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을 위한 코믹 잔혹 우화집 '넌 동물이야 비스코비츠 Sei Una Bestia, Viskovitz!'

사색거리들/책 | 2011. 1. 11. 13:39 | ㅇiㅇrrㄱi

무더위로 사방이 달아오르는 여름날이다. 마당 위를 팽팽히 가로지르는 주홍빛 빨래줄 위로 겹눈을 반짝이며 커다란 파리 한마리가 내려앉는 것이 아이의 눈에 띈다. 아이의 손에는 장난감 총 한 자루가 거머쥐어져 있다. 얼마 전 조립한 것으로 실린더 스프링의 탄력이 아직 싱싱히도 살아있는 탓에 가능할법한 한도 내의 공기를 잔뜩 그러쥐고 있는 상태다. 한 낮의 햇살에 찡긋거리듯 한 눈을 감고 일이 미터 남짓한 파리와의 거리에 총신을 가지런히 하고는 숨을 잠시 멈춘다.

지금이야... 퉁~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플라스틱 비비탄 하나가 순식간에 날아간다. 파리는 사라져버렸다. 잠시 후, 다른 볼 일차 마당으로 나간 아이가 이상한 움직임을 찾아낸다. 파리 한 마리다. 아니 파리 반 마리... 아니 파리 삼분의 이 마리...? 끊임없이 비비적거리는 앞다리의 분주함이란 게 여전해, 살아있음이 분명한 파리에겐 있어야할 머리가 사라져버린 상태다. 아까 사라져버린 플라스틱 비비탄과 함께 있으리라. 앞다리 청소에 여념 없고, 짧은 거리를 날아다니기도 하지만 녀석이 무얼 보고 있는 건지, 왜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건지... 왜 살아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무얼 느끼고 있는 중인지 아이도... 파리도... 알 턱이 없다.
그 파리의 이름은 비스코비츠다.
<넌 동물이야, 비스코비츠!>는 비스코비츠란 이름의 동물을 주인공으로 한 우화 여러 편이다. 20여 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기 다른 동물이 주인공으로 출현하지만 그 모든 편의 주인공 이름은 비스코비츠가 된다. 주코틱, 페트로빅, 로페즈 등 고정 등장동물들 또한 비스코비츠를 좇아 매 에피소드에서 동일한 종족으로 변화하게 되는데, 이들 주변존재들에게는 친구이거나 가족구성원 내지 주변의 관망자 역할이 고루 주어진다. 눈여겨 봐야할 존재는 리우바다. 꿈결처럼 아름답고 하품처럼 달콤하고, 베개처럼 부드럽다 표현된 그녀는 비스코비츠의 연인이자, 배우자 또는 동경의 대상으로 나타나며 당연히도 여성이자 암컷이고 애틋한 존재에서 교활하거나 냉혹한 조력자로서의 변모를 거듭하며 비스코비츠의 삶과 고민에 깊숙하게 자리 잡는다. 
 
넌 동물이야, 비스코비츠!
카테고리 소설 > 기타나라소설 > 이탈리아소설
지은이 알레산드로 보파 (민음사,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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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에피소드에서, 비스코비츠는 동면 속 에로틱한 꿈 사이와 후질 근한 현실 사이를 오가는 겨울잠쥐 역할을 해내는데, 다음 에피소드에서는 1년 가까이 이상향에 가까워지려 달음박질하는 자웅동체 달팽이로 나타난다. 이어서, 머리를 잃어가며 본능적 사랑에 순종하는 사마귀, 뻐꾸기 새끼가 태어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되새, 암컷들을 차지하고 보호하기 위해 피투성이 격전을 되풀이 하다 기분 더러워지는 엘프, 퀴퀴한 똥 냄새 속에서 정체성을 부정하는 쇠똥구리, 춤추는 재주 하나로 백만장자를 넘어서 대통령을 꿈꾸는 돼지, 약육강식의 세계 속에서야 존재의 의미를 되찾는 실험쥐, 사랑에 대해 말장난하는 앵무새, 단절된 의사소통에 괴로워하는 가시고기, 살육의 본능에 휘둘리는 전갈, 권력의 허상을 뒤늦게 깨닫는 개미, 자아를 찾지 못하는 카멜레온, 전직 마약국 소속 형사 견이자 현재는 깨달음의 명상중인 수도승 ,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는 기생충, 참을 수 없는 식욕에 시달리는 상어, 미의 기준에 대해 자각하는 미남 수벌, 성 정체성을 찾을 길 없는 해면, 가젤과 노년의 고뇌를 나누고픈 사자, 동물로 형태를 달리하곤 죽음의 숙명을 알아차리는 세균 등으로 그 역할을 달리한다.

저자인 알렉산드로 보파는 생물학 전공, 동물유전학 연구소에서의 근무경력 그리고 동양에서의 오랜 체류 등에서 습득했을 인간에 대한 시선을, 비스코비츠란 서로 다른 동물을 통해 그럴듯하게 담아내어 다소 기괴한 우화 여러 편을 만들어내고 있다. 매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비스코비츠에겐 철저하게 동물로서 갖는 과학적인 본능과 습성을 부여하는 한편,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욕망에 대한 상상력을 결합해 삶의 다양한 면모에서 이어지는 철학적 화두를 제시하는데, 너무 무겁지 않은 그렇다고 동물의 세계일뿐이라 넘겨버릴 수 없는 진지함 또한 시종일관 유지해낸다. 기본적으로 본능에 충실할 밖에 없는 동물의 삶인지라... 꽤나 잔혹하고 끔찍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설정되고 비스코비츠 등과 상황 자체가 의인화되며 빚어내는 유머와 풍자 탓에... 유쾌하면서도 입맛 쓴 심정이 뒤엉켜 버린다고나 할까...
"아빠는 어땠어요?" 난 엄마에게 물었다. "바삭바삭하고 약간 짭짤한 데다 섬유소도 풍부했지." "엄마가 아빠를 먹기 전에 어땠느냐고요." "불안하고 위태롭고 신경질적인 유형이었어. 너희 수컷들이 다 그렇듯 말이야, 비스코."
누구나 한번쯤은, 수사마귀가 교미의 대가로 암사마귀의 한 끼 식사거리로 전락하고야 만다는 사실을 들어봤을 테다. 안정적인 수태를 위해 영양분을 제공하기 위한 본능적인 행위라는 과학적인 견해가 있겠지만, <네 머리가 없어지고 있어, 비스코비츠>편에서 작가는 더 깊숙이 시선을 들이민다. 사마귀 비스코비츠는 아빠의 양분으로 태어날 수 있었던 자신의 탄생비화를 떠올리면서도 자신에게도 어김없이 주어지는 죽음의 본능에 묵묵히 몸을 맡기기로 하는데, 아빠의 희생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기도 하고, 암컷 리우바의 아름다움을 예찬하며, 다리 한 짝과 앞다리 그리고 머리를 잃어가면서도 그녀의 차가운 숨결에 전율하는 것이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놓을 수 있음을 선(善)이라 믿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미화하기도 하고 바삭바삭 짭짤했다는 엄마 사마귀의 미각을 빌어 우스꽝스럽게 비웃어 보이기도 하는데... 이렇듯 흔히 보아 넘겼거나 들어서 알고 있는 동물들만의 생태 낱낱에서 발견되는 인간 군상들의 희화화된 모습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넌 동물이야, 비스코비츠!' 라는 작가의 단언이란 게 비스코비츠 이하 등장동물 일동은 '인간의 빗댄 모습일 뿐이야!' 라는 표현의 반어일 뿐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리게 된다.
동물의 삶과 인간의 삶이 있다.
인간 또한 동물이기에 그 둘의 분리가 어색스러울 수도 있다. 그 둘이 동일하게 갖고 있을 짐승스러움에 비춰 보자면, 인간들만의 자존이나 자만을 위해 사용되는 억지스러운 구분에 불과할지 모른다. 흔히, 본능이라 폄하해 마지않는 동물들의 짐승스러움에 내제된 잔혹함과 폭력, 사랑의 헌신 등이 우리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는 가능성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심정이다.

빨래줄 위에서 한가로이 다리를 비비다 머리가 날아가 버린 파리 비스코비츠는 모든 걸 단념해야 한다는 죽음의 진면목을 순간 알아차렸을지 모른다. 아니면 보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상황속에서도 본능에 충실해야 하는 자신의 숙명을 저주하고 있었을지 모르고, 마지막 기억속 세상의 빛에서 떠올려 낸 일상의 아름다움에 찬양하는 심정으로 다리를 마주 비비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둥지에서 기다리고 있을 암컷 리우바의 안녕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을지도... 평소 사모하면서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대상이었던 인간 아이에게 마지막 숨결을 박탈당했음에 기뻐하는 중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보지 못했던 걸 들여다보고, 잔잔한 열거의 가운데 인간의 삶을 놓치지 않는 이탈리아 작가 알렉산드로 보파의 시선에 감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