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어둠은 타락을 전제한 매혹과 같다 '우등생 Apt Pupil'

사색거리들/책 | 2011. 2. 19. 13:50 | ㅇiㅇrrㄱi

사람과 사람이 무언가를 공유한다고 할 때 흔히 긍정적인 정서로의 교감을 떠올리곤 한다. 나이를 초월한 우정의 향연에 감동스러울 것 같은...? 13살의 평범한 소년이 이웃 노인의 집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는 첫 장면으로 시작하는 <우등생>은 <스티븐 킹의 사계>에 두 번째로 수록되어 있는 중편소설로... 얼핏 소년과 노인 간에 진행될 교감의 기록이라 예상할 수 있을 테다. 이런 예상은 완벽히도 맞는다. 다만, 이 둘이 각자 갖고 있거나 서로부터 나누려는 정서는 설익어 순백할 소년의 동심도 아닌... 삶의 우여곡절 끝에 갖춰냈을 노인의 지혜로울 경륜도 아닌... 폭력 그 자체다. 폭력은 동심을 타락시키고 덮어두었을 뿐인 죄의식에 다시 광기를 보탤 뿐이다. 백지와도 같았을 그것이 어른에게도 버거울 폭력적 정서라는 물감으로 채색되어가는 과정은 지켜보는 이를 힘겹게 한다. 그건... 우리가 이미 그런 식으로 채색된 마음 한구석을 느껴버리는 죄책감과도 같다. 그래서 두 사람이 교감하는 기록은... 슬프다.
토드는 우연히 아서 덴커라는 이웃 노인의 정체를 알게 된다. 그는 파틴 강제수용소의 사령관으로 유태인 학살에 참여했던 쿠르트 듀샌더. 토드는 그의 정체를 공개할 것이라며 협박해 유태인 학살의 참극에 대해 낱낱이 들려 달라고 요구한다. 주식배당금으로 소소한 삶을 살아가던 듀샌더는 과거와 재회하면서부터, 결코 화해가 아니었던... 방치되었을 과거로부터의 악몽에 다시 시달리게 된다. 이 악몽을 더는 방법은 폭력적인 과거의 재현뿐임을 깨닫고 고양이 한 마리를 오븐 속에 넣어 버리는데...  
토드는 떨어지던 성적을 조작해왔던 것이 부모에게 들통 날 뻔 하지만 듀샌더를 조부로 속여 상담교사와 만나게 해 위기를 넘긴다. 하지만, 돌연 이 모든 정황을 공개할 것이라며 협박해오는 함정에 빠져 그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한다. 서로에 대한 극도의 살의를 참아내기 위해... 과거로부터 기인한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먹지처럼 가라앉아 떨어지지 않는 머릿속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 결국 나름대로의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 시작한 끔찍한 작업은 다름 아닌 자신만의 방식으로 진행하는 극단적 폭력의 재현이다.

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탈출 : 스티븐 킹의 사계(봄/여름)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 영미소설일반
지은이 스티븐 킹 (황금가지, 2010년)
상세보기

다시 우등생으로서의 겉모습을 되찾게 된 토드... 하지만, 부모님의 자랑스러운 아들로서 성장해가는 그에겐 더 이상 어린 날의 동심과 같이 애틋하게 떠올릴 여유로움이란 없다. 토드가 소유하고 부릴 수 있다고 착각했던 듀샌더의 폭력적인 과거 속에 도사리고 있었던 것은 바로 어둠 자체였다. 하나는 어둠의 본질을 이미 겪었던 노인... 다른 하나는 어둠으로의 매혹에 빠져드는 소년... 둘을 둘러 싼 어둠은 점점 짙어져만 갈 뿐이다. 타락으로 이끌리는 어둠은 호기심이라는 다리를 건너 소년을 서서히 물들인다. 

어둠 속에 깃든 폭력으로의 매혹은 빠져들지 말았어야할 함정과 같았다. 아무리 매혹적이었더라도, 매혹을 느끼는 그 찰나에도 한 여름의 과실처럼 몸과 마음이 자라고 있었던 소년에게는 폭력으로의 귀기울임 자체가 그릇된 양분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을 테다. 고개를 돌렸어야 했다. 어둠을 빠져 나왔어야 했다. 듀샌더 또한 신분이 폭로될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감추고 토드를 협박하며 관계에서의 우월한 위치에 올라서지만... 이렇게 서로의 비밀을 움켜진 채... 마음속 상처를 감추어둔 채...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유대 할 수 있는 방법은 그야말로 잔혹하고 참혹한 욕구분출만이다.

영화 '죽음보다 무서운 비밀'

모든 것이 놀라운 속도로 성장하고 풍성해지는 여름의 상징에서 느껴지듯... <우등생>은 토드라는 소년의 성장소설일 수도 있었겠지만 킹은 이 어린 소년을 온전히 커가도록 바로잡아주진 않는다. 늘 그렇듯... 깨달음의 교훈은 사건 뒤로 여유있게 찾아오기 보다, 매 상황과 상황 사이로 숨차게 따라 붙는 식으로... 뒤쳐지는 깨달음은 파국으로 치닫는 지름길의 길잡이 역할만을 한다.

그래서 여름은... 돌연 성장과 풍성함이라는 상징을 놓아버리고 뭐든 금세 습기에 젖어 썩기쉽다는 부패의 냄새가 앙천하는 계절로 돌변한다. 그럴듯해 보이는 우등생으로서의 외관상의 성장과정은 유지하지만, 어린 날의 그릇된 호기심과 욕망, 폭력으로의 물듦에서 비롯되었을 긴장과 두려움 탓으로... 마땅히 외관상의 성장을 바른 방향으로 따라야했을 소년의 내면은 부패하다가... 결국 비정상적·비인간적인 발육을 보이는 셈이다.

누구에게나 중요한 시작점이 찾아 온다. 그 시작점이란 게 살아가는 내내 찾아오는, 그래서 한번 회피한들 다음번의 기회를 노릴 수 있는 꽤나 여유 있는 마음 씀을 준다면 좋으련만... 찾아오는 시기는 단 한번 뿐이다.

유아기가 됐든 사춘기가 됐든... 중년의 한가로운 오후시간 커피타임이든, 시작점은 단 한번 주어진다. 그때야말로 한 인간이 나머지 삶 전체를 이고 가야할 무언가가 풍성해지거나 부패해갈 수 있는 바로 그 시점임에도... 그 중요성을 우린 너무 뒤늦게 알아버린다. 

어린 토드에겐, 26인치 스윙자전거를 타고, 교외를 달려... 아서 덴커라는 문패 앞에서 그의 집 초인종을 눌렀을 때가 바로 그 시작이었으니... 마지막 장면, 쓰러진 나무 뒤에 숨어서는 그 중요함을 알아차렸을까...? 
내가 오로지 공포 소설만을 쓰느냐고? 여러분이 이 책에 실린 이야기를 읽었다면 이미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아시리라
<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 탈출>은 사계절 중 봄, <우등생>은 여름에 해당되는 작품으로 각각 '희망의 봄', '타락의 여름'이란 부제가 붙어 있다. <스탠 바이 미>, <호흡법> 이렇게 두 작품이 '자각의 가을', '의지의 겨울'이란 부제로 별도 발행되어 있으니... 사계절의 흐름과 각 계절이 연상케 하는 보편적인 상징성에 맞게끔 각 작품들이 순차적으로 배열되면서 <스티븐 킹의 사계 Different Seasons>란 큰 제목으로 다시 한 번 묶이게 된다.

저자 후기 중 킹 본인이 밝힌 일종의 자신감을 고려치 않더라도 단순하게 줄거리에 의지해 독자의 가벼운 곳을 건드리기보다 문장 하나하나에서 베어나는 깊은 식견, 매 상황에 대한 진득한 시선, 때론 급한 듯 때론 느긋하게 지향 없이 흘러가는 듯싶어도... 한 지점에 이르러서야 알아차리게 되는 단말마적 충격이 아닌... 뒤늦게 어딜 들춰봐도 아 그랬었구나... 동의하며 작가의 의도에 깊은 숨을 들이쉬게 되는?

그건... 토드에게 찾아왔을 호기심처럼... 진정 거부하기 힘들 매력이다.


※ <우등생 Apt Pupil>은 영화 <죽음보다 무서운 비밀 Apt Pupil>의 원작입니다.
※ 본문 중 사용된 이미지의 저작권은 NAVER 영화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