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내밀한 곳과 조우하는 산책길 '어느 작가의 오후 Nachmittag eines Schriftstellers'

사색거리들/책 | 2011. 1. 20. 13:38 | ㅇiㅇrrㄱi

'내 스스로에 대해서만 서술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다른 사람의 삶을 서술하는 데는 흥미가 없다'거나, '나는 작가로서 일상적인 현실을 제시하거나 극복하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비록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나의 현실을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는 페터 한트케에게 문학이란 일종의 언어적 유희에 불과할 뿐이다. 작가로서 자신의 할 일은 여태 별 문제없이 받아들이고 있던 현실에 대해 독자들 스스로가 새로이 바라볼 수 있는 저만의 작업실을 만들어주는 것뿐이니... 당연히도 사고와 언어라는 기본요소만으로 무형의 틀을 만들어내는 순수문학에 대한 지지자이며, 작가 개개인의 해결책을 강하게 담아내는 유형의 틀에 따르는 참여문학은 문학의 본 갈 길이 아니라 비난하기도 한다. <내면세계의 외부세계의 내면세계>라는 페터 한트케의 시를 보면, 그의 세계관 일부가 엿보인다.
어떤 때 우리가 근심이 없으면
파란색의 트레이닝복을 입고 조깅하는 사람이
우리 곁을 지나가는 것을 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의 마음이 편치 않게 되면
그 조깅하는 사람이 내리막길을 달리는 것을 본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불안하게 되면
그 조깅하는 사람이 트레이닝복을 입은 것이 아니라
달리는 것에 방해가 되는
긴 외투를 입고 내리막길을 달리는 것을 본다.
그리고 나서 다시 근심이 없어졌다는 표시로서
우리가 기차 안에서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 때에
그 조깅하는 사람이 파란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우리에게 어떻게 눈짓을 보내는지를 본다.
외적인 세계는 자체로 존재하기보다 인식의 주체가 되는 자아의 다양한 감정상태에 기반을 두고 그 속성을 달리한다. 그러니 가치를 얻는 쪽은 외부세계나 객관화된 관계가 아닌 내 자신의 내면세계에서 진행되는 감정의 동요나 주관의 흐름이 되고, 문학의 중요성은... 작가 자신의 의식 너머로 걸어들어갈 수 있는 수단으로서, 독자 자신에게는 기존의 익숙한 시선을 거두고 작가가 제시한 일체의 것들을 의심하거나 재해석할 수 있는 장소로서의 가치를 가질 뿐이다. 외부세계가 부여하는 편견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며 고양시킬 수 있는 방법은 내면세계 속으로의 탐닉 외에 방법이 없다는 의미로,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의 원작인 <베를린의 하늘>의 작가로도 알려진 한트케가 세계와 문학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12월초의 어느 날, 오후 시간... 작가는 서재를 벗어나 도심으로 산책길에 나선다. 그리고 다시 서재로 돌아온다...
작가가 들판을 가로지르고 있을 때 날리는 첫눈을 제외하곤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출판사의 안내 문구가 그리 과장되지 않았음에 수긍하며, 페터 한트케가 1987년 발표한 <어느 작가의 오후>를 정리하자면 이렇다. 물론 이건 서사를 기준으로 할 때의 요약으로, 서사를 제외한 나머지에 대한 정리는 필요도 못 느끼지만, 실상은 정리 자체가 불가능하다. 한 인간의 내밀한 공간 속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흐름을, 내적인 감정들의 반영을 거쳐서만 보이고 들리는 대상의 요란스러움을 단출하게 결정내리기란 어려운 탓이기도 하다.

보통, 작가라고 하면 하나쯤 갖고 있을 그만의 작업실이 있을 테다. 은밀하고도 폐쇄적인 분위기로 메워져 있을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별도의 공간은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외부의 세계이기도 하지만, 자아탐색이 진행되는 내면의식이 여러 갈래 흐름으로 뭉뚱그려 지거나 갈라서는 지점의 상징일 수 있으니, 작가 개개인의 독특한 시선은 이런 물리적이면서도 상징성을 갖는 작업실을 통해 물씬 우러나오기 마련이다. <어느 작가의 오후>의 화자이며 페터 한트케의 분신일 작가가 산책에 나서기 직전 머물러 있던 물리적 공간이면서도,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영 머물러 있어야할 상징적 공간에 대한 비유로 작업실이 이해되는 이유이기도 한데... 
 
어느 작가의 오후
카테고리 소설 > 독일소설
지은이 페터 한트케 (열린책들,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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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12월초의 어느 오후, 작업실인 자신의 서재 책상 앞에서 몸을 일으킨다. 여러 상념을 흘리고 흘리면서, 주변 보이는 것들과 미처 보이지 않았던 대상들과 끊임없이 관계하며 작가는 산책길을 나선다. 그가 몸을 일으킨 작업실은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집 2층의 서재일 수도, 아니면 작가 내면의 은밀한 어느 지점일 수도 있다. 그러니 도심 여기저기로의 산책길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거니는 평범한 일상의 형태일 수도 있지만, 머릿속 깊이 감춰진 공간을 파고드는 의식의 거닐음에 불과할 수도 있게 된다.

사실, 진정 산책길에 나서지 않았다면, 첫 눈과 조우하던 그때를 포함해 지나쳤던 곳, 만났던 사람들의 시선이나 대화, 만지작거렸을 대상 일체에 대한 거짓부렁의 나열에 불과해지지만, 정말로의 산책길인지 그저 의식 저 너머로 침전하는 재잘거림에 불과했을지는 별반 중요치 않을 성 싶다. 데면데면한 듯 다가오는 주변들에 대한 묘사와 비유, 상상을 동원한 훼손의 과정 그리고 몇 가지 화두를 산책하듯 따라다니면 될 일이다. 그 안에서 남는 건 독자 자신의 과제뿐이다. 작가가 무어라 하는 것들엔 별다른 의도가 없어 보이는 탓인데, 의도가 없다함은 언어적 유희만이 지나치다는 비난이기보다 독자인 당신은 이래라 저래라 라는 식의 강요가 없다는 쪽에 가깝다. 그러니, 한 문장, 한 문장 속을 산책하듯 거닐어야할 사람은 작가가 아닌 독자 스스로가 되어 버린다. 작가에게 있어 글쓰기에 대해, 필연적으로 따를 소외에 대해, 작품이란 것의 정의나 단조로운 텍스트 읽기에 진력난 사람들의 분노, 글쓰기 이후의 강박 등에 대해 쉬지 않고 중얼거리기만 한다. 어떤 의미로, 어떤 사정으로 받아들일 지를 작가의 의무가 아닌 독자의 과제로 몰아붙이는 듯하다.

나는 평생 동안 자신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제시켰다며 작가의 사회적 위치를, 말뿐만 아니라 그들의 호흡도, 소리마저도 모두 그를 향한 것이었다며 작가의 인식을, 내가 이웃을 갖기를 바란 적이 있느냐 물으며 작가의 고립을, 자신이 쓴 내용이 어느 선구자의 저서에 대한 재판(再版)에 불과했다 탄식하며 작가의 고뇌를, 재료란 거의 중요하지 않고 구조가 무척 중요하며 모든 요소들이 자유로운 상태로 열려 있어 누구나 접근 가능할 뿐 아니라 사용한다 해서 낡아 떨어지지 않는 것이 작품이라고 말하며 작품이 갖는 가치를... 그리고 우리 세기에 작가란 직업의 사람이 존재하느냐며 글쓰기의 불안을... 그 외 많은 것들을 던져두고 만다. 친절한 답 따위는 없다. 독자가 스스로의 이해와 인식정도를 밑바탕으로 곱씹고 되뇔 고단함만 남는다.
에필로그...
문학을 세계와 단절된 자아탐색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듯한 한트케의 비정치적 작풍에 대한 저항도... 대상을 세밀하게 훑어보는 작업 밑으로 흐를 자신으로만 향하는 이기적 애정에 대한 경외도... 뒤범벅이 될 뿐이다. 다만, 어떤 주장을 담고 있지 않다 해서... 순수문학에 대한 동경자이며 참여문학에 대한 혐오자라고 비난할 일만은 아니다. 한트케의 의도와는 전혀 다를 해석이겠지만... 제시된 해결책을 받아들이든, 제시되지 않은 해결책을 궁리하기 위해서든... 당신이 제시한게 대체 가치있는 일이냐 투정하기 위해서라도 내 자신의 내밀한 곳과 조우하기 위해 들여다보고 의심하고 거부하는 산책은 필수일 테니까...
에필로그...
'휴…….' 고백하건대... 120여 페이지 분량에 불과한 문고판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는 얕은 한숨만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작가와 작품에 대한 관심보다는 순전히 얇은 두께에 대한 끌림 탓으로 책을 손에 들었으니 소용없을 넋두리일 테지만, 다시는 책의 분량 따위에 스스로를 속여 넘기는 일 따위는 없으리라는 투덜거림만 난무한다. 페이지에 비례해 크기를 불리는 당혹스러움 앞에서는 내 자신의 얄팍한 식견 때문이라는 자책만이 깊어질 뿐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줄거리라는 서사의 유무에 집착해 단어와 문장 하나하나를 곱씹지 못했던 그릇된 읽기 습관이 못내 아쉬워... 읽기는 읽었으되 제대로 읽어내지 못해 다시 읽어야할 처지의 곤혹스러움이 얕은 한숨으로 이어진다.

텍스트는 온전히 읽었다 치고... 도대체 작가가 어느 사회와 어느 시대를 발 딛고 있으며, 어떤 의혹을 들이밀고 있는지에 대한 사전 이해가 없으니, 읽기를 통한 내 자신과의 조우는 애당초 물 건너 가버렸고 작가의 물음에 대해 기껏 내놓은 답 또한 곤궁하다. 그저, 영화의 감독 따라가기를 떠올리게 된다. 단 한편의 영화로는 감독이 영화를 통해 무얼 말하고픈 건지, 이전에는 어쨌으며 지금 내세우려는 것이 무언지에 대한 취향을, 그가 툭툭 비치는 시선의 흐름을 잡아내는데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가 만든 영화를... 모든 영화를 본다. 시간의 흐름에 맞춰 데뷔작부터 지금 당장의 작품들을 접하다보면, 감독으로서 갖는 저만의 시선이라는 거창한 영역까지는 몰라도 최소한의 취향정도는 슬쩍 알아챌 수 있으니까...

내 자신과의 조우를 위해 몇 번이고 다시 펼쳐야할 책이 분명히 있음에 다시 한번 동의하게 된 계기. 단 한편에 몇 시간을 길게는 몇 날을 꼬박 투자해야한다는 부담이 있기야 하지만, 책 읽기 또한 한 작가만을 극성으로  좇아가려는 시도 자체가 이해에 보탬이 될 수 있음을 교훈으로 각인하게 된 계기. 좀더 다양하게 바라보고 되묻자라고 새삼 떠올린 계기. 페터 한트케의 <어느 작가의 오후>가 남긴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