나는 말했다. "전 할머니가 송어하천인 줄 알았어요." "난 아냐." 할머니가 말했다.
참았어... 뭔가 착오가 있는 거야 당황하는 마음을 애써 눌러버렸지. 하지만... 한두 편 정도 넘어가다 <호두 케첩을 만드는 또 다른 방법>편에서 결국 두 손을 들어버렸어. 그리스의 유명한 성악가 마리아 칼라스와 네가 저녁오찬 중인거야. 일개 책 제목에 불과한 네가, 송어낚시 여행이라는 행위에 불과할 네가 온갖 레시피를 열거하더니 그녀와 먹을 햄버거에 호두케첩을 부어버리는 행동...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겠어?

또 참고 읽었어... 그래... 책 제목이 아니라면, 주인공의 분신 내지 다른 의미의 단순한 상징에 불과할거야 라고 자신을 다독거리며 읽고... 읽었어. 편지, 광고문, 주석 등등 형태의 생소함 그리고 앞뒤가 뒤엉킨 혼란스러움을 눈으로 우겨넣어버렸어. 그리고 끝...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뭐가 남았는지 알아? 당혹스러움뿐이었어. 역자의 설명 따위는 필요 없다 결심하곤 건드리지 않았어. 오로지 본문에서 중요한 걸 놓치고 있었다는 낭패스러움에 매달렸지. 네 이름에 대한 그 어떤 설명조차도 해내지 못하겠다는 자책 따위였어.

다음 날... 네 이름으로 검색이란 걸 해봤지... 국내 영미문학자들의 논문이 몇 편 보이기에 모조리 출력했어. 오랜만의 진정한 자유 시간을 너에게 할애하겠다 결심한거야. 넌 아려나...? 아이 둘의 아빠에게... 몇 년 만에 처음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의 홀가분함 아니 행복한 뭐 그런 기분... 예전 모 기업의 CF에서 올레~ 하던 그 귀중한 시간을 너를 위해 사용한거지. 기다렸던 드라마 보기도, 영화 관람도 포기한 채, 늦은 저녁, 따뜻한 방바닥에 납작 엎드려서는 학창시절로 돌아간 마냥 고루할 밖에 없는 학술자료들을 넘기는 광경... 상상이 가? 그렇게 네게 가는 길을 찾으려 끙끙거리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어. 단순한 결론에 도달했지.
내가 영미문학도도 아닌 마당에, 고작 책 하나를 이해하기 위해 공부란 걸 하고 있다는 자체가 영 낯설었고, 단지 특이한 형태의 소설일 뿐인데... 그 생소함에 너무 매달리는 게 아니냐 라는... 낯설어서 그런 거니 다시 읽어보면 뭔가 잡힐 거야... 라는 결론. 뭐... 사실... 졸리기도 했고.
그래서 두 번째의 읽기가 시작되었어. 사실 첫 번째 읽기에서도 <클리블랜드 폐선장>편처럼 어느 정도 납득이 되는 부분도 있기야 했지. 폐선장에서 피트 단위로 팔리고 있는 중고품 송어하천이라니... 송어하천과 함께 폭포나 나무, 새, 꽃, 곤충, 동물 등도 별도로 판매 중이라며 점원과 화자가 흥정중인 광경이 묘사되잖아. 둘러보겠다고 나선 화자는 실제 조각으로 나뉘어 상품으로 진열되어 있는 대상들과 마주하게 되지. 드러내진 않았지만... 동물이라고 남아 있는 게 수백 마리의 쥐떼 정도라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파괴된 자연에 대한 화자의 슬픔도 슬쩍 알아챌 수 있었고, 누더기 천 조각으로 감춰진 숲과 송어하천을 발견하고 손을 담갔을 때 느꼈다는 차갑고 상쾌한 그런 기분이란 게... 어쩌면 물질주의에 의해 철저하게 파편화된 자연에 대한 풍자 내지 목가적인 풍경으로의 회귀에 대한 갈구일거라고... 꿈과 희망이 흘러내릴 유일한 장소인 송어하천을 되찾기 위해 반성하고 끊임없이 상상하거나 상기시켜야 한다는 그런 울림이 느껴지기도 했어.

그러나 어쨌든 실패야. 저런 몇몇 경우를 제외하곤 앞뒤가 맞질 않았으니. 여전한 당혹스러움뿐이었지.

너를 가방 속에 넣어 들고 다녔어. 읽고 싶은 책들이 저리 많이 쌓여 있는데 좀처럼 건드릴 수 없더라고... 그래도 이 상태에서 세 번째로 너의 표지를 넘긴다는 건, 또 다른 당혹감속으로 나를 밀어 넣을 테니 감히 건드릴 엄두도 못 냈지.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 미국의 송어낚시 너는... 그냥 은유 내지 상징일 뿐이라는데 동의하기로.
나 같이 기계화된 문명에 절여져 살고 있는 우리들이 놓치고 있는 무언가에 대한 상징일 뿐인 거지. 인간이 자연과의 어우러짐을 포기하는 순간부터 상실한 한낱 피조물로서의 심성 그 자체이자 목가적인 풍경으로의 회귀를 위해 사용되는 수단이 아닐까 싶었어. 고정된 형태란 게 없는 거지. 모래상자, 아이, 책이나 음악, 황금펜촉, 호텔이나, 쇼티라는 이름의 누군가 등등으로 옮겨다니는 거야. 브라우티건씨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걸 형식으로 하며 그에 대해 노래하고 상상하고 중얼거렸을 뿐인 거였어. 은유들이 넘쳐나는 시 한편을 쓴 거라고 봐도 될까 싶었지.

세 번째 너를 읽을 때는... 느즈막이 출근하는 지하철 안이었어. 그냥 마음을 차분히 하고... 이해하지 않으려 했지. 은유나 상징의 실체가 무언지 캐내지 않으려 했고... 시를 읽듯 한 땀 씩 글과 글 사이를 이어갔지. 사실... 포기하는 심정으로 읽은 셈이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널렸지만... 여러 대목들이 아름답게 그려지는 거야. 브라우티건씨의 무형태 라는 형태, 초현실적인 작법이라는 게 거슬리긴 해도... 이게 누군가의 상념이라면... 늦은 밤, 무거운 듯 낮게 차오르는 나무내음과도 같은 차분함 내지 우울함, 화남과 같은 감정의 일부에 대한 잡담이라면 이럴 수 있겠구나 수긍할 수 있겠다는 기분이었어.

그러다보니 개연성 있어야할 행위보다는... 잠깐씩 언급하고 마는 풍경 한컷한컷이 눈에 들어오는거야. 송어가 뛰어 오르는 맑고 차가운 물줄기가 느껴지기도 했어. 고백하자면, 묘지나 죽은 물고기, 시체, 총과 같은 죽음의 상징들이 더 많이 눈에 띄기는 했지. 어쩌면 지금 미국의 송어낚시 네 저변에 흐르고 있는 파괴와 폭력, 황폐함에 대한 상징이려나? 너의 조물주인 브라우티건씨의 마지막 순간이 떠오르기도 했어. 헤밍웨이 씨처럼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했다지...? 그것도 출판사에서 고용한 사설탐정에 의해 부패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니... 왠지 그 분의 자살과 네 곳곳에 넘쳐나는 죽음의 분위기라는 게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되어 있지나 않을까 싶더군. 아무튼... 아직 잘 모르겠지만, 조금 더 보태보면... 
서구문명에 의해 파괴된 태곳적 자연에 대한 향수가 느껴지기도 하고, 그런 공간으로 발걸음을 돌리고 싶지만 불가능해져버린 누군가들의 슬픈 좌절을 노래하는 듯싶기도 해. 결국 자신의 머리에 총을 들이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중인지도 모르는 무지몽매한 현대인의 삶을 비아냥거리거나, 책 읽기나 글쓰기, 음악 등 예술행위가 가져오는 구원의 메시지를 담고 있어 보이기도 하고... 살인자의 속내를 한 채 송어낚시를 갈구한다는 위정자·위선자들의 끔찍함에 부들거리는 떨림 같은 것도 보이는 듯싶어.... 또... 이렇게도 얘기해볼게...
현실이 '자연과의 조화를 깬 왜곡된 인간들의 현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좌절이나 죽음 등'으로 대변된다면, 동경할 지점엔 아무리 그렇더라도 '우리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생태적인 조화와 균형을 되찾아야 하고 그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놓여 있는 거지. 브라우티건씨는 미국의 송어낚시라는 거대하고 포괄적인 은유와 상상을 통해, 그 양쪽인 현실과 동경 자체를 표현하기도 하고, 그 둘을 이어버리거나 틈을 메운 셈이라고 하면 되려나...?

마지막으로 흥미로왔던 것 또 하나를 얘기하자면... <미국의 송어낚시 펜촉>편에 언급된 황금펜촉에 대한 언급이야.
이걸로 써, 하지만 이건 세게 눌러쓰면 안 돼. 황금펜촉이거든. 황금펜촉은 예민해서 말이야. 얼마 지나면 이건 쓰는 사람의 성격을 닮게 돼. 다른 사람은 쓸 수가 없게 되는 거지. 이 펜은 쓰는 사람의 그림자와도 같아. 이 펜만 있으면 돼. 하지만 조심해야 해.
글쓰기가 갖는 중요성 내지 작가들이 구현해내야 할 생태주의자로서의 사명에 대한 언급으로 보이는데... 황금펜... 어디서 많이 보았던 단어거든... 혹 대한민국의 모 포털사이트 메타블로그 담당자가 이 대목에서 영감을 받지 않았으려나 싶은 그런 상상이 떠오르길래... 우습지...?

자... 아무래도 마무리 해야겠다... 정리하자면... 난 아직 답을 얻지 못했어. 미국의 송어하천 네가 왜 중요한지, 왜 내가 너에게로 돌아가야 하는지... 대체 네 정체가 무언지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해. 그저 중요하다는데 끄덕끄덕 동의하고픈 심정이란 것만 있는지도 모르지.

여태 주절거린 게 다 무어냐고...? 난 그저... 너를 대하는 태도만 살짝 언급했다 싶어. 누군가가 너에게 다가가려 한다면, 무턱대고 달려가기보다는 가볍게 심호흡하면서, 천천히 다가가라는... 폭탄주 마시듯 벌컥 마셔버리지 말고, 조금씩 음미하는 듯 속도를 조율하라는 그런 얘기가 하고 싶었던 건가 봐...

이젠 너를 손에서 놓으려고 해. 영영은 아니고... 시간을 슬쩍 지나보내고 나서... 다시 찾아보려고. 그땐 지금보다는 더 네게로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싶은 희망을 가져보면서... 이만 줄일께...

그때까지 난 한국의 붕어 낚시라도 찾아봐야 하지 않으려나 싶네... 정말 안녕... 이만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