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어둠은 타락을 전제한 매혹과 같다 '우등생 Apt Pupil'

사색거리들/책 | 2011. 2. 19. 13:50 | ㅇiㅇrrㄱi

사람과 사람이 무언가를 공유한다고 할 때 흔히 긍정적인 정서로의 교감을 떠올리곤 한다. 나이를 초월한 우정의 향연에 감동스러울 것 같은...? 13살의 평범한 소년이 이웃 노인의 집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는 첫 장면으로 시작하는 <우등생>은 <스티븐 킹의 사계>에 두 번째로 수록되어 있는 중편소설로... 얼핏 소년과 노인 간에 진행될 교감의 기록이라 예상할 수 있을 테다. 이런 예상은 완벽히도 맞는다. 다만, 이 둘이 각자 갖고 있거나 서로부터 나누려는 정서는 설익어 순백할 소년의 동심도 아닌... 삶의 우여곡절 끝에 갖춰냈을 노인의 지혜로울 경륜도 아닌... 폭력 그 자체다. 폭력은 동심을 타락시키고 덮어두었을 뿐인 죄의식에 다시 광기를 보탤 뿐이다. 백지와도 같았을 그것이 어른에게도 버거울 폭력적 정서라는 물감으로 채색되어가는 과정은 지켜보는 이를 힘겹게 한다. 그건... 우리가 이미 그런 식으로 채색된 마음 한구석을 느껴버리는 죄책감과도 같다. 그래서 두 사람이 교감하는 기록은... 슬프다.
토드는 우연히 아서 덴커라는 이웃 노인의 정체를 알게 된다. 그는 파틴 강제수용소의 사령관으로 유태인 학살에 참여했던 쿠르트 듀샌더. 토드는 그의 정체를 공개할 것이라며 협박해 유태인 학살의 참극에 대해 낱낱이 들려 달라고 요구한다. 주식배당금으로 소소한 삶을 살아가던 듀샌더는 과거와 재회하면서부터, 결코 화해가 아니었던... 방치되었을 과거로부터의 악몽에 다시 시달리게 된다. 이 악몽을 더는 방법은 폭력적인 과거의 재현뿐임을 깨닫고 고양이 한 마리를 오븐 속에 넣어 버리는데...  
토드는 떨어지던 성적을 조작해왔던 것이 부모에게 들통 날 뻔 하지만 듀샌더를 조부로 속여 상담교사와 만나게 해 위기를 넘긴다. 하지만, 돌연 이 모든 정황을 공개할 것이라며 협박해오는 함정에 빠져 그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한다. 서로에 대한 극도의 살의를 참아내기 위해... 과거로부터 기인한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먹지처럼 가라앉아 떨어지지 않는 머릿속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 결국 나름대로의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 시작한 끔찍한 작업은 다름 아닌 자신만의 방식으로 진행하는 극단적 폭력의 재현이다.

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탈출 : 스티븐 킹의 사계(봄/여름)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 영미소설일반
지은이 스티븐 킹 (황금가지,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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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우등생으로서의 겉모습을 되찾게 된 토드... 하지만, 부모님의 자랑스러운 아들로서 성장해가는 그에겐 더 이상 어린 날의 동심과 같이 애틋하게 떠올릴 여유로움이란 없다. 토드가 소유하고 부릴 수 있다고 착각했던 듀샌더의 폭력적인 과거 속에 도사리고 있었던 것은 바로 어둠 자체였다. 하나는 어둠의 본질을 이미 겪었던 노인... 다른 하나는 어둠으로의 매혹에 빠져드는 소년... 둘을 둘러 싼 어둠은 점점 짙어져만 갈 뿐이다. 타락으로 이끌리는 어둠은 호기심이라는 다리를 건너 소년을 서서히 물들인다. 

어둠 속에 깃든 폭력으로의 매혹은 빠져들지 말았어야할 함정과 같았다. 아무리 매혹적이었더라도, 매혹을 느끼는 그 찰나에도 한 여름의 과실처럼 몸과 마음이 자라고 있었던 소년에게는 폭력으로의 귀기울임 자체가 그릇된 양분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을 테다. 고개를 돌렸어야 했다. 어둠을 빠져 나왔어야 했다. 듀샌더 또한 신분이 폭로될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감추고 토드를 협박하며 관계에서의 우월한 위치에 올라서지만... 이렇게 서로의 비밀을 움켜진 채... 마음속 상처를 감추어둔 채...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유대 할 수 있는 방법은 그야말로 잔혹하고 참혹한 욕구분출만이다.

영화 '죽음보다 무서운 비밀'

모든 것이 놀라운 속도로 성장하고 풍성해지는 여름의 상징에서 느껴지듯... <우등생>은 토드라는 소년의 성장소설일 수도 있었겠지만 킹은 이 어린 소년을 온전히 커가도록 바로잡아주진 않는다. 늘 그렇듯... 깨달음의 교훈은 사건 뒤로 여유있게 찾아오기 보다, 매 상황과 상황 사이로 숨차게 따라 붙는 식으로... 뒤쳐지는 깨달음은 파국으로 치닫는 지름길의 길잡이 역할만을 한다.

그래서 여름은... 돌연 성장과 풍성함이라는 상징을 놓아버리고 뭐든 금세 습기에 젖어 썩기쉽다는 부패의 냄새가 앙천하는 계절로 돌변한다. 그럴듯해 보이는 우등생으로서의 외관상의 성장과정은 유지하지만, 어린 날의 그릇된 호기심과 욕망, 폭력으로의 물듦에서 비롯되었을 긴장과 두려움 탓으로... 마땅히 외관상의 성장을 바른 방향으로 따라야했을 소년의 내면은 부패하다가... 결국 비정상적·비인간적인 발육을 보이는 셈이다.

누구에게나 중요한 시작점이 찾아 온다. 그 시작점이란 게 살아가는 내내 찾아오는, 그래서 한번 회피한들 다음번의 기회를 노릴 수 있는 꽤나 여유 있는 마음 씀을 준다면 좋으련만... 찾아오는 시기는 단 한번 뿐이다.

유아기가 됐든 사춘기가 됐든... 중년의 한가로운 오후시간 커피타임이든, 시작점은 단 한번 주어진다. 그때야말로 한 인간이 나머지 삶 전체를 이고 가야할 무언가가 풍성해지거나 부패해갈 수 있는 바로 그 시점임에도... 그 중요성을 우린 너무 뒤늦게 알아버린다. 

어린 토드에겐, 26인치 스윙자전거를 타고, 교외를 달려... 아서 덴커라는 문패 앞에서 그의 집 초인종을 눌렀을 때가 바로 그 시작이었으니... 마지막 장면, 쓰러진 나무 뒤에 숨어서는 그 중요함을 알아차렸을까...? 
내가 오로지 공포 소설만을 쓰느냐고? 여러분이 이 책에 실린 이야기를 읽었다면 이미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아시리라
<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 탈출>은 사계절 중 봄, <우등생>은 여름에 해당되는 작품으로 각각 '희망의 봄', '타락의 여름'이란 부제가 붙어 있다. <스탠 바이 미>, <호흡법> 이렇게 두 작품이 '자각의 가을', '의지의 겨울'이란 부제로 별도 발행되어 있으니... 사계절의 흐름과 각 계절이 연상케 하는 보편적인 상징성에 맞게끔 각 작품들이 순차적으로 배열되면서 <스티븐 킹의 사계 Different Seasons>란 큰 제목으로 다시 한 번 묶이게 된다.

저자 후기 중 킹 본인이 밝힌 일종의 자신감을 고려치 않더라도 단순하게 줄거리에 의지해 독자의 가벼운 곳을 건드리기보다 문장 하나하나에서 베어나는 깊은 식견, 매 상황에 대한 진득한 시선, 때론 급한 듯 때론 느긋하게 지향 없이 흘러가는 듯싶어도... 한 지점에 이르러서야 알아차리게 되는 단말마적 충격이 아닌... 뒤늦게 어딜 들춰봐도 아 그랬었구나... 동의하며 작가의 의도에 깊은 숨을 들이쉬게 되는?

그건... 토드에게 찾아왔을 호기심처럼... 진정 거부하기 힘들 매력이다.


※ <우등생 Apt Pupil>은 영화 <죽음보다 무서운 비밀 Apt Pupil>의 원작입니다.
※ 본문 중 사용된 이미지의 저작권은 NAVER 영화에 있습니다.


① 희망은 살아가야할 의지와 같다 '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 탈출 Rita Hayworth and Shawshank Redemption'

사색거리들/책 | 2011. 2. 18. 13:37 | ㅇiㅇrrㄱi

두 가지 사악한 속삭임이 시작점이다
  사악한 속삭임 하나...! <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 탈출 Rita Hayworth and Shawshank Redemption>... 20세의 레드에게는 연상의 아내에게 들어놓은 거액의 생명보험금이 탐나 자동차 브레이크에 손을 보게끔 하는 결국 아내는 물론 동승한 이웃 부인과 그 아이까지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게 한 살인의 권유로 들려온다.

  사악한 속삭임 둘...! <우등생 Apt Pupil>... 13살의 토드에게는 인간의 참혹함에 매혹을 느끼다 못해 동참케 하는 타락의 꾐으로 들려온다. 레드는 쇼생크 감옥에서 기나긴 수감생활을 시작하고, 토드는 유태인 학살의 전범 아서 덴커를 협박해 참혹한 살육의 증언들을 되살려내며 짜릿한 전율을 즐긴다.

  한사람에겐 사악한 권유에 잠시 귀 기울인 대가로 평생을 감옥에서 보내야할 자포자기의 형벌이 내려진 상태고, 다른 한 사람에겐 사악한 권유에 동심을 맞바꾼 대가로, 잠시의 환호, 괴로운 꿈자리와 파멸, 결국 한참 후에나 들어서도 될 타락의 지름길로 이어질 특급 티켓 한 장이 주어진 상태다.
레드는 앤디 듀프레인과 조우하게 된다. 앤디는 아내와 아내의 정부를 살해한 누명(?)으로 쇼생크의 장기수감자 명단에 오르는데, 리타 헤이워드라는 여배우의 포스터를 구해달라는 거래가 계기가 되어, 또, 다른 수감자와 달리 쇼생크에서 초보 수감자들이 겪는 여러 위협에 맞서나가는 인상적인 모습에 관심을 갖게 된다. 앤디는 쇼생크의 교도소장 내지 간수들의 경제적인 처리를 도맡으면서부터 독방을 쓴다거나 사서로 근무하며 도서관 시설 확충에 매진한다거나 하는 등의 특혜를 받게 되는데... 그러던 중 새로운 수감자로부터 본인의 결백을 입증해줄 단서를 얻게 된다. 절박하게 자유에 대한 의지를 꺼내놓지만 돌아오는 건 수십 일의 독방생활과 철저한 무시뿐이다. 그러던 앤디는 쇼생크 감옥에서 자취를 감추고, 가석방된 레드는 앤디의 흔적을 좇으며 숨겨왔던 열망... 자유에 대한 바람과 희망을 꿈꿔낸다.
  사악한 속삭임에 대한 단 한 번의 귀 기울임으로 자유를 박탈당하고, 다시 되찾겠다는 희망마저 접어 수감생활을 지내는 레드에겐 앤디가 보인 지난 수십 년간의 의지, 희망에로의 간절함이 감탄스럽기도 어리둥절할 만큼 낯설기만 할 뿐이니... 한때 살의와 재물에 온몸을 들끓게 했던 사악한 속삭임은 쇼생크에 대한 철저한 순응과 다른 삶에 대한 포기를 강요한다.

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 탈출
국내도서
저자 : 스티븐 킹(Stephen King) / 이경덕역
출판 : 황금가지 2010.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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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인범일지언정 교도소 담장 너머 기다리고 있을 전혀 다를 삶에 대한 바람마저 죄악일 수는 없을 텐데, 자책감 때문이었든, 감옥 내에서의 길고도 완벽한 격리 그 자체에 의한 순응이었든, 새로운 삶에 대한 낯선 두려움 때문이었든... 레드에겐 더 이상 사악한 속삭임도 희망에 대한 읊조림도 들려오질 않고... 하루에 하루가 더해져 기나 길게 이어지는 수감생활은 그저 무념으로 버텨야할 일상에 다름 아니다.

영화 '쇼생크 탈출'

  이런 레드에게 앤디의 탈옥... 뒤늦게 알게 된 27년여 간의 준비과정 그 자체는 충격일 수밖에 없었을 게다. 언젠가 들었던 그의 자유에 대한 갈망 내지 준비의 노력이라는 게 그저 헛된 망상이 아니었음을 믿게 되면서 가석방 이후 어느 돌담 밑 흑요석 아래 묻혀있다는 앤디의 준비된 다른 삶을 찾아내는 게임에 뛰어든다.

  그리고 발견된 흑요석과 그 아래 앤디의 편지. 지와타네호라는 오직 두 사람만이 공유하고 있는 지명을 떠올리며... 자유인만이 느낄 수 있는 흥분에 들떠 희망을 꿈꾼다. 그의 희망은 '친구와의 만남'과 '태평양이 꿈속에서 보던 대로 짙은 푸른색이었음 하는 바람'... 그 뿐이다. 그에게 자유라는 건 내 마음대로 모든 걸 할 수 있다는 방임으로서의 의미보다는 나름대로의 바람을 소유하고 이루어 내기 위해 밑바닥에 깔고 있어야 했을 삶의 의지가 아니었을까...?

  모든 것이 종료되는 시점인 겨울에서부터 다시 모든 것들이 잉태되고 꿈틀거리는 계절인 봄이 갖는 상징성엔 희망을 떠올리기가 쉽다. 이 희망의 근저엔 누구나 하나쯤 갖고 있을 살아가야할 의지라는 밑바닥이 있을게다.

  이 책의 다른 한쪽... 의지의 겨울, <호흡법 The Breathing Method>과 닿아있는 지점이다.


※ <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 탈출 Rita Hayworth and Shawshank Redemption>은 영화 <쇼생크 탈출 The Shawshank Redemption>의 원작입니다.
※ 본문 중 사용된 이미지의 저작권은 NAVER 영화에 있습니다.


14살 콜린 쟈콥스의 일그러진 영웅 '어둠의 소리 The Voice of the Night'

사색거리들/책 | 2011. 2. 14. 13:32 | ㅇiㅇrrㄱi

이명(耳鳴)... 알 수 없는 소리들과 자릿자릿한 기운이 언제부터 귀 안쪽으로 들어차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알아차리는 게 간혹 일 정도로 이젠 일부가 되어 버린다. 의미 얹은 목소리가 실리지 않았다 뿐이지 고저(高低)와 강약(强弱)을 통해 늘 이야기를 건네는 듯하다. 불치라는 판정이 일으키는 죽음으로의 연상만큼이나, 죽음 직전까지 동행해야할 거라는 무게는 병증과 별개로 따라오는 고통의 일부가 되어 버린다...

이제는 절판되어 어느 도서관 서가구석에서나 만나볼 수 있는... 분명 회전초 마냥 굴러다닐 먼지 덩어리로 치장하고 있음직한 책 <어둠의 소리>에서 만난 14살 콜린 쟈콥스는 이명 환자에 다름없다. 어둠 속으로 도사려 있다 모습을 드러낼 것 같은... 사악한 기운만이 느껴지는 어떤 존재의 중얼거림에 늘 떨어하지만 정작 다른 이에게 증명을 요청할 수 없는... 홀로 들어낼까 두려운 소리일 뿐이다. 다른 이가 같이 들어줄 수 없거나 함께 보아 줄 수 없는 의미를... 오로지 홀로 듣고 느껴 내거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겨내야 한다는 것... 소년의 외로운 현실 속으로 이명의 실체가 모습을 드러낸다.
"뭘 죽여본 적 있냐?" 로이가 물었다.
"어떤 거 말야?" 콜린은 얼굴을 찌푸렸다.
"아무거나, 뭐든 죽여본 적 있어?"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너는 뭔가 틀림없이 죽여 봤을 거야, 곤충은 안 죽여 봤냐?"
"그야 죽여 봤지. 모기나 개미, 파리 같은 건 죽여 봤어. 그게 어때서?"
"기분이 좋았니?"
"너는 곤충을 죽이는 게 좋아?"
"가끔씩은"
"왜?"
"그것은 진짜 죽여주는 일이니까, 곤충보다 큰 걸 죽여본 적 있냐?"
"뭐라고?"
14살 소년 콜린과 로이의 섬뜩한 대화로부터 시작되는 딘 쿤츠의 <어둠의 소리 딘 R. 쿤츠 지음, 이동민 옮김, 태일출판사, 1993>는 이혼한 부모 밑에서 자라며 허약체질과 비 사교성으로 끊임없이 주변 친구들의 놀림거리로 전락하는 속칭 '왕따' 콜린 쟈콥스가 모든 아이들의 우상이자 부모들로부터의 호감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속칭 '착한 일진' 로이 보든과 가까워지는... 피로 맺어진 형제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에 벌어지는 참담한 성장의 기록이다.

장르작가 특유의 방식대로 살인과 폭력 등 일련의 급박한 사건들이 곳곳에서 전개를 돕고 있지만... 읽다보면 콜린이라는 14살 소년의 세밀한 감정묘사가 주가 됨을 느끼게 된다.  외톨이 콜린의 친구 맺기 과정에의 빠르고 자연스러운 빠져듦으로 급박한 전개를 통한 기본적인 재미의 충족뿐 아니라 14살 소년의 내밀한 심리읽기라는 면에서의 경박하지 않을 만족스러움까지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혼한 부모의 틈바구니에서 본인만의 사적 공간에 들어앉아 공포물과 괴기물 그리고 낯선 상상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외로운 마음 상태... 친구와의 관계 맺기에 전력할 수밖에 없는 절박함... 유일한 친구의 낯선 요구와 끊임없이 이어지는 질문이나 강권에 따라가면서 느끼게 되는 당혹스러움... 급작스럽게 성장해버린 듯 스스로 난관을 헤쳐 나가는 모습... 그리고 자신의 영웅을 향해 쏟아내는 마지막 단말마적 절규는 처절함 뿐이다. 하지만, 결국 14살... 여전히 친구가 그립고 어른들의 잔혹함이 소름끼치는... 아직 14살 아이이기에 가능한 극적인 화해 그리고 슬픔을 전제로 한 깨달음... 이 가슴을 울린다.

콜린의 이명은 로이와 조우하면서부터 실체를 드러낸다. 오직 콜린만이 알고 있고 전전긍긍해할 유일한 친구의 끔찍할 행태가 더해지며 이제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중얼거림이 아닌, 더 큰 외로움을 덧댈 고립으로 나타난다. 아무도 들어줄 수 없고 듣더라도 제대로 알아줄 이가 없다. 처절하게 감수해야할 소년의 과제만이 남고, 이명은 어느 순간 완벽히도 사악한 현실 자체가 되어 소년을 압박한다. 그러니 콜린에게 이명은... 외로움에 시달리던 중 얻게 된 아이의 환청일 수도 있겠지만, 주변과 소통하고 싶은 소박한 바람에 어긋나는 무관심과 왜곡, 방치나 편견에 의한 병증(病症)과도 같다.

한편으로 케케묵은 듯 오래된 이야기 그것도 다른 나라 아이의 경우에서 오는 생경함이란 게 있을 수야 있겠지만, 과거는 과거대로 현실로 이어지는 교량 역할을 해내듯 아이의 처지와 심정 또한 읽는 이의 과거를 돌아보거나 주변의 아이에게로 고개를 돌리게 하는 제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있어 여러 개의 처지와 심정을 건너뛰다 보면 자연스럽게 콜린의 절박할 심정으로 몰입하게 된다. 이는 동심이라는 만국 공용어에서 우러나오는 장점이기도 한데... 그러다 보니 마지막 콜린의 절규와 깨달음 속에선... 공포, 스릴러, 추리 등의 장르분야에 대한 선입견을 먼저 일으키는 이런 유의 소설(아마 장르작가로 굳어진 작가의 명성 탓이기도 하겠다)에선 얻어내기 힘들 깊은 여운까지 설핏 느끼게 되는 것이다.

결론이 부여하는 정황이 새삼 궁금하거나 그 귀결의 과정을 되짚고 싶어서가 아니라, 14살 소년의 울부짖음이, 그 몇 마디가 갖는 처연할 수밖에 없는 절절함 때문으로 읽고, 또 읽고... 그리고 눈을 감아보게 된다. 귀를 모아보게 된다. 14살의 나에게는 어떤 소리가 들렸을까...? 지금의 내가 듣고 있는 소리는 어떤 의미일까...?
콜린은 긴 언덕을 걸어서 주유소의 공중전화로 향하면서 더 이상 밤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개구리와 귀뚜라미 소리가 들렸고 멀리서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언제나 밤 속에 있다고 생각했던 그 낮고 음산한 중얼거림은, 초자연적인 존재가 사악한 일을 저지르고 있는 소리는 없었다. 콜린은 몇 걸음 더 걸은 다음, 밤의 소리가 이제는 자신의 내부에 있고, 사실 그것은 언제나 그의 내부에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루 스물네 시간 계속되는 어둠과도 같은 속삭임은 14살 녀석들의 평범한 낯 빛 뒤로 드리워진 그늘 속에 기생하는 사악함 자체였다. 14살의 어느 때를 넘어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어른이 되고 난 이후에도... 어둠 스스로가 검은 빛으로 충만해 있듯 사악한 중얼거림은 순도 높은 사악함으로만 채워져... 있는 듯 없는 듯한 묘한 울림으로 귀 속을 부유하는 중일 지 모른다. 

사악한 속삭임을 무시하거나 쫓아내고 듣기를 거부하는 게 평생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리라는 건 스스로 만들어낸 영웅을 아프게 허물어내면서 얻게 된 콜린 쟈콥스의 소중한 깨달음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얻는 교훈은 순수함의 훼손에서 오는 상처를 바탕으로 하기 마련이다. 깨달음을 대가로 남게 된 상처는... 성장통의 상처 치고는 너무 아프다. 피딱지로 위로 새살이 돋기야 하겠지만 그 시간이 마음 아파진다.

작가 스스로가 생애 최고의 작품이라 했다는데, 그 이후로의 작품까지 포함시킨다 해도 슬쩍 동의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거대한 악의들로 넘쳐나는 세상 '악의'

사색거리들/책 | 2011. 2. 11. 13:38 | ㅇiㅇrrㄱi

모든 것이 종료된 상황에서,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된다
27페이지에 이르면 이후 내용의 시발점이 되는 히다카의 시체가 발견된다. 85페이지부터 106페이지 사이에서는 용의자의 알리바이가 격파되고 범인으로 체포되기에 이른다. 107페이지부터 245페이지에 걸쳐 범인의 살해동기가 밝혀지고, 그 다음부터는 담당형사와 주변인물간의 독백이 교차하며 누군가(?)의 악의가 드러난다.
 
악의
카테고리 소설 > 일본소설 > 공포/추리소설
지은이 히가시노 게이고 (현대문학,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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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수를 기재해본 건... 어느 정도 예상이야 있었지만, 책 읽는 동안의 당황스러움을 전하고 싶어서인데, 초반부 긴박하게 돌아가는 살인사건의 전후과정이야 속도감 확보를 위한 작가의 배려라 한다 쳐도, 불과 100페이지가 안되어 범인이 밝혀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여곡절 사연이 담긴 살해동기까지 밝혀지니... 여전히 오른편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남은 분량의 두툼한 정도를 고려해볼 때, 도대체 무엇이 이 뒤를 차지하고 있을까 싶은 의아심? 걱정? 등이 다소 있었던 게 사실이다.
베스트셀러작가 히다카의 시신을 친구이자 아동문학작가인 노노구치가 발견한다. 한때, 노노구치와 동료 교사로 재직했던 가가형사는 그가 기록 중이라는 사건 수기에 큰 관심을 보인다. 수기를 토대로 알리바이가 조작되었음을 간파하고 범인으로 그를 지목하게 되는데, 범행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동기에 대해서는 함구하는 노노구치. 가가형사는 히다카의 발표작 대부분이 실제로는 노노구치의 작품이었음을 그 배경엔 불륜 등을 빌미로 한 히다카의 협박이 있었음을 밝혀낸다. 돌연, 피해자는 파렴치한 협박 꾼으로 가해자는 가여운 희생자로 역할을 맞바꾼다. 문득 노노구치의 오른 손가락에 박힌 굳은살을 보게 된 가가형사에겐 기괴하고 비현실적인 생각이 떠오르는데... 실마리를 따라 사건을 재구성하던 중 마주치게 되는 추악한 현실...
범인을 다 드러내놓고 본격적인 이야기를 전개하는 등의... 히가시노 게이고가 종종 보여주었던 여러 작품 탓에 낯설음은 덜했지만, <악의>의 경우는 여타 작품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이는 <악의>가 전형적인 추리소설의 방식을 일부 고수하고 있어서인데, 사건이 발생하고 주인공의 추리과정을 거쳐 범인이 검거되고 범행동기에 대한 설명으로 주요 사건이 마무리되는 방식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보편적인 추리소설의 전개 특성에 맞춰 초반부가 진행되기 때문에, 범인이 검거되었을 뿐만 아니라 범행동기마저 밝혀진 상황에선 모든 것들이 종결되어 더 이상의 이야기 전개가 불필요함을 느끼게 된다.

나름 반전이라 할 만한 극적인 기점들이 몇 차례 반복됨과 동시에 가가형사가 보여주는 번득이는 혜안의 추리과정이 노노구치의 체포와 그 살인동기가 드러나는 긴박한 흐름에 겹쳐지며 주된 긴장요인이 해소되고 마는데 독자 입장에서는 엔딩에 다다랐다는 느낌이 더 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정작 후반부가 작품의 핵심으로... 여태 '그려진-완성된' 듯 보인 정황들이란, 사건의 본질 즉 살해동기에 대한 역전극(?)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장치였음을 알게 된다. 추리소설의 '기-승-전-결'을 갖춘 사건 자체의 종료(전반부)는 한 인간의 악의에 대한 본격적인 시작점일 뿐이다.
말할 입을 빼앗겨버린 선의(善意)가 음습하고 치밀한 악의(惡意)에 의해 철저히 말살되는 데 대한 분노가 가슴속에 회오리바람 같은 열정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을까...?
명백히 앞뒤가 들어맞는 얘기, 가가형사 본인으로서도 일처리 능력에 자부심까지 갖게 하던 이번 사건은 치밀한 두뇌싸움의 덧에 교묘하게 걸려든 본인의 사고 뒤엎기를 통해 재해석되는데, 결국 드러난 한 인간의, 인간에 대한 논리적 해석이 불가능할 악의란 것을 범행의 단서로 제시하기에 이른다.

가가형사의 재수사는 본인(?) 말로는 왠지 모를 찜찜함 때문으로, 옮긴이의 해석으로는 선의(善意)를 회복하고픈 강한 분노에 의해 촉발되었다는데... 여하튼, 피해자의 피해사실과 가해자의 범죄 행위 또한 명확하니... 이제 의심의 여지는 피해자, 가해자 각자의 인간적인 면모 또는 그 둘 간의 얽힌 관계로 옮겨갈 수밖에 없다. 결국 살해동기만이 돌이킬만한 과제로 남는데... 작가의 큰 매력점인 인간 또는 인간성에 대한 나름 세밀한 관찰력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게 된다.
마음에 안 든다, 아무튼 마음에 안 든다...
한편, 드러난 사람 속이란 게 너무나 철저히도 조작되었고, 천재적이며, 악랄하기 때문에 아무튼 마음에 안 든다 라는 식의 악의 자체가 담고 있는 단출한 상징만으로 도대체 납득할 수 있겠냐 싶기도 하지만... 누구나 여러 차례 겪었을 까닭모를 증오, 시기나 질투, 증오 등을 평생 동안 담아온 이 라면... 또 악역으로서의 천재적인 존재감을 갖춰 낸 이라면 충분히 해낼까도 싶어진다.

실제 동시대의 어딘 가에선... 아무튼 마음에 안 들어서... 라는 비논리적이며 이성적이지 못할 감정상의 이유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누구를 괴롭히고, 누군가를 죽이며, 무언가를 강탈하거나 핍박하는 등의 반도덕·반윤리적 상황들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공감되는 바도 있을 테니... 악의라는 단어가 갖는 과감한 생략 내지 비약에도 불구하고 그네들 마음 한 편으로 수긍하는 심정이 놓이는지 모를 일이다.

아무튼... 우리 스스로는 그 모든 것들을 꿰뚫는 혜안을 갖춰내야 한다. 또한, 악의 자체에 대한 대응으로 일방적인 거부감만을 떠올릴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설명해낼 수 있는 악의를 갖추는 것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데 있어 필수적인 덕목이 아닐까...? 지독스런 악의 하나만으로 대하더라도 끄떡없을 거대한 악의들로 넘쳐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이런 세상에선 제 스스로가 의도된 악의를 마련해 날이 무뎌지지 않도록 늘 가다듬는 자세가 분명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