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의 두가지 종류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 5'

사색거리들/책 | 2010. 12. 25. 13:55 | ㅇiㅇrrㄱi

공포나 두려움 등의 단어에 이질감을 느끼는 이들이 많은지라, 이런 키워드를 다루는 문학작품들의 경우 일부 마니아의 기호를 위한 별도 영역이라 외면당하기 일쑤다. 무섭거나 끔찍한 게 막연히 싫다는 개인적 취향도 이유 중 하나일 테고, 대중들에게 좀더 다가갈 수 있는 적절한 매체의 부족이란 출판계의 분위기도 영향을 미칠 테다. 또, 우리네 살아가는 현실이 공포 그 자체인데 뭘 더 무섭겠다고 그런 것들을 가까이하느냐고 손사래 치는 경우도 있다.
맞아... 삶 자체가 공포와 두려움의 연속일 수 있다.
정지한 지하철 에스컬레이터를 따박따박 내려가다 어지러운 듯 앞으로 쏠리는 헛걸음이 두려울 때가 있다. 불 꺼진 방구석에 철퍼덕 엎드려 잠들어 있는 아이 녀석의 등이 제대로 오르락내리락 거리는지 궁금해질 때의 찰나가 무섭기도 하다. 머리를 감다 샴푸기운에 닫아버린 눈꺼풀 너머 은근한 낯선 시선이 느껴져 움찔하기도 하고, 퇴근길의 아빠를 놀래려 집안 어딘가에서 몸 사리고 있을 아이의 흔적이 서리 앉은 안경너머로 짐작되지 않을 그 잠깐이 두근거리기도 한다. 신발 밑으로 납작히 눌려진 개미의 사체위로 숨이 끊어질 당시의 압박감이 어른거려 소름이 돋기도 하고, 순서대로 퍽퍽 꺼져가는 형광등의 마지막 불빛을 가늠해 출입구로 달음박질치는 퇴근시간의 일상 앞에서는 늘 결심을 새로이 해야 한다... 심지어 흙냄새가 그리운겐지 늘 땅만 파헤치려는 모 인사가 어린 시절 추억이 깃든 동네 뒷산마저 허물지 않을까 하는 망상까지 더해지곤 하는데... 허나...
두려움의 종류엔 두 가지가 있다. TV속 두려움과 진짜 두려움...
혹자가 표현했듯 TV속 두려움은 가짜이자 거짓 두려움이다. 그런 일들은 실제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안다. 알 수 없는 존재나 걱정하는 일들... 내가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것들 태반은 모두 TV나 책 속에서의 일일뿐 실재로는 일어나지 않을거라는 일말의 기대 섞인 순도 낮은 짝퉁이다. 진짜 공포와 두려움 앞에서는 진땀 흘림이나 아랫배 싸한 복통, 온몸이 부들거리는 포기와 순응만이 있을 것임도 짐작된다. 하지만 거짓이거나 하찮을지언정 두려움의 꺼리들이 하나둘 하나둘 늘어만 가는 일상이다 보니... 이참에 내가 느끼는 것이 절대 실재할 수 없음을... 나의 그로테스크한 망상이 별 것 아닌 수준임을 상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재학습의 과정이 필요하다. 그도 아니면 단 몇프로 현실에서 맞닥뜨릴 가능성에 대한 나름의 단련 과정일 수도... 그래서 무섭다는 책을 펼치는 걸까? 그런데... 

한국공포문학단편선.5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공포/추리소설
지은이 김종일 (황금가지,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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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공포문학단편선> 5편의 경우 이전 시리즈에 비해 사뭇 다른 분위기가 강하다. 지금 당장는 아니더라도, 내게 일어날 수도 있는... 어쩌면 스치는 옆 사람에게 있어났음 직한, 언론매체를 통해 한두 번은 접해봤을 현실의 일부가 낱낱이 까발려지는 공포이기도 하고, 비현실적일지언정 잘 아는 동네 인근에서 비밀리에 진행 중일 것 같은 조바심마저 배어 나온다. 

김종일의 <놋쇠황소>에서는 학교폭력의 피해자였던 남자가 동창회에서 만난 가해자 친구를 배웅하며 떠올리는 지난 기억을 통해 학교폭력이란 사회문제를 언급한다. 뒤늦은 복수극이지만 1인칭 고백을 통해 드러나는 학창시절의 절절한 고통이 가슴 아플 수 밖에. 이종권의 <오타>에서는 이메일에 삽입된 오타 한 단어 탓에 빚어지는 끔찍한 스토킹이 소재로 활용된다. 급격한 상황전개에 지나치게 의존해 등장인물들의 광기에 대한 설득력은 다소 미진해도, 생사의 기로 그리고 광기의 폭증이 흔히 사용하는 메일 한통으로 유발된다는 점에서는 시사하는 바가 있다.

장은호의 <고치>는 잘 만들어진 전설의 고향 한편을 보는 듯싶을 정도로 기괴한 분위기 조성이 멋들어진다. 우리가 익히 아는 동네 한켠에 그런 저주 받은 마을이 있을 수 있다는 개연성이 으스스하고, 유산과 임신 사이로 삽입된 인간의 식욕과 광기 간의 연관이 수려하게 전개되고 있다. 류동욱의 <시체 X>에서는 흔하게 겪은 부부간의 불화를 소재로 하여, 극단적 분노 앞에서 누구나 한번쯤 떠올려봤을 저주의 상상이 만일 실현된다면... 이란 끔찍한 경우를 가정한다.  

모희수의 <기억변기>에서는 어둡게 그늘진 기억들이 한 인간에게 주입되는 상황을 전제해, 기억과 추억거리의 소중함을 각인시키기도 하고, 우명희의 <>에서는 독재정권하 악명높았던 고문기술자와 그의 후임이었던 형사간 대결을 통해 우울했던 현대사·개인사의 비극을 되새긴다.

임태훈의 <네모>와 엄길윤의 <벗어버리다>는 독특한 SF적 상상력 탓에 상당히 비현실적으로 비춰지지만, 현대인들이 각박한 삶을 슬쩍 빗대놓고 있고, 황태환의 <살인자의 요람>에서는 외딴 오두막에 고립된 주인공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살인자의 접근을 두려워하다 어떤 결단을 내리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일종의 괴담같던 이야기가 마지막에 가서는 사회문제에 대한 묵직한 비판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종호의 <오해>에서는 왕따 당하는 딸아이와 아이를 도우려는 가장의 고민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신뢰 제로의 풍토를 비웃고 있다. 

이렇듯 <한국공포문학단편선> 5편에서 주목하는 건 익숙한 현실에서 마주칠 여지가 많은 두려움이니 구분하자면 진짜 두려움쪽으로 조금 더 다가서 있다. 결국, 일종의 도피처로 삼곤 했던 했던 책 속 가상공간이란 게 더 이상 거짓된 두려움의 근원지가 아니라,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서 불쑥 맞닥뜨릴 수도 있을 거라는 배신(?)의 출발점이 되어 버린다. 즉 공포, 두려움, 광기, 폭주... 죽음과 같은 암울한 키워드들이 우리의 삶과 얼마나 가까이 맞닿아 있는지를 새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여전히 공포라는 딱지를 크게 걸고 있어, 거릴 두고 싶어 하는 사람들까지 가까이 끌어당기지는 못하겠지만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제자리를 찾아가는 작가들의 행보를 엿보는 재미 또한 작품 외적인 소득 하나일테고... 연말이니...

우리 사회 구석구석 서린 여러 가지 두려움의 그늘에 한 발 슬쩍 들여놓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그냥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