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행복 선택자들의 가난한 삶? '지리산 행복학교'

사색거리들/책 | 2010. 12. 15. 07:00 | ㅇiㅇrrㄱi

지리산(智異山)... 이 단어가 눈에 들어오면 할 말이 참으로 많아진다.
고백컨대... 학창시절 내내 오래달리기 꼴등을 수성하고, 고교 연합고사 체력장 16점이라는 전무후무한 대기록의 달성자였던 내게, 대학 신입생 때 고학번 선배들의 반강압적인 권유로 따라나선 지리산 산행은 무리일 수밖에 없었다. 꽁지작가와 마찬가지로 심해어족 출신인 듯 조금씩 높아지는 고도에 비례해 찾아오는 현기증 탓에 잠시 주어지는 휴식시간마다 까무룩 졸기 일쑤였고, 차마 돌아내려갈 엄두조차 내지 못할 지점부터는 오로지 여선배의 등산화 뒤꿈치에 눈을 박아놓고 걷기 시작했다. '그래... 내가 그래도 남자인데, 여자도 저리 씩씩하게 오르는 길을 나라고 못갈 리 없다'며 뜻하지 않은 남성우월 사상에 바드득 이를 갈고, 앞선 선배들의 뒤통수와 애꿎은 지리산에 저주를 퍼부으며 이어갔던 산행이었다.

이 빌어먹을 곳 다시는 오나 봐라... 결열한 결심과 달리, 지리산 산행은 그 다음 해에도, 또 다음 해에도... 이어졌고, 입대 전 홀로 떠났던 첫 산행 길을 되돌아올 때에는 굽이굽이 이어져 따라오는 산세를 바라보며 이젠 너마저 못 보겠구나 싶어 눈물이 왈칵 차오르기까지 했으니 사모하는 연인을 대하는 심정에 다름 아니었던 듯싶다. 이등병 첫 휴가를 일병 달고도 미루고 미뤄 이쯤이면 봄꽃이 볼만하겠구나 싶은 때로 골랐던 것도, 부대를 빠져나오자마자 술주정에 해롱거리는 선임들을 버려두고 서울역으로 향했던 것도, 밤 11시 50분경 출발하는 남원행 무궁화호 기차표를 끊어야 했던 것도 모두 지리산에 가야한다는 설레는 강박 때문이었으니 그곳에 숨겨둔 여인네라도 있는 것 아니냐는 비아냥거림도 있었던 듯싶다.

사실, 이등병 첫 휴가 때의 단독산행에서 겪었던 기이한(?)체험은 지리산을 그저 가고 싶은 곳 정도가 아니라 영험한 신비의 장소로 격상시켜버리게 되는데, 쌍계사에서 세석산장까지로의 남부능선 종주길. 본격적인 산행 전 물을 넣어야할 등산용 수통에 고무이음새가 사라져버린 것을 알아채고는 물 없이 오르기로 결정한 미련스러움이 화근이었다. 늦은 4월의 어느 날... 등산객은 단 한명도 없고, 만개했을 꽃무더기는커녕 눈도 채 녹지 않은 산길을 오르고 오르다, 찾아오는 갈증을 달래겠다고 소금기 가득한 김칫국물을 마셔가는 극단적 무식으로 인해 대한민국 육군 일병은 지리산 능선 길 어딘가에서 절명하겠구나 싶은 시간이 이어진다.

번갈아 찾아오는 현기증과 추위에 시달리다 어느 바위에 걸터앉았던 그때는 늦은 오후로 달려가던 시각이었고 이대로 두어 시간 걷다보면 세석산장 근방의 야영지에 다다르려니 하던 참이었다.

그리고... 누군가 나를 흔들어 깨운다. 큰일이라고 서둘러 걸으라고 뛰라는 재촉...

눈을 떠보니 해가 있어야할 하늘엔 달이 덩그러니 걸려있다. 주변에 어둠만이 가득하니 아마 오래도록 잠이 들어있었던 것 같았는데 어쩌나 싶은 당혹감을 떠올릴 새도 없이 그 누군가의 재촉에 뛰기 시작했고 그는 하나 둘, 하나 둘... 걸음의 박자까지 맞춰주며 뒤를 따랐다. 그렇게 산죽나무 길을 헤치며 달리다 보니 뒤를 따라오는 게, 나를 깨운 게 무언가 싶은 의혹이 참으로 뒤늦게 찾아온다. 아무도 없다... 하지만 의혹이나 두려움을 계속 떠올릴 게재가 아니다. 없던 힘까지 내 열심히 달리고 걷기를 반복하다보니 음양수샘이 나타난다. 그날 산행 시작 이후 처음 대하는 물을 입안으로 가득 퍼 넣고는 걸음을 이어가다... 다시 찾아온 체력저하에 근방을 둘러보니 텐트를 칠만한 터가 보이고... 바로 야영준비를 하곤 그날의 산행을 마무리했다. 등산로를 따라 흐르는 물을 받아 대충 끼니를 해결하곤 얇은 누비이불 안에서 잠을 청하는 그날 밤... 그냥 질식해 죽어도 모르겠다 결심하고 부탄가스가 다 소진되는 줄도 모르게 버너를 켜놓았을 정도로 정말 추웠다.

다음 날 눈을 떠보니... 주변에 흐르던 물줄기가 모두 꽝꽝 얼어있는 걸 보고는 전날의 이상한 존재를 다시 떠올리게 된다. 아... 그 누군가가 나를 깨우지 않았더라면 능선 길 어딘가에서 꼼짝없이 얼어 죽거나 탈진해 죽었겠구나... 그 각성 탓인지 이후의 산행은 경건함 자체였다. 걸음이 엉키거나 부딪치거나 하면, 아... 지리산이 나보고 조심하라고 하나 보다 라는 식의 마음 속 대화를 이어나갔고... 천왕봉을 거쳐 내려오던 한신지 계곡의 어딘가에선 밥 한 덩어리 놓고는 조촐히 감사의 예도 갖추었던 것 같다.
자발적 가난 선택자? 자발적 행복 선택자!
<꽁지작가(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를 읽고 나서의 마음에 단순한 귀경·전원생활의 유유자적함에 대한 부러움이 아닌, 지리산이 저들을 저리 만들었을 거야라는 신앙과 마찬가지인 감흥이 끼어드는 것도 이런 연장이었을 테고, 그의 신작에 눈길이 머물 수 밖에 없었던 것 또한 지리산이라는 한 단어 탓이었다. 
 
지리산 행복학교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 한국에세이
지은이 공지영 (오픈하우스,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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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필요에 의해 부분 각색되었을지언 정, 태반 픽션이 아니다. 어느 날 지리산으로 떠났다는 친구들의 삶이란 게, 왠지 기록해놓으면 재미있을 성 싶어 그 자체를 옮겨놓은 수기와도 같다. 자발적으로 가난을 선택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간다고 표현된 그들을 지켜보자니, 현재도 이어가고 있을 그들의 삶이란 게 행복한 삶인지, 부유하거나 가난한 삶인 지야 보는 이들의 가치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겠지만, 그들 스스로가 선택한건 가난이 아닌 행복일거라는 확신이 든다.

근사한 외모와 좋은 학벌, 부유한 부모나 근사한 배우자, 넓은 집과 큰 차 등등 획일적인 우리네 욕망의 기준으로 본다면... 버들치 시인이나 낙장불입 시인, 최도사, 수경스님 등등의 등장인물 모두는 최하류의 인생을 살아가는 셈이다. 변변한 수입하나 없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살 집 구하기에 연연해하고, 끼니는 산나물 몇 가지로 연명을 하거나, 술에 취해 하루하루를 허송세월하는 등의 모습들을 보자면 한량이란 말이 딱 어울릴 정도인데다, 행복학교란걸 만들어 사람들과 함께하거나, 자연파괴를 저지하겠다고 온몸이 상하도록 도로순례하는 뜬금없는 행동들은 4차원세상에서 우리네 현실로 뚝 떨어진 괴짜들에 다름 아니다. 4대강 공사 반대를 위해 소신공양하신 문수스님을 두고 땡 중 하나 자살한 것 갖고 왜 이리 난리냐라고 했던 어느 의사의 말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그런 류와 결국 다르지 않을 욕망과 가치에 파묻혀사는 우리네 평범인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이질감이 쉽게 거두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바람도 아닌 것에 흔들리고 뒤척이기 싫어 나는 도시를 떠났다.
하지만, 그들 모두 우리와 마찬가지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보통사람일 뿐이다. 단지 다른 욕망을, 획일적인 우리네 욕망과 사뭇 다른 욕망을 선택했을 뿐이다. 자신에게서, 타인이나 사회에게서 또는 무언가로부터 받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증오와 복수, 성공이나 부 대신 생명을 지닌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다고 결심한 우리 옆집 아저씨일 수도 건넛마을 아주머니일 수도 있다.

다만, 기분전환으로 잠시 동안의 전원생활을 체험하고자 하는 대신, 켜켜이 심어져 있는 나무 한그루 마냥 생명 자체인 지리산 너른 텃밭위에 몸을 묻고 살아간다는... 태반이 마음 한구석으로 밀어 넣고 방치해뒀을 자연과 자연스러움에의 귀의 라는 어려운 결정을 선택적으로 실행에 옮기고 있는... 실천가로서의 용기가 덧붙여진 멋진 분들일 뿐이다. 그렇기에 이질감 탓으로 이 양반들은 도대체 뭔가 싶다가도, 우리네 이웃들이 빚어내는 짧은 촌극들을 바라보다보면 내 일인 것마냥 흐뭇하고, 가난한 삶이겠지만 스스로가 선택한 행복들이란게 참으로 근사해 보일 수밖에 없게 된다.

그들이 선택하고 누리는 건... 유유자적해 보이는 전원생활의 찬양, 근사하게 전원주택 하나 마련해놓고 텃밭을 일군다거나 산속으로 들어간다고 얻어지는 것들이 아니다. 자연의 품으로 떠나라 부추키는 건 더더군다나 아닐 것이다. 바람도 아닌 것 따위에 위태위태 흔들리는 내 자신의 욕망이나 가치란 것들이 부질없을 수도 있다는 건... 행복이란 게 산 너머 먼 곳에 있을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내 주변 내지 마음 속 외진 구석에 있을 수도 있으니 가끔은 둘러보거나, 천천히 숨 쉬며 살아가도 해될 것 없다는 가벼운 가르침일 수 있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 저 분들은 지리산 인근에 있어 저럴 수 있을거야 라는 부러움은 그치지 않는다. 그래서 문득 지리산에 가고 싶어진다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 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시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노을을 품으려거든,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몸이 달아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굳이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불일폭포의 물 방망이를 맞으러, 벌 받는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의 눈 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서지는 회환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세석평전 철쭉꽃 길을 따라, 온 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고...
최후의 처녀림 칠선 계곡에는,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진실로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섬진강 푸른 그림자 속으로, 백사장 모래알처럼 겸허하게 오고...
연하봉의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암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마음이니, 행여 견딜 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행여 견딜 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본문에 인용된 낙장불입 시인의 시 한편을 소개해본다. 지리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각각이 무얼 의미하는지 그리움에 절절매며 느끼게 될 듯...


훼손당한 나의 안드로이드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 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

사색거리들/책 | 2010. 12. 11. 07:00 | ㅇiㅇrrㄱi

어린 시절, 속도계 하나 달린 걸 위안삼아 타고 다니던 고물자전거로 할아버지 뒤를 좇다보면 이제는 사라져버린 한옥 한 채... 할아버지 댁에 이르곤 했다. 강단지게 자라나길 바라셨던 건지 늘 자전거로 따라올 것을 원하셨던 탓에,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거리를... 대로변의 씽씽 거리는 차들 뒤로 숱하게 달음질쳤다.

그리 어렵게 도착한 할아버지 댁에선 늘 설렐 수밖에 없는 나만의 놀이거리들이 기다리곤 했으니... 정원에 딸린 연못의 붕어들에게 드리우는 밥풀떼기 낚시가 그 중 하나였고, 골목어귀의 만화책 가게도 하나, 무엇보다 삼촌들이 방치한 불법 비디오테이프 관람은 그 중 백미(?)였다. 철저한 사생활보호원칙에 준한 우리 조상들의 건축기술 덕분으로 한옥의 구석으로 위치한 외딴 방에선 은밀한 영화 관람이 이어지곤 했으니 이제야 돌이켜보면 대작이니 수작이니 해서 영화사의 한축을 장식하고 있는 작품들을 너무도 어린 나이에... 접하던 시간들이 그때였던 기억이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 Blade Runner> 도 그 시기 홀로 즐겼던 영화 중 하나였는데 사실 나이가 나이인지라 그 안에 담겨 있다는 디스토피아적 세계에 대한 진지한 성찰 따위는 염두에도 없었고, 늘 벙벙한 표정으로 허둥거리는 릭 데커드 역의 해리슨 포드 역시 관심 밖의 인물이었을 밖에... 오로지 물기에 젖으며 생을 마감하는 안드로이드 로이의 짧은 삶만 인상적이었으니... 

비인지 눈인지 안개인지도 모를 습기에 온종일 잠겨 있는 도시와 인공조명만이 번쩍거리는 밤과 밤의 이어짐, 여기에 인간보다 더 인간적으로 생을 마무리하는 안드로이드의 슬픈 결단이란 게 어린 날 잠시 그려볼 수 있는 미래의 어느 시기였던 것 같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 판타지소설
지은이 필립 K. 딕 (황금가지,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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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는 영화 <블레이드 러너 Blade Runner>의 원작으로 SF소설의 대가로 불리우는 필립 K. 딕의 작품이다. 원작이란 게 있음도 처음이었고 <마이너리티 리포트>, <토탈 리콜>, <페이첵> 등 유명한 영화의 원작자가 필립 K. 딕이라는 사실 또한 처음. 사실 원작이 있음을 알고 반가웠던 건 영화를 다시 보곤 싶으나 다시 볼 수 없는 일종의 아이러니한 상황 때문으로, 영화 속 잿빛 정경과 재회하고픈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1982년에 제작된 영화를 이제 다시 돌려본다면 분명 특수효과의 어벙함으로 이전의 인상마저 해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 탓이었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라는 누군가의 수필 한 구절이 떠올라 망설이던 차... 원작을 대하는 반가움이 클 수 밖에...
전쟁으로 황폐해진 지구, 살아남은 자들 일부는 식민지행성으로 이주하고 나머지 일부는 매일매일 떨어지는 방사능낙진에 파 먹히며 일상을 이어나가고, 유전형질이 오염된 또 다른 일부는 은둔해 살아간다. 행성이주 유인책으로 활용된 안드로이드 중 일부가 지구로 탈출해 오고, 릭 데커드는 그들을 은퇴(파괴)시키는 현상금 사냥꾼이다. 신형 넥서스6 타입의 은퇴 지시를 받은 릭은 안드로이드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보이그트-캄프 감정이입 검사툴을 챙겨 추적을 시작한다.
원작의 경우에도 1968년 당시로서는 기발했을 여러 발상들이 여럿 눈에 들어온다. 다만 영화로 인한 선입견 탓인지 원작의 골격이 간단하리라 짐작되는데, 결국 예상되는 건 현상금 사냥꾼 릭과 넥서스6 안드로이드간의 활극이리라. 기대치가 영화에서 보여주는 이런 역동적 대결에 맞춰져 있다면 원작의 말미에서 느끼게 되는 배신감은 클 수밖에 없는데, 왠지 비범한 능력을 갖고 있을 법한 두목격 안드로이드 로이와 현상금 사냥꾼 릭 간의 대결조차도 허망하게 지나버리는 탓이다. 영화 속, 인간을 증오하면서도 생명연장에 대한 인간의 집착을 닮아가려던 안드로이드 로이가 단 일격에 박살나 버리는 기계 나부렁이로 치부되는 것이다.

원작을 대하면서 가졌던 나의 기대가 선입견이었음을... 안드로이드는 본디 주연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영화에서의 안드로이드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인간임을 거부당하고,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감정을 표현해내는 존재로... 애시당초, 인간과 그의 피조물인 안드로이드를 구분해내는 기준이란 게 있다면 그 자체를 모호하게 만드는 주체이기도 하다. 마지막 안드로이드 로이가 자신을 은퇴시키려던 릭에게 손길을 내밀어 인간이 아닐지언정 그보다 더 인간적인 격한 감정을 보이는 대목에선... 언젠가 먼 미래, 감정이입이란 게 인간과 아닌 것을 구분해내는 기준이라면 결국 구분이란 것 자체가 불가능할 상황과 맞닥뜨릴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불안함과 더불어 정서적으로 소진된 인간은 과연 인간이라 할 수 있을는지, 인간이 무언가 싶은 의아스러움이 더해졌다.

하지만 원작인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에서의 안드로이드는 영원히 인간일 수 없는 대상에 다름 아니다. 오로지 입력된 지능에 준해서 행동하는 탓에, 생명의 소중함에 대한 감정적 동요를 보이질 않고 이 약점으로 인해 안드로이드임이 발각되고야 만다. 모든 가치가 모호해진 세상에서도 생명의 준엄함에 동의하지 못하고 기쁨과 슬픔에 빠져들지 못하는 무감정을 절대 악이자 살인자의 극명한 유형이라 규정당해 사냥당하고야 마는 조연으로 전락한다.
전기 동물에게도 그들만의 삶이 있는 거니까. 그 삶이 아무리 빈약한 것이라 해도...
머서주의라는 거짓 신흥종교의 감정이입상태에 몰두하고, 감정조절기계 따위에 그때그때의 기분전환을 맡기는 인간들. 거의 멸종되다시피 한 진짜 동물 키우기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가늠하는 그들. 자신들보다 더 오염되어 있다는 이유로 타인을 소외시키고, 살아있기라도 한 듯 보살펴야 하는 전기 양을 향해 증오를 떠올리며 그런 감정변화 자체가 진짜 인간임을 드러내는 지표라고 억지 안심하는 그들... 그리고 자신의 형상을 한 대상들을 거리낌없이 파괴하는 그들이야 말로 세기말의 두려움과 공포로 인해 인간성을 놓아버리는 미약한 존재들이 아닐까...? 

인간인 릭도 안드로이드 사냥 과정에서 갈등하게 된다. 안드로이드보다 더 무감각한 동료 사냥꾼의 냉정함으로 인해, 사냥 대상일 뿐인 안드로이드와 동침을 하거나, 인간보다 더 인간답게 살아가고 있는 안드로이드의 일상과 마주하면서 겪는 혼동속에서 릭은 심지어 전기 동물에게까지도 그들만의 삶이 있다며 감정을 이입하게 된다. 무언가의 도움이 아닌 오로지 스스로의 자율적인 선택으로 기계조차도 가치를 지닐 수 있다는 감정적 풍요상태에 빠지면서 이런 감정만이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특성이라는... 안드로이드와 구별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이 될 수 있음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묘하게 어긋나 버린다.

어린 시절 안쓰럽게 지켜보았던 영화 속 안드로이드 로이는 인간과 마찬가지로 전기양을 꿈꾸고도 남을 인간적인 존재이니 당연히 꿈꿀 수 있다라는 게 답이 될 테지만, 원작 속 안드로이드 로이는 인간일 수 없으니 전기양을 꿈꾸지 못한다가 답이 될 테다. 여기에 전기양 조차도 안타깝게 보살필 수 있는 건 인간만이 지닌 무엇 때문이라고 각성하게 되는 릭의 감정선을 따라가다 보면... 안드로이드는 기계 따위에 불과하다 라는 반증에 새삼 맞닥뜨리게 된다. 

어린 시절 안쓰럽게 지켜보았던 영화 속 안드로이드 로이의... 왠지 손대면 온기가 남아있을 것 같은 그 뒷모습이... 형상만 인간을 본뜬 기계 따위의 서늘함으로 전락하고야 마는 것이다. 그게 유쾌하지 못하다.


어떻게 살인자를 변호할 수 있을까? 'a True story'

사색거리들/책 | 2010. 12. 7. 14:55 | ㅇiㅇrrㄱi

하루가 멀다 하고 발생하는 각종 흉악범죄. 보편적인 문명의 기준으로 보더라도 살기 좋아진 건 맞을 텐데, 살기 진력날 만큼의 끔찍스러운 범죄행위들이 그 어느 때보다 증가추세에 있음을 쉽게 부인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도대체 좋아졌다는 게 뭔지 의문스러운 세상이다. 이와 관련된 언론보도를 접할 때마다 분노의 심정을 극한으로 이끌어 내는 대상이란 게 있다. 바로 가해자, 범죄자, 피의자 등의 단어로 지칭되는 바로 그들이다. 그들을 향해 내뱉는 고함소리에 마음 한켠의 살의까지 보태 증오를 불태우기도 하고, 눈물 흘리는 피해자 주변의 분위기에 눈물을 글렁이기도 한다.

내가 직접 겪지 않은 슬픔은 피해 당사자와 주변이 느낄 슬픔과 고통에 다다를 바가 없으니 시간이 지나면서 흐릿해지기 마련이지만... 그들의 일탈행위에 대한 분노는 내가 미처 겪지 않았더라도 지워지지 않는다. 별 다르게 꾸밀 필요도 없다. 자신이 저지른 행위에 버금가는 단죄를 내려야 한다는 게 보통人으로서 떠올리는 심정의 대부분이니 죽여라! 죽여라! 날선 외침만이 맴돌게 된다.

그런데... 그들 살인자와 같은 범죄자를 변호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떻게 살인자를 변호할 수 있을까
 
어떻게 살인자를 변호할 수 있을까
카테고리 정치/사회 > 법학 > 법학일반 > 법학일반서
지은이 페르디난트 폰 쉬라크 (갤리온,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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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인자를 변호할 수 있을까?>는 독일 베를린의 형법 전문 변호사인 프로디난트 폰 쉬라크의 사례담으로, 자신이 변호하거나 목격했던 범죄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약자의 편에 서서 활약한 경험을 묶었다고는 하나 아무리 돌아봐도 살인자들까지 약자로 분류하는 어폐에는 동의하기 싫은 심정이란 게 있으니 이 독일 변호사가 들려주는 '‘살인자 그들'과 '변호사 자신'의 이야기에 따라붙을 성 싶은 어떻게? 라는 선입견은 어쩔 수 없다.

50주 이상이나 베스트셀러 목록에 이름을 올리고 있고, 전 세계 25개국에 번역 출간될 예정으로 데뷔작의 판권이 이렇게 많은 나라로 수출된 사례는 독일에서도 최초라는데... 인기몰이에 성공한 이 책에서 저자는 자신이 던지는 어떻게? 라는 화두에 무슨 답을 하고 있으려나?

꽤나 궁금해지는데 의외로 그의 답은 간단하다. 변호사니까!

프로디난트 폰 쉬라크는 재판에 두 가지 차원이 얽혀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검찰이 제시하는 증거가 피의자의 유죄 여부를 판단하는 데 충분한가라는 문제로 도덕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순전히 법적인 절차상의 판단 부분이다. 두 번째는 피의자가 범인이라는 게 확정되었다면, 형량을 얼마로 보아야 하는가의 문제다. 범죄행위 자체가 갖는 일탈·반사회성의 위중 정도를 판단하는 것으로 이때에는 도덕이 끼어들어 피의자가 어떤 삶을 살아왔으며 어떤 문제를 겪어 왔는지 제대로 살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 두 가지 차원으로 어떻게? 라는 의문에 대한 답을 내놓고 있다. 피의자의 경우 형이 확정되기 이전에는 살인자로 추정하는 것이 법 절차상으로 금지되어 있으니 법 집행 절차상 객관성을 따져봐야 할 부분을 주도면밀히 살펴야 하는 건 당연히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고, 범죄행위가 명확하다고 판단된 경우라도 적절한 형량결정을 위해선 범죄자의 지난 인생을 살펴보고 그 안에서 드러난 굴곡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가 필요하니... 이 두가지를 해내는 직업이 변호사라는 것이다.
주변에서 성자라 여겨질 만큼 후덕한 노의사는 일흔두 살의 나이에 수십여 년을 동거 동락해 오던 아내의 머리를 도끼로 갈라버린다. 유명한 건축업자의 딸은 자신의 친동생을 욕조에서 익사시키고, 창녀와 홈리스는 시체를 토막 내고 유기한다. 기차역 앞에서 시비를 걸던 두 악당은 허술해 보이는 중년의 남성에게 순식간에 목숨을 빼앗기고, 또래 친구를 살해한 것으로 추정되는 한 청년의 방에선 일그러진 눈알이 발견된다...
인용된 총 11편의 이야기엔 두 가지 차원의 문제를 토대로 법 절차상의 허점을 발견하거나, 굴곡 심한 피의자들의 인생을 되짚으며 그들의 무죄를 이끌어 내거나 형량을 줄이려는 프로디난트 폰 쉬라크 변호사의 노력이 담겨 있다. 첫 번째 문제야 변호사가 갖추어야 할 업무능력이 전제되어야 할 일일 테지만, 두 번째 문제 즉 도덕적 잣대를 갖고 피의자의 삶속으로 한걸음 들어서기 위해서는 직업적 소신과 결부된 인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필수적일 테다. <어떻게 살인자를 변호할 수 있을까?>는 단지 사건조서의 삭막함... 픽션이기에 가지게 될 딱딱한 현실감이 주가 될 내용이었겠지만 작가는 자신의 인간관으로... 범죄자를 그저 한 인간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애정 그리고 끊임없는 관찰을 통해 이 건조함의 틈을 슬쩍 메워낸다.

읽다 보면 어떻게? 라는 화두 외에도 다른 질문들이 떠오른다. 우리 주변에서 접하게 되는 각종 흉악범죄. 돌아볼 것도 없이 사형이 마땅할 만치 극악무도한 행위를 저지른 범죄자들에게도 연민과 애정을 갖고 형을 덜어주어야 하냐고... 아니! 프로디난트 폰 쉬라크 변호사가 말하는 건 성인군자와 같은 마음으로 모든 걸 사하여 주자! 라고 외치는 건 아니다. 형벌의 두 가지 필요성, 즉 범죄행위의 해악성을 일반대중들에게 환기시키기 위해 그리고 해당 범죄자로 하여 다시금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경고하기 위해 형벌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얼마만큼의 효력을 지닐 수 있는지 법의 엄정한 집행 중에 살피자는 것 뿐이니 무조건적인 변호와는 모양새가 다르다. 그저 접근방식의 차이가 다른 결과를 이끌어 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어쩌면 변호사로서 마땅히 갖춰야 할 직업윤리에 관한 주장일 수도 있을테고 아니면 우리네 살아가는 모양새가 참으로 복잡다단하다는 걸 돌려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수록된 모든 사례가 살인자의 처참한 범죄행위에 관한 내용은 아니다. 행정착오로 수십여년을 한 자리에서 근무하며 정신병에 다다르게 된 기막힌 사연의 박물관 경비원의 이야기도 그렇고... 특히 마지막 편에 코끝이 찡해지는 은행털이범의 이야기를 배치해놓은 걸 보면... 판사도 배심원도, 방청객도... 모든 이가 울어버리는 재판정의 광경이라는 게 상상이나 되나...?

결국 이 세상에 단순하게 진행되는 건 없다는... 우리들 각각의 삶 자체가 드라마 한편의 훌륭한 극본이 될 수 있을 만큼 온갖 사연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걸 그저 보여주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무조건적인 비난이란 게 어쩔 수 없는 사례가 태반이기야 하지만, 우리가 전해듣는 사례들의 사이사이엔 거대하지만 알 수 없는 사연이란 게 가득일 수 있다는 새삼스러움도 잊지는 말아야 할까 보다.

애니?? 미저리?? '미저리 Misery'

사색거리들/책 | 2010. 11. 30. 07:00 | ㅇiㅇrrㄱi

주변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며, 적잖은 이들이 스티븐 킹이라는 작가를 소설이 아닌 영화로 접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게 된다. 사실 <미저리>의 경우에도 그의 작품 태반이 그렇듯 원작소설보다는 영화가 더 유명한 사례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영화 <미저리> 자체를 원작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상당히 많은 편일만큼 개봉당시 대단한 흥행작이었다. 고등학교때 친구로부터 두어시간에 걸쳐 영화 줄거리를 들었던 나름 즐거웠지만 고된(?) 기억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야! 이 미저리야!', '아, 이 미저리 같은 X' 등등의 욕설(주로 여성 대상)을 여즉 접할 수 있는 걸 보면, 영화 개봉 당시의 분위기는 미저리 신드롬이라 할만 했을 정도다.

줄거리야 간단하다.

폴 셸던이란 베스트셀러작가가 자신에게 명성을 얻게 해준 소설 '미저리'의 마지막 편을 탈고 후, 여행도중 교통사고를 당한다. 애니 윌크스라는 한 여성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지만, 두 다리는 망신창이가 된 상태. 애니의 집에서 그녀가 건네는 노브릴이란 진통제를 먹으며 부상의 고통을 견디던 폴 셸던은, '미저리'의 넘버원 팬임을 자처하는 애니의 이상스러운 행동으로 공포에 빠져들어간다. 폴이 갖고 있던 원고에서 소설속 주인공 미저리가 죽게 된다는 것을 안 애니는 그를 위협하고... 애니가 던져준 구형 타자기 앞에서 미저리를 살려내기 위한 폴의 집필이... 계속되는 '애니의 광기'에 맞서 살아남기 위한, 작품을 완성하기 위한 폴의 사투가 이어진다.
그가 본 것은 텅 빈 공허감이었다. 땅속으로 움푹 꺼진 산 위의 균열 같은 공허감, 꽃도 자라지 않는 천길 낭떠러지일 듯한 암흑의 공허감. 그것은 잠시 동안 인생의 중요한 장소와 표시물에서 멀리 벗어난 여인의 얼굴이었으며, 자신이 이야기하던 중이었다는 기억을 잊었을 뿐 아니라 기억이 있다는 사실 그 자체까지 잊어버린 여인의 얼굴이었다.
결론부근에 접어들어 등장하는 몇몇 인물을 제외하면, <미저리>의 등장인물은 단 두명이라 해도 무방한데, 애니 윌크스란 인물에 대한 폴의 묘사가 상당히 많을 수 밖에 없다. 수시로 공허한 얼굴빛을 보이는 그녀는, 폴에 의하자면 긴장병(緊張症)이라는 질환을 앓고 있는 정신병 환자다. 그런데 이여자... 가볍게 넘길 증상의 환자가 결코 아닌게... 그녀의 어린시절부터, 간호사로 재직하던 시절 그리고 그 이후에까지 주변 사람들이 수도 없이 비명횡사했음이 드러난다. 꼬리가 잡혀 외진 곳에 홀로 살아가곤 있지만... 그녀의 진정한 잔혹함에 대해 어느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을만큼 지능적인 두뇌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명석한 사고와 긴장증, 이 양립하지 않았음 하는 불편한 동거로 인해 폴은 점점 궁지에 몰리고야 만다.

미저리(스티븐킹전집10)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 공포/추리소설
지은이 스티븐 킹 (황금가지,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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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영화에서는 애니의 광기어린 행동이나, 폴의 사투 정도에 초점이 맞춰져 있겠지만, 원작에서 좀더 부각되는 부분은 작가로서 폴이 겪는 고뇌나 창작의 과정들이다.
작가들은 모든 것을 기억하기 때문이야. 특히나 아픈 기억들을. 작가 한명을 홀딱 벗겨 놓고 상처들을 하나하나 가리키면. 그 작가는 작은 상처들 각각에 얽힌 사연을 들려줄 거다. 커다란 상처들을 통해 장편 소설을 얻는 거야. 망각은 소설 쓰는데 아무 쓸모도 없어. 작가가 되고 싶다면 작은 재능 정도는 갖고 있는 편이 좋겠지만, 단 한가지 진짜로 필요한 것은 모든 상처에 얽힌 사연을 철저하게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이야.
부와 명예를 안겨준 '미저리'를 종결하고, 본격작가로서의 길을 걷기 위해 완성한 새 작품은 애니에 의해 불태워져버리고, 미저리를 되살리기 위한 초고(初稿) 또한 애니의 날카로운 지적 앞에 폐기할 수 밖에 없다. 그 와중, 살아 남기 위해서가 아닌 작가로서의 순수한 열정에 빠져들어가며 집필에 몰두하게 되는 폴의 모습은, 킹 자신의 이야기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생생하다. 창작의 아이디어를 얻어내기 위해 괴로와하다 원고 속 커더란 구멍(?)에 몰입하기까지의 과정도 인상적이지만, '알고 싶어'의 힘이라 풀이된 애니의 광기와 독자들의 감정을 '세헤라자데 콤플렉스'로 풀이한 부분은 상당히 흥미롭다.
'세헤라자데'는 아라비안나이트(千一夜話)에 나오는 미모와 재색을 겸비한 왕비. 인도와 중국까지 통치한 사산왕조의 샤리아르라는 왕은 다른 남자와 정을 통하던 왕비를 죽여버린다. 배신의 후유증으로 세상의 모든 여성을 증오하게 된 왕은 매일 밤마다 처녀를 데려다 동침하곤 다음날 아침에 죽여 버리는 만행을 반복한다. 대신의 딸인 세헤라자데는 자진해 왕의 신부가 되어, 첫날밤부터 왕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하는데, 왕은 그녀의 이야기 솜씨에 홀려 1,001밤을 함께 보내게 된다. 그녀의 마지막 이야기가 끝났을 때 샤리아르 왕은 세헤라자데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고 영원히 해로할 것을 다짐하며 선정을 베푼다.
작가를 세헤라자데로 간주해, 그가 들려줄 다음 이야기에 대한 '알고 싶어'라는 본질적인 집착이 독자들이 갖는 공통적인 감정상태라는 것이다. 폴은... 킹은... 이 세헤라자데 콤플렉스의 연장선에서 애니의 피해망상적 집착과 일반독자들의 감정상태의 근원은 별반 다르지 않다고 풀이하고 있다. 아무튼, 폴이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발견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우연적인 행운이란게 있기야 했어도, 폴이 발견한 애니의, 독자의 본질적인 감정상태(소설에 대한, 작가에 대한)로 인해 그는 목숨을 구하게 된다.

그러고 보면... 킹의 작품엔 직업이 소설가인 사람들이 꽤나 많이 등장하는 듯... <샤이닝>, <데스퍼레이션>, <살렘스롯>, <자루속의 뼈>, <스탠 바이 미>, <리시이야기>, <그것> 등등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품의 주인공 내지 주변인물로 소설가를 내세우고 있다. 때론 미쳐버리고, 너무나 거드름을 피우기도 하고, 괴수와의 싸움에 앞장서기도 하며, 영적인 존재와의 접촉에 긴장하기도 하는... 어린시절을 떠올리거나, 어린시절속 악한 존재와 사투를 벌이기도 하며,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환상의 공간을 넘나드는 이 모든 인물들의 공통된 직업이 소설가다. 킹 자신일테고... 아마 그래서인가, 자신을 공포소설작가로 또는 단순 상업작가로 치부하는 '비평가'들에 대한 실랄한 비아냥 또한 종종 등장하는 대목이다.

아무튼... 미저리에서 얻을 수 있는 재미 중 하나가 폴 셸던을 통해 창작의 과정이나 그 괴로움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일테고, 이미 미쳐있는 애니와의 싸움에서 살아남기 위해 같이 미쳐가는 폴을 지켜보는 것 또한 흥미진진하다. 죽기 싫으니 겉으로 표는 못내겠고 속으로 욕하고 비아냥거려야 하니, 그 원초적인 욕지거리의 수준이란게... 웃지 않을 수가 없을 지경.

킹의 작품에 종종 보이는... 다른 작품에 대한 언급도, 그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재미있을 부분이다.
오버룩 호텔이라고, 아주 유명하고 오래된 호텔이야. 10년 전에 불타서 무너졌어. 호텔을 관리하던 사람이 불을 질렀대. 미쳐 버려서 그랬다지. 마을 사람들 모두 그렇게들 얘기해. 하지만 신경쓸 것 없어. 그 사람은 죽었으니까.
애니가 폼로이란 뜨네기를 죽였다며 실토하는 대목인데... 오버룩 호텔은 <샤이닝>의 무대가 되는 곳이다. 관리하던 사람은 바로 애니만큼 미쳐버린 '잭 토렌스'일테고...^^

아...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여즉 효력있는 욕, '이 미저리같은 인간아!'는 상당히 잘못되었음을 확인게 된다... 폴 셸던의 소설 '미저리'의 여 주인공 미저리는... 주변인들의 넘치는 존경과 사랑을 받는 너무도 아름다운 마님이시니까.

정확히 하려면 이래야 맞다. '이 애니 윌크스 같은 인간아!', '이 애니 윌크스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