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강탈당한 마을 '살렘스 롯 Salem's lot'

사색거리들/책 | 2011. 1. 5. 10:19 | ㅇiㅇrrㄱi

당신은 지금 아름다운 마을 예루살렘스 롯을 떠나고 있습니다. 또 오십시오!
정체 모를 사내와 소년... 두려움에 떨던 소년은 마을의 교회 사제에게 모든 사실을 고해한다. 그리고 다시 살렘스 롯(예루살렘스 롯)으로 돌아가기를 다짐하며, 끔찍한 기억을 되살려본다.
소름끼치는 경험 속 고향, 살렘스 롯을 방문한 소설가 벤 미어스는 그의 팬이라는 수잔 노튼을 만나 가까워진다. 어린 시절, 죽은 자의 환영과 맞닥뜨렸던 마스튼 저택은 여전히 건재하고, 벤은 살렘스 롯에 대한, 마스튼 저택에 대한 작품을 구상하기 시작한다. 갑자기 실종된 두 소년, 대니와 랠피... 동생 랠피의 행방은 찾은 길이 없고, 기억해낼 수 없는 어둠속에 갇혔던 대니 또한 입원 와중 사망하게 된다. 마스튼 저택에 발로우라는 의문의 인물이 이주하고, 그의 수하인 스트레이커가 상점을 열고부터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하는데... 죽은 자를 초대하고 그들의 방문을 받게 된 마을 사람들은 점차 한낮의 잠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벤과 수잔, 제자의 죽음과 사후(死後) 방문을 겪게 된 은퇴한 교사 매튜, 죽은 친구를 십자가로 쫓아낸 소년 마크, 신에 대한 불안한 믿음 속에 방황하는 신부 캘러한, 그리고 의사 코디는... 어둠속에서 죽은 자가 배회하는 마을의 비밀을 캐내기 시작한다.
'지금'이 아닌 '예전'에 아름다웠을지 모를 살렘스 롯으로부터 도망쳐야 했던 사내와 소년은... 초반부 밝혔듯 다시 돌아가게 된다. 불이 더러운 것을 씻어 내듯, 마을을 정화시킬 책임과 사명이 본인들에게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마을은 어둠을 잘 알고 있었다.
줄거리에서 알 수 있듯... 십자가한낮의 잠 하면 바로 연상되는 것처럼, 이 작품은 흡혈귀 이야기다. 근래, 파격적인 변화를 꾀하는(주로 영화에서) 변종 흡혈귀도 아닌 것이... 흡혈귀에 빌붙는 교활한 수하를 부리고, 빛을 두려워하며, 십자가를 증오하고, 날아다니거나 연기처럼 사라져버리는 등의 전통적인 모습 그대로다. 다소 생소한 게 있다면... 흡혈귀가 초대를 받아야만 방문할 수 있다는 것인데, 예컨대, 먹잇감을 찾아 나서기야 하지만, 먹잇감 스스로가 '들어와' 라고 하지 않는 이상에야 접촉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또, 무조건 십자가를 두려워하진 않으니... 믿음 없는 십자가 대시(?)는 과감히 우그러뜨리고야 만다.

아무튼... 수십 년도 더된 흡혈귀 이야기 속에서 무언가 새로운 걸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미련스럽다 질타 받을 만치 그간 우리는 흡혈귀 홍수 속에서 살아왔다. 이젠 전문적인 흡혈귀 헌터들이 초당 몇십 발로 은총알을 쏟아내고, 자외선 폭탄으로 태양을 대신하거나, 흡혈귀 퇴치 바이러스까지 만들어내는 등의 상황에서 <살렘스 롯>은 그저 그렇고 그런(?) 고리타분한 흡혈귀 이야기일 뿐이다. 하지만...

살렘스롯(상)(스티븐킹전집11)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 공포/추리소설
지은이 스티븐 킹 (황금가지,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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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렘스롯(하)(스티븐킹전집12)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 공포/추리소설
지은이 스티븐 킹 (황금가지,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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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와 두려움은 그 연식(?)이 오래될수록 그 크기가 더해진다 하지 않았던가... 최첨단 무기가 동원되진 않더라도, 마스튼 저택에 대한 벤의 두려움에 대한 묘사는, 누구나 겪었을 어린 시절의 근원적인 공포와 닿아있다. 곰팡이와 썩은 가구 냄새, 그리고 상한 버터에서 나는 것 같은 역겨운 냄새처럼 공포는 사방에 존재하고,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불가항력적인 '무엇'이었으니, 동네 벽마다 붙어있던 동시상영관의 흡혈귀 영화 포스터는 감히 눈 마주칠 엄두도 못낼 대상이었고, 너무나 보기 싫어 저걸 찢어버렸으면 하면서도 채 1m내로 접근도 못하던 그 시기는 내 어린 시절이었다. 어린이용으로 나온 문고판의 책 표지에 나온 드라큘라성과 성으로 이어지는 벼랑길, 그리고 그 위 외딴 존재는... 차마 버리질 못해 그저 눈에 띄지 않길 바라며 옷장 아래 깊숙이 파묻어 놓을 수밖에 없는 내 심약함(?)의 결정체와 같았다. 

살렘스 롯이란 마을을 뒤덮는 어둠속... 몇몇 주인공이 아닌 마을 전체가 공포의 근원에 잠식당하는 과정이 그려진다. 벤이나 매튜 등 주요 등장인물에 제한된 공포체험이 아니라, 마을 전체의 구성원이 겪는 집단 공포 체험에 다름 아니다. 완벽히 마무리되진 않지만, 충분히 예상되는 대로 흡혈귀는 사라져가고 몇몇은 살아남아 본인들의 남은 과제를 처리해간다. 그 와중에, 희생당하는 대상은 바로 이웃들이다. 그 평범한 이웃들은 각자의 일상에 걸맞은 과정으로 밤에 잠들지 못하는 존재로 변해가고, 킹은 그들을 통해 초대하지 말아야할 자에 대한 초대로부터 시작하는 마을 전체의 참담한 수난기를 세밀하게 묘사해낸다.

그저 살아가는 와중에 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살렘스 롯>은 슬프다. 흡혈귀도 죽어버리지만, 사내와 소년에게 단 하나뿐인 고향이... 추억들이... 따분하거나 지리하거나 즐겁거나 행복했을 시간과 공간이... 괴물이 내지르는 비명소리의 뒷울림에 묻혀 사라져간다. 평범한 사람들이 겪게 되는 일상에서의 공포... 그의 작품이 갖는 큰 장점 중 하나다.   
밤마다 똑같은 외로운 싸움을 치러야 하는 아이에게 있어서, 유일한 치료는 결국 상상력을 마비시키는 것뿐이고, 사람들은 그것을 어른이 되는 과정이라고 부른다.
그러고 보면... 언젠가부터 흡혈귀 이야기는 '재미의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언젠가... 문고판 표지의 벼랑길을 타고 튀어나올 것 같던 브람 스토커(Bram Stoker)의 흡혈귀는... '공포의 존재'였을 뿐이니, 나이를 먹는다는 게... 어린 시절의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어서 좋은 건지, 아니면 함께 잃어버린 것들이 많아져 슬퍼야할는지... 잘 모르겠다... 어느 감정에 몰입된 삶을 살 수 있다는 건, 어린 시절 갖는 특권인가...? 나이 한살 더 얹혀지니 어린 아이의 상념이란게 또 다시 그리워진다.
초대하지 말아야할 자를 초대해서 겪는 비극
또 하나... 초대하지 말아야할 자를 초대해서 겪는 비극이라면 우리들이 지금 충분히 겪어내고 있는 현실이기도 할 테니, 나만의 캡틴 스티븐 킹 선생님께선 1975년이라는 저 오래된 과거에 이미... 누구나가 누려야할 일상의 자연(自然)스러움이 파괴당하는 대한민국의 비극을 예견하신게다. 역시 존경스러운 분이다. 물불 안 가리는 흡혈로도 부족하신 겐지 늘 창백해 보이는 국가대표 발로우와 그의 수많은 조무래기 스트레이커 무리에게 말뚝을 박아버릴 이들은 일개 평범人인 우리들이어야 한다는 뜬금없는 비약을 소년의 심정으로 되새겨 본다.

※ <살렘스 롯 Salem's lot>은 저 유명한 일본소설 <시귀 屍鬼, 오노 후유미 作>의 오마주가 되는 작품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