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지닌 광기의 끝 '아메리칸 사이코 American Psycho'

사색거리들/책 | 2011. 1. 25. 16:28 | ㅇiㅇrrㄱi

psycho [sáikou] 1 정신병자, 괴짜, 기인(奇人) 2 정신 의학의, 정신병 치료의...
서가 사이를 배회하다 인간의 광기 한 대목과 마주하게 된다. 두툼함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여, 엔간해선 손대지 않았을 책이었지만 제목에서 오는 강렬함에 건드린 것이 화근이었다. 정신병자가 널린 세상에서... 신문과 방송, 인터넷 여기저기에서도 정신병자의 흔적을 발견해내기란 별다른 첨언이 불필요할 만큼 흔한 일상인데... 유난히 책등의 단어가 눈을 혼란시키는 게 무언가 있어 보인다. 책 표지 앞뒤로 붙어있는 19세 미만 구독 불가 스티커가 장난같다. 도서관 책 몇 페이지쯤이야 예사로 오려내 챙기는 세태에서 애교로 봐줄만한 장난이다. 어찌나 꽁꽁 붙였는지 좀처럼 떼어지질 않는다. 포기해 버린다. 몹쓸 인간이다. 19세 미만 구독 불가의 장난 한 뭉치를 남겨놓은 채로 첫 장을 넘긴다. (누군가의 장난질이 아닌 실제 19세 미만 구독 불가 판정을 받아서 경고스티커가 부착되고 밀봉상태에서 판매되었고 판매금지의 수난까지 겪었다 한다)

브렛 이스턴 엘리스의 <아메리칸 사이코 American Psycho>... 언젠가 보았던... 십 수 년도 전에 보았던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 American Psycho>의 원작이다. 크리스찬 베일이 여피족 주인공 역에 분해 도끼를 휘두르는 슬래셔풍의 영화였단 기억... 칼날이 수시로 번득였고 난해한 의도가 있었다는 추가된 기억... 주인공 페트릭 베이트먼이 애인 애벌린에게 찾아가는 광경을 묘사한 초반부의 어수선함이 상당하다. 의미 없는 대화가 뒤섞이듯 이어지고,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이... 그가 자위 중 떠올리는 캘빈클라인 광고만큼이나 무의미한 관념들이 나열된다. 줄거리 따라잡기 방식의 책읽기로는 읽었던 부분을 두서없이 돌아봐야할 지경이다.

뉴욕의 상류층, 여피족(yuppie)인 27살의 '나', 베이트먼의 1인칭 시점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는 인간 자체가 물질로 표식화 되는 당시 그리고 지금에도 적용될 물질주의 세태의 만연함을 세밀하게 늘어놓는다. 독자는... '나'의 방과 거실이 어떤 초호화 명품기기들로 치장되어 있으며, 그 기기들은 어떤 스펙과 우월함을 갖는지, 피부진정을 위해 사용하는 값비싼 팩의 메이커나 심지어 치실과 칫솔의 종류 등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식사비로 수백 달러는 예사인 고급레스토랑(반드시 Zagat에 등재된) 예약에 열 올리는 모습과 식사하는 광경, 그 와중에 나누는 무의미한 잡담들에도 익숙해져야 한다. 사람들이란 그저 입고 있는 옷과 신발의 브랜드, 스타일링의 조화로움이 갖는 가치와 동격이다. 명품유행을 놓치고, 돈이 없거나, 무능력하다는 건, 인간으로서의 모든 가치를 상실 당했음에 다름 아니다. 이렇듯, 베이트먼의 모든 일상은... 주변 인물과 나누는 대화에서조차도 감흥 없는 물질이 우선한다.
그는 카날리 밀라노제 아마포 양복에 이케 베아르 면 셔츠, 빌 블라스 실크 넥타이, 브룩스 브라더스의 캡토 가죽 구두 차림이다. 나는 가벼운 느낌의 아마포 양복에 주름 잡힌 바지와 면 셔츠에 물방울무늬 실크 넥타이 차림으로 모두 발렌티노 쿠튀르 제품이다. 해리스에 들어서자 맨 앞쪽 자리에 앉은 데이비드 밴 패튼과 크레이그 맥더모트가 눈에 띈다. 밴 패튼은 마리오 발렌티노의 안주름 잡은 양모와 실크 혼방 소재의 바지에 지트먼 브라더스의 면 셔츠에 빌 블라스의 실크 소재 물방울무늬 넥타이와 브룩스 브라더스 가죽 구두 차림이다. 맥더모트는 아마포 소재의 더블 브레스트 슈트, 실크 소재의 스포츠 코트, 단추로 앞을 여미는 양모와 실크 혼방 소재의 바지, 바질레의 면과 아마포 소재에다 단추로 채우는 셔츠, 조지프 아부드의 실크 넥타이, 수전 베니스 워렌 에드워즈의 타조 가죽 로퍼 차림이다....
세심하고 구체적인 명품브랜드에 대한 소개는 베이트먼 그가 속한 세대를 잠식한 물질주의 자체를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방편으로, 그의 가치판단에 전제된 시선이란 게 무얼 바닥삼아 있음을 환기시키기 위해서인지 쉴 새 없이 반복되는 대목 중 하나다. 이런 물질로도 채워질리 없을 공허함을 극대화하기 위한 방편일까...? 갖가지 호사로 가득한 삶 너머 뒷 그늘을 베이트먼은 가학적인 섹스, 살인 그리고 식인으로 묘사되는 광기 가득한 분열의 과정으로 채워나간다. 당혹스럽게도... 이런 과정에 대한 묘사에서도 망설임 없는 작가의 대담함으로 인해 '눈 너머, 텍스트 너머'로 조망할 뿐인 입장에서조차 참담함이란 게 그 경계를 모를 지경에 이른다.

텍스트로 묘사되는 잔혹함이란 게 영상물에 비할까 했는데... 돌연 노숙자의 눈을 찔러대고, 개의 복부를 가르더니, 사람(특히 여성)을 세밀히 절단해 내며, 입술을 물어뜯고, 뇌를 파먹질 않나, 시간(屍奸)은 예사... 텍스트가 선사(?)할 수 있는 잔혹함의 끝이 이정도구나 싶을 정도다. 지나버린 단락을 다시 거스른다는 게 두려울 정도로 잔혹하다. 잔혹하고 잔혹해서... 무미건조하게 살육을 행하는 베이트먼을 따르다보면 혀 아래로 침이 잔뜩 고인다. 불편하게 숨 쉬며 멀거니 읽다보니 침 한번 삼키는 동작조차 부담스러웠을지도, 끝 간 데 없이 고약해져 가는 장면의 나열에 쓴물이 고이는 것일 수도 있었을 게다. 19세 미만 구독 불가가 아닌 <19세 미만과 더불어 건전한 상상력의 소유자는 평생 구독 불가 / 본 작품이 갖는 문학적 교훈과 가치는 차치하고라도 읽는 중이나 그 후의 후유증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음>이라는 긴 경고 스티커로 교체해도 무방하지 싶다.

이런 세밀한 묘사는 1인칭 시점의 전개방식에 힘입어 읽는 이의 코 앞까지 쓴 기운을 들이미는데, 달리 보자면 베이트먼의 황폐해져가는 정신세계를 조망하기엔 최적의 요건이 되기도 한다. 그저 살인을 했다라는 식이라면 냉혈한의 살인행각 이야기인가 싶어 거리를 두겠지만 참혹한 살인과 그 와중 행하는 신체훼손의 엽기행위에 '같은 시선, 같은 느낌'으로 동참하다보니 떨어져 관찰하기보다 나와 그의 경계가 사라진 것 같은 밀착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베이트먼의 광기 언저리로 점점 빠져들어 가는 동시에 돈으로 상징되는 물질로 하여 제반 가치를 평가하는 물질주의·배금주의 생활상(비단 과거 1980년대 물 건너 미국에서의 일로 매듭지어지지 않고 지금도 주변에서 혹은 내 자신의 일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이 인간이 지닌 악한 본성의 같은 쪽으로 서 있음을... 그 잔혹한 살육행위를 통해 적잖이 동감할 수 있는 것이다.
어느 순간... 모든 것들의 실재라는 게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한다...!
돌연, 나가 아닌 베이트먼으로, 그리고 다시 나로 서술시점이 오락가락하면서 잔혹한 살육극의 피해자였던 인물이 무탈하게 살아있다는 게 밝혀지면서부터 의구심이 치민다. 사실 100여건이 넘는 살인의 규모(?)를 감안할 때 단 한 차례도 체포에 대한 두려움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허무맹랑함에서부터 진즉 눈치 챌 수도 있었으려나...? 경찰부터 시작해 맞닥뜨리는 모든 이들에게 가차 없이 총알을 박아버리고도 태평스럽게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즐기는 태평스러움이란 게 가능이나 한 세상인가...?

앞서의 모든 것들이 한낱 망상이었을까? 정신분열증이 악화되어가는 병자의 참혹한 환상에 불과했던 것인가? 아니... 진정 현실일까? 라는 의문이 있겠지만 이 대목에서조차 굳이 이해를 목적으로 그간의 행적들을 되짚어 볼 필요가 없을 테다. 읽는 나는 이미 베이트먼의 미쳐갈 수밖에 없는 수순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을 테니... 저리도 건조한 강박의 시선 속에서 자아의 황폐해져감에도 끝 간 데가 없을 것임을 동감하고 있을 테니... 실재였든 허상 이였든 중요할 이유란 건 하나 없는 것이다.

숨 쉴 곳 없이 막혀버린 사각의 방, 정결한 하얀색 벽지로 사방이 도배된 그런 공간에 갇혀 살아가는 '나' 베이트먼에겐 출구란 애초부터 없었을 바람이었을까? 마지막 장을 넘기는 순간 다시 숨이 턱하니 막힌다. '여기는 출구가 아닙니다'는 곧 어느 곳도 출구가 될 수 없음을, 출구란 애당초 없었으며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임을 알리는 우울한 증표와 같다. 광기는 끝없이 이어지지만... 어떤 해결책도 없다. 무미건조, 씁쓸함, 잔혹, 끔찍, 미쳐감, 분열, 쓴물, 울렁거림과 속쓰림, 토악질, 돈과 자본주의, 살인, 거짓, 가식, 동정, 환상과 망상, 외면, 허기와 외로움, 식욕, 지독함, 지독함 그리고 지독함... 막혀버린 출구와 같이 따라오는 단어들이고 그 끝에 인간의 광기가 있다.

크리스챤 베일의 핏빛 기운이 느껴지는 광기보다 100만 배만큼 더 씁쓸할 한 인간의 안쪽을... 어쩌면 우리 모두가 가졌을지 모를 내면의 조각 일부를 들여다보거나 의심하고 싶어진다면... 크게 심호흡을 하고 책 읽기를 시작해도 좋다...!

아무래도 <아메리칸 사이코>의 인상을 아래 크리스챤 베일의 스틸 컷만큼 제대로 표현해 내기가 힘들지 않을까? (클릭하고 놀라지 말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