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강탈당한 마을 '살렘스 롯 Salem's lot'

사색거리들/책 | 2011. 1. 5. 10:19 | ㅇiㅇrrㄱi

당신은 지금 아름다운 마을 예루살렘스 롯을 떠나고 있습니다. 또 오십시오!
정체 모를 사내와 소년... 두려움에 떨던 소년은 마을의 교회 사제에게 모든 사실을 고해한다. 그리고 다시 살렘스 롯(예루살렘스 롯)으로 돌아가기를 다짐하며, 끔찍한 기억을 되살려본다.
소름끼치는 경험 속 고향, 살렘스 롯을 방문한 소설가 벤 미어스는 그의 팬이라는 수잔 노튼을 만나 가까워진다. 어린 시절, 죽은 자의 환영과 맞닥뜨렸던 마스튼 저택은 여전히 건재하고, 벤은 살렘스 롯에 대한, 마스튼 저택에 대한 작품을 구상하기 시작한다. 갑자기 실종된 두 소년, 대니와 랠피... 동생 랠피의 행방은 찾은 길이 없고, 기억해낼 수 없는 어둠속에 갇혔던 대니 또한 입원 와중 사망하게 된다. 마스튼 저택에 발로우라는 의문의 인물이 이주하고, 그의 수하인 스트레이커가 상점을 열고부터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하는데... 죽은 자를 초대하고 그들의 방문을 받게 된 마을 사람들은 점차 한낮의 잠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벤과 수잔, 제자의 죽음과 사후(死後) 방문을 겪게 된 은퇴한 교사 매튜, 죽은 친구를 십자가로 쫓아낸 소년 마크, 신에 대한 불안한 믿음 속에 방황하는 신부 캘러한, 그리고 의사 코디는... 어둠속에서 죽은 자가 배회하는 마을의 비밀을 캐내기 시작한다.
'지금'이 아닌 '예전'에 아름다웠을지 모를 살렘스 롯으로부터 도망쳐야 했던 사내와 소년은... 초반부 밝혔듯 다시 돌아가게 된다. 불이 더러운 것을 씻어 내듯, 마을을 정화시킬 책임과 사명이 본인들에게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마을은 어둠을 잘 알고 있었다.
줄거리에서 알 수 있듯... 십자가한낮의 잠 하면 바로 연상되는 것처럼, 이 작품은 흡혈귀 이야기다. 근래, 파격적인 변화를 꾀하는(주로 영화에서) 변종 흡혈귀도 아닌 것이... 흡혈귀에 빌붙는 교활한 수하를 부리고, 빛을 두려워하며, 십자가를 증오하고, 날아다니거나 연기처럼 사라져버리는 등의 전통적인 모습 그대로다. 다소 생소한 게 있다면... 흡혈귀가 초대를 받아야만 방문할 수 있다는 것인데, 예컨대, 먹잇감을 찾아 나서기야 하지만, 먹잇감 스스로가 '들어와' 라고 하지 않는 이상에야 접촉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또, 무조건 십자가를 두려워하진 않으니... 믿음 없는 십자가 대시(?)는 과감히 우그러뜨리고야 만다.

아무튼... 수십 년도 더된 흡혈귀 이야기 속에서 무언가 새로운 걸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미련스럽다 질타 받을 만치 그간 우리는 흡혈귀 홍수 속에서 살아왔다. 이젠 전문적인 흡혈귀 헌터들이 초당 몇십 발로 은총알을 쏟아내고, 자외선 폭탄으로 태양을 대신하거나, 흡혈귀 퇴치 바이러스까지 만들어내는 등의 상황에서 <살렘스 롯>은 그저 그렇고 그런(?) 고리타분한 흡혈귀 이야기일 뿐이다. 하지만...

살렘스롯(상)(스티븐킹전집11)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 공포/추리소설
지은이 스티븐 킹 (황금가지,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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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렘스롯(하)(스티븐킹전집12)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 공포/추리소설
지은이 스티븐 킹 (황금가지,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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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와 두려움은 그 연식(?)이 오래될수록 그 크기가 더해진다 하지 않았던가... 최첨단 무기가 동원되진 않더라도, 마스튼 저택에 대한 벤의 두려움에 대한 묘사는, 누구나 겪었을 어린 시절의 근원적인 공포와 닿아있다. 곰팡이와 썩은 가구 냄새, 그리고 상한 버터에서 나는 것 같은 역겨운 냄새처럼 공포는 사방에 존재하고,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불가항력적인 '무엇'이었으니, 동네 벽마다 붙어있던 동시상영관의 흡혈귀 영화 포스터는 감히 눈 마주칠 엄두도 못낼 대상이었고, 너무나 보기 싫어 저걸 찢어버렸으면 하면서도 채 1m내로 접근도 못하던 그 시기는 내 어린 시절이었다. 어린이용으로 나온 문고판의 책 표지에 나온 드라큘라성과 성으로 이어지는 벼랑길, 그리고 그 위 외딴 존재는... 차마 버리질 못해 그저 눈에 띄지 않길 바라며 옷장 아래 깊숙이 파묻어 놓을 수밖에 없는 내 심약함(?)의 결정체와 같았다. 

살렘스 롯이란 마을을 뒤덮는 어둠속... 몇몇 주인공이 아닌 마을 전체가 공포의 근원에 잠식당하는 과정이 그려진다. 벤이나 매튜 등 주요 등장인물에 제한된 공포체험이 아니라, 마을 전체의 구성원이 겪는 집단 공포 체험에 다름 아니다. 완벽히 마무리되진 않지만, 충분히 예상되는 대로 흡혈귀는 사라져가고 몇몇은 살아남아 본인들의 남은 과제를 처리해간다. 그 와중에, 희생당하는 대상은 바로 이웃들이다. 그 평범한 이웃들은 각자의 일상에 걸맞은 과정으로 밤에 잠들지 못하는 존재로 변해가고, 킹은 그들을 통해 초대하지 말아야할 자에 대한 초대로부터 시작하는 마을 전체의 참담한 수난기를 세밀하게 묘사해낸다.

그저 살아가는 와중에 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살렘스 롯>은 슬프다. 흡혈귀도 죽어버리지만, 사내와 소년에게 단 하나뿐인 고향이... 추억들이... 따분하거나 지리하거나 즐겁거나 행복했을 시간과 공간이... 괴물이 내지르는 비명소리의 뒷울림에 묻혀 사라져간다. 평범한 사람들이 겪게 되는 일상에서의 공포... 그의 작품이 갖는 큰 장점 중 하나다.   
밤마다 똑같은 외로운 싸움을 치러야 하는 아이에게 있어서, 유일한 치료는 결국 상상력을 마비시키는 것뿐이고, 사람들은 그것을 어른이 되는 과정이라고 부른다.
그러고 보면... 언젠가부터 흡혈귀 이야기는 '재미의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언젠가... 문고판 표지의 벼랑길을 타고 튀어나올 것 같던 브람 스토커(Bram Stoker)의 흡혈귀는... '공포의 존재'였을 뿐이니, 나이를 먹는다는 게... 어린 시절의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어서 좋은 건지, 아니면 함께 잃어버린 것들이 많아져 슬퍼야할는지... 잘 모르겠다... 어느 감정에 몰입된 삶을 살 수 있다는 건, 어린 시절 갖는 특권인가...? 나이 한살 더 얹혀지니 어린 아이의 상념이란게 또 다시 그리워진다.
초대하지 말아야할 자를 초대해서 겪는 비극
또 하나... 초대하지 말아야할 자를 초대해서 겪는 비극이라면 우리들이 지금 충분히 겪어내고 있는 현실이기도 할 테니, 나만의 캡틴 스티븐 킹 선생님께선 1975년이라는 저 오래된 과거에 이미... 누구나가 누려야할 일상의 자연(自然)스러움이 파괴당하는 대한민국의 비극을 예견하신게다. 역시 존경스러운 분이다. 물불 안 가리는 흡혈로도 부족하신 겐지 늘 창백해 보이는 국가대표 발로우와 그의 수많은 조무래기 스트레이커 무리에게 말뚝을 박아버릴 이들은 일개 평범人인 우리들이어야 한다는 뜬금없는 비약을 소년의 심정으로 되새겨 본다.

※ <살렘스 롯 Salem's lot>은 저 유명한 일본소설 <시귀 屍鬼, 오노 후유미 作>의 오마주가 되는 작품임.


반전이 의미를 갖다... '붉은 손가락'

사색거리들/책 | 2011. 1. 4. 12:09 | ㅇiㅇrrㄱi

47세 중년 가장 아키오 아내 야에코, 중학생 아들 나오미, 치매에 걸린 노모 마사에와 한 집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샐러리맨이다. 고부간 갈등, 아들의 엇나감 등에서 빚어진 아내와의 잦은 마찰로 피곤한 일상을 보내던 아키오는, 어느 날... 황망한 목소리로 급기 귀가해달라는 아내의 전화를 받는다. 아내가 가리킨, 정원에 놓여있는 검은색 비닐봉투에는 한 소녀의 싸늘하게 식어버린 시신이 들어있다. 소녀를 교살한 나오미는 태평스럽게 게임에 몰두해있고, 아키오는 가족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결단을 내리는데...
추리소설에서 범죄과정 특히나 범인을 드러내놓고 시작한다는 건, 작가 입장에선 상당한 위험일 수밖에 없으니... 독자의 긴장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지극히도 간편스러운 수단인, 숨겨진 범인 찾기 과정이 갖는 극적 효과를 대체할만한 비장의 카드를 제시해야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최초에 사건의 진범이 공개되어 있으니 독자 입장에서는 자연스레 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게 무얼까 라는 뜬금없는 평론가적 혜안(?)들을 갖추게 될 진데 이에 철저하게 대비해야할 부담까지 생겨버린다. 추리소설에서 가장 중요할 사건을 저지른 범인이 이미 드러나 있으니, 그렇다면 남은 분량에서 다른 무언가를 써내려갔을 것이다 라고 추측하거나 일종의 바람을 갖는 이들이 적지 않을테니까 말이다.
평범한 우리, 전혀 평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붉은 손가락>의 아키오네 가족은 그리 특별하지가 않다. 정원에 놓여있는 시체 한구를 제외해놓고 보자면, 아키오네의 일상을 태반으로 채우고 있는 고민거리들... 예를 들어, 며느리와 시댁간의 갈등, 육아관의 차이로 인한 다툼, 학교 문제, 청소년 범죄, 고령자 특히 병약자에 대한 사회적인 책임문제 등은 내 주변에서도 흔하디흔하게 맞닥뜨리게 되는 대상들이니, 아키오가 지난 삶속에서 이들에 갈등하고 결정해내는 과정들의 고단함도 그리 낯설지만은 않다. 근본적인 해결책이란 게 있을 턱이 없으니, 무게에 무게를 더한 이 일상들은 결국 나락으로 떨어질 아슬아슬함을 내재하고 있는 불안한 일상일 뿐이다. 평범함을 가장한 채 살아가고 있는 우리, 하지만 그 평범함의 허울을 언제든 벗어버릴 수 있는 위험천만한 줄타기 인생이 우리네 살아가는 모습인 것이다.
상식의 선 안에서 살고 있다고 굳게 믿으며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 작품을 통해 그런 믿음이 사실은 얼마나 허술한 것인지 날카롭게 짚어내고 있다. 읽어나갈 수록 화가 치미는 주인공들의 행태, 그러나 그것이 바로 나와 우리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아키오네 일가가 맞닥뜨리는 비극적인 살인과 공모의 현장에는 동의하기 힘들지 몰라도, 그런 불안요소들을 내재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삶을 바라보는 마음이 불편하기까지 한건, 우리 누구도 크게 다른 길을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씁쓸함 때문일 테니, 가늘게 떨리는 어머니의 등을 바라보는 흘리는 아키오의 참회의 눈물이란 게 마찬가지로 가슴 메어질 뿐이다.

붉은손가락
카테고리 소설 > 일본소설 > 공포/추리소설
지은이 히가시노 게이고 (현대문학,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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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히가시노 게이고가 추리소설의 전형인 숨겨진 범인 찾기 과정 대신 택한 것은 등장인물에 대한 인간적인 시선으로, 좁게는 아버지로서, 아들로서 고뇌하는 아키오의 일상에 대한 집중이다. 물론, 가족문제나 노령화 또는 청소년범죄 등에 대한 깊은 성찰의 단계에 이르지는 않겠지만, 적당한 거리에서 등장인물들의 고뇌하는 과정에 개입하고 있다. 독자 입장에서 일부 수긍할 수 밖에 없는 보편적인 선택과 갈등의 문제를 제시해 극적 긴장감 만큼이나 책에 몰입할 수 있는 훌륭한 요소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반전이 의미를 갖다.
이제 나름대로의 반전이란 것과 맞닥뜨리게 되는데, 이 반전이란 것이 사람인줄 알았는데 실상 귀신이었다 라는 식의 극적 반전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세밀한 관찰력의 소유자라면 이미 눈치 채고도 남을만하니, 일부작품에서 보이긴 했지만, 히가시노 게이고의 경우, 결말의 조합이 가능할 복선들을 사전에 철저하게 배치해두는 친절함을 베풀기 때문이다. <붉은 손가락>에서의 반전은, 앞전의 흐름을 완벽히 뒤집어버리는 극적 요소이기보다는, 여태까지의 이야기에 대한 맺음말에 지나지 않는다. 독자의 충격을 기대하기 보다는, 그 속 이야기가 담아내고 있는... 다시 상식화된 인간들로 제자리를 찾아가는 '우리 주인공들의 상식적이고, 인간적이면서, 평범할 모습들에 대한 공감'을 참으로 절묘하게 이끌어낸다. 일탈로 이어지는 아슬아슬한 줄타기 인생이라 하더라도 인간으로서 지녀야할 보편적인 인성이란 건... 적당히 균형을 유지하는 셈이다.

결국, 우리의 '쾌걸형사' 가가형사가 싸늘하게 아버지의 죽음을 지키는 것 또한 감동적인 가족애의 발로였음을 알았을 때, 반전은 더 이상 극의 흐름을 바꿀 뿐인 장치가 아닌 작가가 끝까지도 인간적인 시선을 거두지 않았음의 의미를 갖는다. 마지막 한 마디는 너무나 단촐한 탓에, 더 큰 울림으로 와 닿을 수밖에 없다. (가장 많이 곱씹게 될 대목이 될 것 같다)
 
이번에도 히가시노 게이고의 글은 참 잘 읽힌다. 화려하고 복잡해 보이는 문장 대신, 사건과 인물의 단면에 대해 파고들었다 다시 관망하는 자세로 물러나는 깔끔함이 간결한 문장으로 표현되고 있어, 적어도 책 읽기에선 느림의 미학이니 어쩌니 하는 것들에 진력내는 요즘 정서에도 적당히 부합하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그리 인기 있는 이유 중의 하나가 아닐까? 각종 첨단 멀티미디어기기로 중무장한 출퇴근 인파들이 전혀 부럽지 않을, 가볍지만 결코 무게감 또한 잃지 않을 책 한권을 들고 다닐 수 있다는 건, 그의 작품이 지닌 큰 장점 중 하나일 듯. 기복이 심하고 너무나 다작(多作)한다는 아쉬움은 빼고 말이다.


공처가 드디어 득남하나? '남촌 공생원 마나님의 280일'

사색거리들/책 | 2010. 12. 31. 13:51 | ㅇiㅇrrㄱi

조선 성종시대, 한성부 남촌 사는 공평은 과거와 영 인연이 없어 동네 훈장 노릇도 못할 만날 생원 신세다. 불알친구인 참봉 박기곤이마저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있는 마당에 마나님 최씨의 늦고 늦은 수태소식이 쌍수를 들어 반길 일이지마는 영 미심쩍은 구석이 하나 있어 이마에 세골 주름을 드리운 채 마나님의 불러오는 배를 바라보며 후우, 끄응 탄식으로 허송세월이다. 처가덕 보겠다고 냉큼 상대로 골라버린 최씨로 말하자면 키는 한 뼘이나 더 크고, 몸무게도 너덧 근 더 나가는데다 성격 또한 쾌활하기 그지없어 심약자 공생원이 이길 엄두를 내지 못할 위인이니, 의원 서지남이로부터 불임의 책임이 생원에게 있어 영 아이를 포기하란 선고까지 받은 마당에 배속 아이의 씨가 자신의 것은 아님이 분명하겠지만 감히 추궁할 처지가 못 되는 것이다. 나라님도 공처한다 하여 자신의 공처는 충(忠)의 발현이라 자위하는 공처가 공생원님. 주변 의심 가는 인물들을 용의선상에 올려놓고 나름 수사망을 좁혀가기 시작한다.
불혹의 나이에 등단한 늦깎이 소설가 김진규의 <남촌 공생원 마나님의 280일>에서 280일은 마나님 최씨의 수태기간이다. 당연 이 기간 중 일어난 일들이리라.

남촌 공생원 마나님의 280일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한국소설일반
지은이 김진규 (문학동네,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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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사고 후 종적을 감춘 서의원의 능력에 슬쩍 의심이 가긴하지만 당신은 불임이야! 라는 사형선고의 무게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공생원은 이 수태기간 내내 안달복달하며 용의자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가니, 이야기의 주된 골격은 의처증에 시달리는 공생원의 소심한 탐정놀음일테고 그 알알은 용의자들이 펼쳐내는 사연과 내력으로 꽁꽁 채워져 있다.
이 자식이...
기껏 당사자들과 대면하면서도 '이 자식이...' 라고 속말이나 나부꺼리고, 끙끙 배앓이나 하는 심약함에 그래도 양반인데 하는 체면치례까지 수습해야하는 처지의 공생원. 에둘러 꺼낸 말 한마디에 떨어지는, 상대의 별찮은 대꾸에도 맞대응키 아슬아슬한 인사로, 각 인물들의 길고 긴 사연과 이에 접근해가는 공생원의 줄다리기가 해학의 극치로 펼쳐지며 긴장과 웃음을 동시에 이어간다.

귀한 외아들을 독사에게 빼앗긴 이웃 앵두네의 절통함을 시작으로, 마나님의 배꼽성형을 집도한 의원 채만주, 평생의 붕우이자 숙적인 참봉 박기곤, 마나님의 입맛을 사로잡은 두부장수 강자수, 울퉁불퉁 체구로 아녀자들의 로망인 노비 돈이, 이웃 사는 괴팍쟁이 알도 임술증과 마나님의 절친인 저포전 황용갑, 뜬금없이 마나님께 안부 전하라며 실실거리는 악소배 백달치 등등의 용의자들이 줄줄 등장하는데...

작가는 이들 개개인의 면면에 그치지 않은 간단찮은 낱낱의 이력을 굴렁굴렁 엮어내고 있어, 읽는 이의 시선은 조선이란 나라의 한 때를 살았던 평민 그들의 그렇고 그런 일상의 언저리로 늘어져 간다. 그런 점에서 <남촌 공생원 마나님의 280일>은 지루할 틈이 없다. 공생원의 단순 의처증 기록으로 머물라치면 당시人들의 삶이 꼼꼼히 끼어들어와 시선을 돌리고, 그들의 삶이 지루할만해지면 '이 자식이...' 라며 주위를 환기시키는 공생원의 여전한 의심이 저 갈 방향으로의 기운을 이어간다. 여기에 공생원의 소갈머리나 마나님 최씨의 새침스럼처럼 등장하는 모든 이가 나름의 위치에 적당한 해학과 풍자로 뭉쳐 있으니, 책을 읽다 보면 공생원 마냥 종종 실없이 웃음이나 흘리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될는지 모르겠다. 또 하나, 작가의 철저한 고증노력이 받침 되었을 생소한 옛 용어들마저 초반 가독성을 저해하는가 싶더니만, 중반 이후로는 제 자리를 찾은 듯 그럴싸하게 어우러지고야 마는 것이다.

여차저차해 마나님의 280일이 마무리되어가는 시점. 여전히 홀로 탐정놀이 중인 공생원 앞으로 종적을 감추었던 의원 서지남이가 돌연 나타나서 뜬금없이 아는 체를 하는데... 혹 서지남이 이놈이...? 용의자 한 놈을 더 확보한 공생원에게 드디어 마나님이 출산하려한다는 급한 전갈이 떨어지고. 진통 중 마나님 최씨의 실토는 충격적이다.
당신 자식이 아닙니다...
끝 무렵에 머물다 보면 반전과 반전을 돌고, 시원스럽지만 서럽디 서러운 발차기에 숨이 턱 하니 막혀버려 웃지도 울지도 못할 난망함에 처하는 자신을 보게 될지 모른다. 들여다보고 다시 확인 해봐도 숨만 턱 하니 막혀버리니 나 또한 남자이기에 공생원의 의처에만 덜컥 시선을 실어버렸다는 일종의 원죄 탓일 테다. 불쑥 나타난 범인에게 애꿎은 물볼기라도 날리고픈 심정이다.

문득 고개를 돌려보면... 면면으로 살펴보았던 이들의 후일담도 펼쳐지고, 그제서야 알아차린다. 여태 티격태격 중이었던 이들 모두는 훌쩍 시대를 건너 띈 우리네 모습들일 수도 있다는 걸... 시간이 지나면 슬핏 웃어버릴 수 있는 나름 행복할 동시대인일 수 있다는 걸... 이래도 살아가고 저래도 살아가는 그저 흘려버릴 일상의 숨은 애틋함 속에 공처가 공생원과 마나님 최씨의 거리라는 게 딱 고만큼만 있었던 거라고... 거리만큼만 서로 알고 있고 알고자 했던게 달랐을 뿐이라고...

그나저나, 도대체가 누구의 아이인가? 공처가 공생원과 마나님 최씨는... 이혼이라도 하셨을라나?

읽은 사람만이 알 수 있다. 

마비된 상상력을 치유하기 위한 노력 '정호승의 의자'

사색거리들/책 | 2010. 12. 28. 13:53 | ㅇiㅇrrㄱi

크리스마스이브, 잠자리에 들기 직전, 아이가 투박하게 적어 내려간 편지 한통을 머리맡에 올려놓는다. 삐뚤빼뚤한 필적으로 산타할아버지 사랑합니다 라는 문구가 하트나 루돌프 등으로 치장되어 적혀 있다.


선물 전달을 위해 이 추운 날 하늘 위로 날아오신 산타할아버지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하기 위함이라는데, 결론인즉슨, 자신이 선물을 받을 것임에는 일체의 의심이 없다는 것이고, 다음으로 편지는 자취를 감춰야한다는 것이다. 기쁘게도 산타할아버지는 편지를 가져가셨고, 머리맡이 아닌 엉뚱한 곳에 선물을 놓고 가는 가벼운 실수 한건이 있기야 했지만... 한 아이의 꿈과 희망, 설렘... 오로지 아이만이 올곧게 즐길 수 있는 그 마음은 그렇게 1년을 더 살아남을 수 있게 된다.

아이에게 걱정은 단 하나였다. 자신이 선물을 받을 자격이 안 될까라는 게 아니라, 혹시 바람과 다른 선물이 놓여있을지 모른다는 것... 재미있다. 가방 아래로 꽁꽁 숨겨 반출해온 편지를 보자니 부러운 마음도 순간 일렁인다. 어린 날 누구나 겪게 되는 미지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한 유일한 치료는 상상력을 마비시키는 것뿐이고 그것이 어른이 되는 과정이라 한다지만, 이제 어른이 되었다 하는 심정에서 돌아보면 마비시켜버린 상상력은 두려움에 관한 것뿐만이 아니라 밝고 희망찬 것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 버렸다. 
 
의자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어른을위한동화/우화
지은이 정호승 (열림원,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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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이브날 설렘과도 같이 아이의  백지장처럼 하얗게 밑채색 된 상상력을 어른들의 모습 속에서 마주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 나에게 마비된 상상력은 무얼까 가늠해보기도 하지만 왠지 놓치고 있는 것들 태반은 좋은 축에 속해 있을 거라는 확신에만 믿음이 생긴다. 우리(?) 어른들이 다시금 그때 그 시절, 아이만이 갖고 있을 수 있는 정서 속으로 빠져들어 갈 수 있다면 지금 세상은 화기애애하고 애틋한 그런 이야기들로만 가득할까...? 남을 속이거나 다툼하고, 빼앗고 자만하며 사랑하지 않는 자들의 행적으로 충만한 각종 매체의 구석구석이 서로 사랑하고 행복했노라 라는 따위의 따뜻함으로 가득할까...?
우리는 모두 봄볕처럼 따스한 사랑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정호승 시인의 <의자>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 어른들에게 필요할지 모를 아름다운 상상력의 세계를 담아내기 있다. 사랑은 결국 사랑만을 필요로 하고, 우리의 삶을 완성시킬 수 있는 것도 오직 사랑뿐이라는 큰 전제 속에서, 진정한 사랑에 대한 공부와 이해의 노력이 필요하기에 이 책을 썼다는 머리글에서 알 수 있듯... 작가가 아름다운 동화적 상상력을 빌어 말하고픈 건 오로지 사랑 하나만을 향해 있어 보인다.

<비목어>에서는 외눈박이 물고기 한 마리가 비목동행(比目同行) 즉 한 쌍의 눈처럼 같이 다닐 수 있는 평생의 짝을 찾아 떠나는 짧은 여정 끝에 서로의 모습을 눈동자로 하여금 맑게 반영시킬 수 있는 진실한 사랑을 찾아내기도 하고, <난초와 풀꽃>에는 보금자리에 날아든 풀꽃에 대한 미운마음을 버리면서 꽃을 피워내는 춘란의 각성이란 게 담겨 있기도 하다. <빈 들판>에는 애써 키워낸 소나무를 떠나보낸 후에도 사랑의 감정으로 텅 빈 가슴을 채우곤 하는 빈 들판의 애틋한 이야기 한편이 그려져 있고, <제비와 제비꽃>에서는 제비꽃에 얽힌 부부제비의 절절한 부부애를 담아내고 있으니, 비록 등장인물이 사람은 아닐지언정 사랑을 갈망하거나, 찾아 떠나거나... 사랑에 대해 각성해야 행복해질 수 있다 믿으며 살아가는 사람들... 어른들이 갖고 있을 모든 삶의 원칙에는 사랑이 놓여 있어야 한다는 교훈에 다름 아니다.

한편, <해어화>와 <해어견>에서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모란과 개가 등장해 사람들의 거짓된 사랑고백과 조건부 만남, 추악한 내면에 대해 역겨워하기도 하고, <못자국>에서는 자신의 상처를 감춰내기 위해 아내의 가슴에 못자국과 같은 상처를 내던 남편이 진정한 사랑을 통해 지난 과오를 깨닫기도 하는데, 결국 진정한 사랑의 반대편에 있을 잘못되거나 왜곡된 일부를 지적하는 것이기도 하니 올바른 사랑에 대한 지침... 그 연장선에 있기도 하고... 

슬쩍 다른 이야기들을 넣어보기도 하지만, 자기애(愛)의 연장이라 본다면 이 또한 사랑의 다른 형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명태>에서는 오랜 기다림과 고통 끝에 존재 의미를 찾아내는 동해 명태 떼들의 자각을 통해, 세상 모든 것들이 갖는 나름의 존재이유를 역설하기도 하고, <풍경>이나 <슬픈 목걸이>에서는 풍경과 옥 목걸이를 등장시켜 타인에 대한 배려 없이 자만에 젖어 살아가는 인간의 오만한 독선을 비난하며, <현대인>에서는 오아시스를 앞에 두고 고민에 휩싸이는 한 청년을 통해, 생명만큼의 무게를 지닌 신뢰라는 덕목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갈등 속에서 무너져 버리는지를 지적하기도 하는 등... 26편의 동화에는 사람... 그리고 물고기나 소나무, 개와 의자, 망아지나 돌 등과 같이 사람의 곁에 존재하는 다양한 소재들을 활용한 맑은 이야기들이 그려지고 있다. 명상의 화가로 유명한 박항률 화백의 그림 여러 편이 삽입되어 있는데... 책을 대하는 차분한 마음을 좀더 가라앉히는데 어느 정도의 비중이 느껴질 만큼 음미할 대목이 되기도 한다.
 
동화의 장점은 명확하다는데 있다. 등장인물과 사건은... 즉 작가는... 전혀 망설임 없이 좋은 것과 나쁜 것, 착한 일과 나쁜 일, 할 일과 말아야할 일, 가져야할 마음과 아닌 마음, 선인과 악인 등을 구분해 내기 때문에, 깨달음이나 교훈은 직관적으로 다가온다. 정호승의 <의자>가 어른들을 위한 동화를 표방하곤 있지만... 몇몇의 상황들이 비아동(?)적이어서 그렇지 동화 본연의 성격에서 크게 벗어나는 특색이 엿보이진 않는다. 그렇게 보자면, 동화 <신데렐라>나 <백설공주> 등을 읽을 때의 느낌과 별반 다르지 않을 테니...

이제부터는 받아들이는 사람의 몫이 되어 버린다. 꽃과 나무의 이야기를 이해하고, 사슴과 같은 깨끗한 눈을 지녔다는 정호승 시인의 맑고 투명한 상상력의 세계에 빠져들 수도 있겠지만, 사랑해야하고 교만하지 말 것이며, 남을 배려하고 자존의 의미를 되새겨라 라는 누구나가 그건 아니야! 라고 거부할 수 없을 만큼의 큰 도덕적·심리적 명제들에 대해 식상하게 느낄 수도 있을 테다. 모두 동의한다면서도 삶이란 게 그리 간단치 않다면서 어른의 경험과 지식으로 재단질 하려 할지도 모르겠고, 시인의 유려한 문체와 의미심장한 그림 몇 편에 만족감 전부를 걸 수도 있을 테다.

책을 덮고 답답한 마음이 드는 건... 아이와 그 이후를 지나 어른이 되어가면서 잃었던 상상력의 한 부분이란 게 무언지 좀더 실감나게 와 닿았기 때문이다. 그 상상력의 일부는 아마도 일체의 의심 없는 공감과 신뢰 인 듯싶다. 이제와선 도저히 회복 불가능한 것임을 알기에 답답하고, 그보다 더한 무언가도 빠져나가 있는 듯싶어 한편 슬프기도 한 심정... 노력한다고 되찾아지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차린 씁쓸함과 혹이나 치유할 수 있을까 싶은 기댐...

그게 동화책을 읽는 한 어른의 마음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