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서에서 만난 북유럽의 종말 '북유럽신화 The NORSE MYTHS'

사색거리들/책 | 2011. 2. 9. 14:18 | ㅇiㅇrrㄱi

여기 XX경찰서인데 인터넷 사기혐의로 고발 되셨습니다...!
우리나라의 단군신화나 이후 각 왕조의 건국신화, 국외로는 그리스·로마신화 정도가 익숙한 신화의 전부인 일상으로 북유럽신화가 불쑥 끼어든 건, 경찰서 사이버수사대에서 걸려온 담당 형사의 한마디에서부터 시작된다. 알 수 없는 영문에 조서를 꾸미려 출두했더니만 7년여도 더 전에 호기심으로 가입하고 잊었던 게임 아이템 거래사이트에서 누군가 내 명의로 접속해서는 거짓 매물로 돈만 받아 잠적했다는데... 라그나로크? 아이온? 생전 해보지도 않은 게임에 대한 시시콜콜한 질문이 끼어든다. 접속 지점이 중국즈음인걸로 확인되니 누군가 어찌어찌해서 유출된 계정을 도용해 8만여 원어치 수익을 챙기고 만 모양이었는데 피의자가 아닌 참고인 신분으로 조서를 작성하고 간인(間印)을 찍다 보니 부아가 치민다.
 
북유럽신화(현대지성신서013)
카테고리 역사/문화 > 신화 > 유럽신화
지은이 케빈 크로슬리 홀런드 (현대지성사,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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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론 귀에 익숙한 게임 명 때문인지 호기심 또한 문득이다. 라그나로크??? 분명 들어봤다. 찾아보니 온라인 게임이기도 하고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세상의 종말이기도 하다는데... 볼만한 책 찾기가 힘들다. 그리스·로마신화 등은 관련 책자만 수백을 넘는데 반해 북유럽 신화는 손에 꼽을 정도... 케빈 크로슬리-홀런드(Kevin Crossley-Holland)가 쓴 <북유럽 신화, 현대지성사, 서미석 옮김>나 안인희 씨가 쓴 <안인희의 북유럽 신화 1·2, 웅진지식하우스> 정도가 읽을 만한 듯싶다.
라그나뢰크! 최후의 전투이자 새로운 시작!
북유럽 신화 속 세상은 9개의 세상으로 구성되고, 이들 세상이 3개의 수평면에 위치해 있는 형태다. 첫 번째 수평면엔 에시르 신들의 세계인 아스가르드, 바니르 신들이 살고 있는 바나헤임, 밝은 꼬마요정들의 알프헤임이 위치해 있고, 바로 아래의 수평면엔 인간들이 살고 있는 중간세상 미드가르드, 난쟁이들의 니다벨리르, 검은 꼬마요정들의 땅인 스바르탈프헤임, 거인들이 살고 있는 요툰헤임이 위치해 있다. 마지막 수평면엔 죽은 자가 거쳐 가는 헬과 죽은 자의 세계인 니플헤임이 위치해 있어 보통 9개의 세상이라 하면 아스가르드, 바나헤임, 알프헤임, 미드가르드, 니다벨리르, 스바르탈프헤임, 요툰헤임, 헬과 니플헤임을 지칭한다.

대부분의 관련 책자에서 라그나뢰크로 표기하고 있는 용어는 이 9개 세상이 소멸하는 최후의 전투를 의미하는데 인간계에 지속되는 전쟁과 반목을 기점으로 가장 혹독한 겨울인 핌불베트르(Fimbulbetr)가 3년 동안 지속된 이후 최후의 전쟁인 라그나뢰크가 시작된다. 거인족을 위시로, 그간 신들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던 모든 존재가 한편이 되어 신과의 전쟁을 벌이는 와중... 신과 더불어 죽은 전사의 영혼마저 다시 죽으며, 모든 인간과 꼬마요정, 난쟁이들과 거인들이 죽고, 괴물들과 지하 세계에 살던 모든 생물들 그리고 지상의 짐승들도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태양도, 별도 사라진 라그나뢰크 속에서 9개의 세상은 불타버려 재만 남기고, 대지는 바다 속으로 침전하고 만다.

물론 여기서 마무리되지 않고, 완벽한 소멸 이후로 가까스로 살아남은 몇몇 신과 두 인간을 통한 새로운 시작을 알린다. 신화가 득세했을 당시엔 동시대인들의 삶과 사상뿐만 아니라 여러 예술분야 등에 신화에서 비롯된 종말론적 세계관의 영향이란 게 컸겠지만 지금은 신들의 흔적(?)을 발견하기 힘든 여건이니 라그나뢰크가 실제 있었더라도 이미 끝나버려 그 이후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안도감에 젖어 있는지도 모를 일...? 
낯설면서도 친숙한 북유럽 신화 속 세상 그리고 교훈...!
다른 신화에 비해 상당히 낯선 내용들이어서 북유럽 신화만의 독창적인 체제를 이해하는 덴 다소 지리한 시간이 필수적일 테지만 어디선가 본 듯한 친숙한 내용들의 많음 또한 곳곳에서 알아차릴 수 있다.

저 유명한 게임 스타크래프트의 테란 족 유닛인 발키리는 인간계의 전쟁에서 죽은 자 중 용맹한 전사를 골라 주신(主神) 오딘에게 데려다주는 여전사 발키리에(Valkyries)의 차용이고, 지혜의 물 한잔에 눈 하나를 맞바꾼 신중의 신이자 지혜를 사랑하는 오딘은 얼마 전 특집으로 진행된 예능프로그램 <오딘의 눈>에 등장하며, 바그너의 4부작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 Der Ring des Nibelungen>와 톨킨의 <반지의 제왕 The Lord of the Rings>에서는 난쟁이 안드바리가 거짓말의 신 로키에게 빼앗기며 파멸의 저주를 걸어버린 황금반지 이야기를 주요 출전으로 활용한다. 그라비티의 롤플레잉 게임 <라그나로크>는 최후의 전쟁인 라그나뢰크를 , 넥슨의 3D게임 <아스가르드> 신 화속 신들의 세계를 의미한다. 이외에도 오딘의 창 궁니르, 천둥의 신 토르의 망치 묠니르, 전사들의 궁 발할라 등 많은 대목들이 여러 곳에서 인용되고 있는데, 심지어 미드가르드를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뱀 요르문간드는 만화책의 제목으로도 등장하기도 한다.

아무래도 신화의 재미라고 하면 그 안에 배어 있는 당시 인들의 삶에 동참해볼 수 있다는 것, 독창적인 저들만의 사유세계에 대한 탐닉이 가능하다는 점을 들 수 있는데 바이킹의 시인들이 원형을 만들었다는 북유럽 신화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해볼 수 있는 사항이다. 인간 종족의 탄생 비화 이면으로는 당시의 계급구조와 더불어 위로는 전사나 귀족, 아래로는 농노계층에 이르기까지 저들만의 상세한 생활상을 조명해볼 수 있고, 각각의 신들에게 투영시킨 시대적 사상 내지 규율, 전통 등의 이면을 엿보는 재미가 덤으로 얹힌다.

북유럽 신화는 고대 북유럽 인들이 지녔을 정신과 자신감, 극단적인 용맹성, 배타적인 충성심, 교활함과 냉혹한 잔인함 등이 어우러지며 인간 존재의 기원과 설명해낼 수 없는 여러 현상에 스스로들 답해가려는 극적이고 독특한 노력의 과정 자체라 할 수 있을 테다. 수백 수천 년을 거쳐 덧대어진 상상력의 광대함을 느껴보고 그 안에서 도덕과 정의, 용기, 열망, 배반 등 신화 속에서나 지금 현실 속에서나  무한히 반복되는... 난쟁이 안드바리의 황금반지처럼 돌고 돌아 이어지는 인간 속성을 엿볼 수 있다는 건... 신화가 주는 큰 교훈이 될 수 있다. 또한... 수천 년도 더 된 상상 속 이야기 곳곳으로 기생(?)해 살아가는 우리네 주변을 보자면...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가 내가 아는 모든 시대이고, 내가 살아갈 수 있는 시대 전체라는 오만에 빠져 살고 있는게 아닐까 싶은 겸양의 마음까지 느끼게 되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나는... 중국으로 건너 가 원정 사기 친 적이 절대 없다...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