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시대, 다른 사람들의 서로 다른 사정들 '자살의 연구'

사색거리들/책 | 2011. 1. 14. 18:22 | ㅇiㅇrrㄱi

나는 옴찟하지 않는다.
서리가 꽃이 된다.
이슬이 별이 된다.
죽음의 종이 울린다.
죽음의 종이 울린다.
누군가의 목숨이 끝났다.
죽음이 연일 저로 향하는 긴 끈을 이 사람 저 사람의 손에 쥐어주며 당기는 일이 반복된다. 누구나 한번은 잡을 수밖에 없을 끈이지만, 자신의 순서가 아님에도 서둘러 줄을 찾아 이끌려가는 이들이 있다. 자살하는 사람들이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도 내일도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리는 일들은 누군가의 폐쇄된 공간 속에서 여전히 반복될 것이고, 살고 있는 자들의 애통하거나 안타까운 심정 또한 이어지며, 분노나 호기심뿐일 시선의 뒤엉킴도 계속될 테니... 지켜보는 이 태반은 자살자의 참담한 심정에서 한참이나 비켜나 있는 관망자일 수밖에 없어 늘 자살의 이유나 원인 등에 대한 의견개진에 열을 올리곤 한다.
 
불안하거나 폭력적이었던 행로에 주목해 삶의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도록 몰아간 우리사회의 경직된 제도 전 방위를 비난하기도 하고, 한번쯤 도와 달라 내밀었을 손길을 미처 알아채지 못한 각박한 정서에 안타까워하기도 하며, 스멀스멀 차오르는 고름처럼 오염중인 병증을 자각하지 못한 개인만의 치명적인 질병 탓으로 전락시키기도 하고, 생명에 대한 존중심이 결여된 죄악이라 여기기도 한다. 어떻게 해석을 내리더라도... 의문이 남는다. 그들은 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을까...? 어떻게 떠올림만으로도 고통스러움이 빤히 전해지는 절차에 개의치 않고 삶을 끊어내야만 했을까...? 우리는 왜 종종 무의식중에도 죽고 싶다...를 연발하며 죽음의 상징을 놓아버리지 못하는 걸까...? 도대체 자살이란 무엇일까...?
자살만큼 모호하고 복잡한 동기를 가진 행위를 단일 이론으로 해석해낼 수는 없다.
알프레드 알바레즈는 <자살의 연구>에서 이에 대한 명쾌한 해석이란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머리말에서 자살의 의미를 '서로 다른 시대의 서로 다른 사람들의 서로 다른 사정들'이란 표현으로 요약하며 자살에 대한 그 어떤 해답도 제공할 수 없으며 자기 스스로도 해답의 존재를 기대하지 않는다고 명확히 선을 긋고 있다. 자살만큼 모호하고 복잡한 동기를 가진 행위를 단일 이론으로 해석할 수 없기에 단지 발생 원인을 찾아보려는 시도로 보아달라고 집필의 변을 달고 있으니... 사실 그 해답을 바랄 요량은 애당초 놓아버렸다. 

 

자살의 연구
국내도서
저자 : 알바레즈 / 최승자역
출판 : 청하출판사 1998.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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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의 연구>는 여류 시인 실비아 플라스가 자살에 이르는 과정을 담은 1장과 작가 본인의 자살미수 경험을 고백하는 5장의 사이로 자살의 역사, 자살의 심리적 요인 그리고 문학과의 연관에 대한 학술적인 해석이 삽입된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아무래도, '서로 다른 시대'에 해당하는 자살의 역사적 배경쪽으로 눈길이 많이 가는 편이다. 

우선, 자살금지령이 종교적 교리로 자리 잡은 배경에 대한 설명은 상당히 흥미롭다. 작가는 기독교의 순교 또한 자살의 한 형태이자 극단적인 교리해석의 결과물이라 해석한다. 삶이란 죄악의 유혹에 부침당하는 초조한 시간의 이어짐에 불과하니 죽음을 통해 천국으로의 구원 길에 오르자 라는 교리가 자살로 이어지는 강력한 유인책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순교시켜 달라 울부짖는 기독교도 무리에 둘러싸인 로마 식민지의 한 지방총독이 가서 목매달아 죽든지 물에 빠져 죽든지 해서 자신을 좀 편하게 해달라고 외쳤다거나, 길 가던 이에게 나를 죽여주지 않는다면 도리어 죽이겠다 협박했다는 도나티스트(Donatist) 종파의 예를 들어, 기독교도들에게 불어 닥친 순교의 열풍은 결국 자살의 한 유형일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죽음의 열풍을 막아내기 위한 방책으로 살인하지 말라 라는 제 6계명을 끌어들여 자살 또한 살인의 한 유형으로 명백한 교리 위반임을 강조하고, 연이은 종교회의에서는 자살자의 장례식을 거부하거나 자살 미수자마저 파문시키도록 결의한다.

천국으로 가는 열쇠였던 자살로 이르는 문이 굳게 닫혀버린 연유이자 여직까지 자살이 신의 섭리에 반하는 반종교적·반도덕적 죄악으로 이어지는 인식의 배경이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에서, 에밀 뒤르켕에 의해 자살을 둘러싼 도덕적, 종교적 방벽들이 허물어지기 이전까지 자살은 죄악과 동일시 여겨지는 처지를 유지한다. 뒤르켕은 모든 자살이 과학적으로 세 가지(이기적 자살·이타적 자살·아노미적 자살) 일반적 유형의 하나로 분류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살이 구제불능의 죄악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사회적 사실일 뿐이라 역설하는데, 뒤르켕의 <자살론>의 출현은 이후 자살에 대한 심리학적·사회학적 접근을 증폭시키는 중대한 계기가 된다. 개인으로부터 사회로, 도덕으로부터 하나의 문제로 전이되는 자살의 위상 변화는 자살을 죄악의 문제에서 순전히 지적인 문제로 변형시키는 주된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아무튼... 자살에 대한 시선은 도덕이나 영혼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심리학적·사회학적으로 통계되고 분류되는 연구·분석의 문제이기도 하는 식으로... 여전히 이 둘의 갈림길에 놓여 있는 형국이다. 

이렇게 자살을 세밀히 들여다보다 보면 '산다는 게임에서 가장 큰 판돈인 삶 자체가 걸려있지 못할 때엔 삶의 흥미는 줄어든다'고 했던 프로이트의 말에서 느껴지듯 죽음의 반대편 즉 살아가야할 가치 또한 선연하게 드러난다. <자살의 연구>에는 자살이 실패로 점철된 생애의 역사에 내리는 하나의 파산 선고라거나, 무의미한 삶에 대한 실패의 고백이라거나, 단지 죽음에 대한 동경일 뿐이라는 식의 다양한 정의와 해석들이 넘쳐나지만, 이런 식의 학문적 수사와 숱하게 언급되는 다양한 죽음의 사례들을 접하다 보면 삶의 의미에 대한 진중한 물음이 툭 불거지는 것이다..
삶의 마지막까지 살아내야만 청구할 수 있는 권리...
굳이 자살에 대해 정의해 보자면, 작가의 말처럼 자살은 도덕을 초월하고 심리학적·사회학적 예방을 초월한 문제이며 궁지에 몰리거나, 자연에 어긋난 숙명에 대해 우리들 스스로를 위해 만들어내는 무시무시하지만 전적으로 자연스러운 반응이라 요약할 수 있을지 모른다. 아니면, '자살 역시 그 자체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것이 아닐까' 라는 누군가의 의문처럼 여전히 알 수 없는, 자살자 본인들만의 고유하고 개별적인 심정으로만 남는 모호함 자체로 여겨질 수도 있다. 
 
다만... 눈여겨 봐야할 대목은 자살에 대한 정의나 배경 등이 아닌 삶에 대한 시선이다. 누구에게나 스스로를 죽이고 싶은 시달림이 종종 찾아올 수 있음엔 동의한다해도... 끝나지 않을 성 싶은 소란스러움과 너저분함, 억눌린 답답함이 우리를 극단적으로 괴롭힐 수 있는 여지에 동의한다해도... 적어도 죽음을 해결책 삼지 말 것을 작가는 자신의 자살미수 경험을 언급하며 거들고 있는데... 죽음이 해결책이 아니라면... 해결책은 삶이란 모양새를 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죽음이란 한꺼번에 설명되어지고 정당화되어지는 즉각적이고 완벽한 해답 따위가 될 수 없음을, 그 모든 혼란을 정화시켜줄 체험이 될 수 없는 완전한 무(無)에 불과할 뿐이다...
삶은 행복하거나 불행하다는 이분법으로 즉각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닐테다. 단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인 온갖 문제들로 뒤섞여 있어 참으로 고단히 끌어가야 하는 스무고개일 수 있다. 문제가 있으면 반드시 해답 또한 있다는 걸 인정하는 자세, 그렇게 문제에 답하며 삶의 마지막까지 살아내야만 죽음이든 뭐든 간에 청구할 권리가 있는 게 아닐까....?

온갖 왜곡과 부조리로 가득한 세상이고, 순간 참지 못할 무언가가 분명 있겠지만, 그런 부조리를 견뎌내지 못하겠다는 불같은 욕정 또한 건강한 사고의 특성일테니 죽음이 최후로 닥쳐왔을 때엔 자살보다 더욱 불결하고, 틀림없이 자살보다 상당히 더 불편할 것이라는 자살미수자의 쓸쓸한 회한을 참고삼아 한번 다시 살아보자 다잡아보는 건 어떨까...? 그저 건강한 것 뿐이라고 다시 한번 넘겨보려 시도함은 어떨까...? 라고 감히 생각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의 다른 사정들'에 대해 감히 무어라 할 만한 입장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이미 죽음에 이끌려간 자들이 여전히 '살고 있는 자들에게 남겨놓은 과제들'로 우리 자신의 사정이란 것 또한 나날이 묵직해져 가고 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