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 그 자체에 대한 구토 '개인적인 체험'

사색거리들/책 | 2011. 3. 26. 07:00 | ㅇiㅇrrㄱi

  600년 수령의 은행나무 꼭지가 언뜻 보이는 포장마차, 매큼하게 곱창 타들어가는 연기가 자욱한 와중에도 맞은편 남학생의 선연한 매력이 가시처럼 눈에 박혀든다. 한 잔의 소주를 간단하게 떠넘기며 보이는 목젖의 적나라한 꿀럭임이 어찌나 시원스럽던지 한번 좇아보자 싶다. 한 손으로 유리잔을 가볍게 받쳐 들고 따라하던 억지 모방의 막바지는 다소의 시간차를 둔 구토로 이어진다. 술과 멀어지기 힘들 대한민국에서의 삶 탓에 같은 모양새의 고약한 구토는 일상이 되어버린다. 양은 무관하다. 한잔이거나 반잔이거나 구토는 뒤따른다.

  구토. 시각적으로는 원색의 강한 톤으로 알록달록해 보일 피자의 맛깔스러움(?)과 이어져 있으면서도 시큼한 내음을 동반한 불쾌함 쪽에 더 가까운 단어. 왠지 모를 더부룩함과 메스꺼움까지 연상케 하는 이 징글맞은 단어와 난 친하다. 술과의 조우라는 전제하에 그렇다. 그래서인가 위스키의 숙취를 못이긴 버드(Bird)가 자신이 근무하는 학원의 수강생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백개의 파리 대가리들 면전에서, 속에 있던 황토색 물웅덩이를 꺼내놓았을 때는 은근히 친근감마저 느끼게 되는 것이다.  

 

개인적인 체험
국내도서
저자 : 오에 겐자부로 / 서은혜역
출판 : 을유문화사 2009.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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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4년 <만엔원년의 풋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의 1964년 작품 <개인적인 체험>의 버드는 이제 막 2세 탄생을 맞이한 신출내기 아빠의 별명이다. 그는 경사스런 날에 왜 속이 뒤집히도록 술을 마셨을까? 자신의 토사물 물웅덩이를 불쌍하게도 꼼짝 않고 바라보며 무슨 생각에 잠겨 있었을까? 저 먼 아프리카의 땅 위에서 선글라스 너머로 눈부신 하늘 올려보기를 청춘의 유일하고 긴장된 바람으로 붙들어놓는 이 엉뚱한 인물의 구토는 단지 숙취 탓만이 아니다.

일찍이 맛본 적이 없는 끔찍한 공포감이 버드를 사로잡았다.
  그날, 버드가 아내의 첫 출산소식을 전해 듣던 날. 급히 찾은 병실의 분위기가 상당히 묘하다. 장모의 침울한 눈빛은 그렇다 치고, 낄낄거리는 듯 비웃음으로 아기의 상태를 전하는 병원 원장의 표정 또한 새로운 생명의 탄생에 즈음해 의례히 예상할 수 있는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뇌 헤르니아(腦 hernia), 두개골 결손으로 뇌의 내용물 일부가 빠져나와 버린 거예요..." 충격적인 말을 전해 듣는 바로 그 순간 이후부터의 고뇌와 연민, 괴로움과 공포, 무서움... 심지어 자신의 2세에 대한 역겨움까지 포함한 이 모든 감정의 울컥거림은 순전히 버드 자신만의 개인적인 체험으로 진행된다.

  개인적인 체험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체험의 동굴을 나아가다 마침내 인간의 삶 일반에 관련된 진실의 언저리를 체득할 수 있는 샛길로 빠져나올 수 있는 경우 하나, 그리고 다른 인간세계로부터 완벽히 고립되어 체험의 과정을 거듭하더라도 샛길은커녕 단 한 조각의 의미도 만들어낼 수 없는 경우 둘. 버드는 완벽히 후자 쪽의 개인적인 체험이도록 어느 누구와의 공유도 거부한 채, 미치기 직전의 상황으로 스스로를 몰아간다. 바로 아기의 죽음에 대한 간절한 바람으로의 체험이다. 정확한 진단과 수술에의 가능성 타진을 위해 아기를 대학 부속병원으로 이송하는 와중, 어둡고 고독한 전장에서 부상당한 듯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아 맨 아기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흘렸던 눈물은 어쩌면 그가 져버릴 인간적 의미에 대한 단출한 예의 따위였을 것이다.

  아기의 죽음을 바라다 못해 담당의에게 아기의 아사(餓死)를 넌지시 종용하고는 오로지 죽었다는 전화 한 통화만을 기다리는 아빠의 모습은 절망에 의한 잠시의 혼돈 정도로 수식하기엔 지나치게 참담하다. 그것도 오래전 알코올 중독의 교훈을 져버리고 장인이 한줌 위안으로 건네준 위스키 한 병을 마셔내기 위해, 질척한 성교를 통해 일말의 위안이라도 받고픈 마음에 히미코라는 여자친구의 집에서 오매불망 전화만을, 아기가 죽었다는 통보만을 기다린다. 버드가 학원에서의 수업진행 도중 일으킨 구토는 그래서 단지 숙취에 의한 것일 수 없다. 산도(産道)의 압력 때문에 가늘고 뾰족해진 아기의 긴 두상을 바라보며 느꼈던 구역질, 보다 근원적으로 존재 그 자체에 관련된 무서운 구토의 아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Sooner murder an infant in it's cradle than nurse unacted desires... 아직 활동을 시작하지 않은 욕망을 키워 주느니 아기는 요람 속에서 죽이는 편이 좋다...
  히미코가 언급하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한 구절 아래 아기의 죽음을 공모하는데 그치지 않고, 아프리카로 향하는 동반여행으로 현실에서 도주하려는 버드. 수술의 가능성마저 거부하고 불법의료행위를 서슴지 않는 히미코의 남자친구에게 아기의 처분을, 아기의 살인을 의뢰하기 위해 병원을 찾아 헤매는 그의 모습에선 절망과 공포만이 뚝뚝 흘러내린다. 아기의 상태에 대해 일체 모르고 있는 와이프로부터 행여나 아기가 죽으면 이혼하게 될 거라고 엄포까지 들은 터였지만 지척의 시간 앞을 바라볼 여유 따위는 없는 것이다. 

  절망적인 체험이 얼추 마무리된 이후의 게이바, 버드는 어떤 종류의 공포심으로부터도 자유로웠던 자신의 스무 살 때를 회상하다 문득 견고하고 거대한 물음과 맞닥뜨린다. 아기에게 수치스런 짓들을 무수히 거듭하여 도망치며 지키려 했던 것이 과연 무얼까? 대체 어떤 자신의 일부를 지켜 내겠다고 시도한 것일까? 절망에의 불안, 그것도 홀로만이 거쳐내야 했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고난을 진정 스스로 이겨내었던 것인가? 단순히 절망과 공포로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숨겨낼 뿐은 아니었을까? 이 기만스러운 도주를 멈춰내기 위한 버드의 결단이 필요한 시점, 27년 삶 전체가 말짱 무의미로 채워질 일찍이 맛본 적이 없는 끔찍한 공포가 그를 사로잡는다.

  <개인적인 체험>은 실제 선천성 장애아인 아들 히카리로부터 비롯된 오에 겐자부로 자신의 실제적인 체험의 반영이다. 버드라는, 아직 청년의 티를 벗어내지 못한 철부지가 별명이 어울리지 않는 한 남자로, 아기의 아빠로 성장해 가는 모습을 통해 불안에 떨어하는 한 인간이 자신과의 절망적인 싸움을 어떻게 수행해가는지를 세밀하게 담아내고 있다. 얼핏 간단해 보이는 단문과 단문의 연속으로 작품을 구성해내고 있고, 문장 자체에 내재한 생경한 비유와 상징 등으로 인해 다소간의 어리둥절함으로 작품 속 여행길에 나서야할 기분이란 것도 있다. 하지만 한 인간의 절망과 그 치유의 과정을 표현해내기엔 단문이라는 길이의 한계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그 묘사의 치밀함과 집요함 그리고 보편적 심리로의 추구 또한 눈에 띈다.

  아마도 작가 스스로의 순전히 개인적인 체험, 그 안에 있었을 절망과 퇴폐로의 직접적인 경험 탓일 게다. 그 고단한 경험을 이겨낼 수 있었던 인내, 그 끝에 놓였을 희망은 이 노(老) 작가의 여전할 바람 하나를 품고 있지 않았을까?

  아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 문학적 승화의 크기에 비해 너무나 약소할! 박수를 보낸다.


망각할 수 없어 생기는 슬픔 '그린마일 Green Mile'

사색거리들/책 | 2011. 3. 18. 18:00 | ㅇiㅇrrㄱi

  무료한 일상. 대부분의 것들은 반복되고 있어 새로운 시간 앞에 서 있다는 감동적인 소회를 부러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면 매번 울리지도 않을 전화기를 손가락 끝으로 까딱거리는 다르지 않을 자신과 늘 마주할 밖에 없다. 언젠가는 집으로 향하며 터벅거리는 발놀림이 과장스러운 의심에 휩싸인다. 언제까지 걸어갈 수 있을는지, 결국 오도 가도 못하는 처량함으로 주저앉아버리겠지...? 언제가는...? 우리가 평생 걸어가는 그 길의 끝엔 과학적 논증이나 예술로의 구현 따위로도 실체화라는 게 어려울 죽음이란 반품불가의 선물단지가 놓여 있을 테다.

  죽음을 목적지 삼은 여정 중엔 신의 은총이니 기적이니 하는 초현실적 대상에 의한 충격이 못내 반갑기까지 할 터... 스티븐 킹은 죽음에 근접해 있는 인간군상 그리고 그들이 맞닥뜨리는 비논리적인 무언가를 <그린마일>에 담아내고 있다. 

 

그린 마일
국내도서
저자 : 스티븐 킹(Stephen King) / 이희재역
출판 : 황금가지 2004.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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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드마운틴 교도소엔 그린 마일(Green Mile)이라 불리는 길이 있다. E동에 수감 중인 사형수를 고철 스파크라는 별칭의 전기의자로 최종 인도하는 일이 간수인 폴의 업무이니 누군가에겐 단 한번 찾아온다는 죽음이 그에겐 수십여 차례나 반복되는 일상의 한 조각일 뿐이다. 극악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을 흉악한 범죄의 대가로 수감된 사형수들이기에 그린 마일 위를 걷게 되는 죽음으로의 인도는 그저 그의 일상일 뿐 죄책감이나 자괴감에 사로잡힐 무엇은 아니었다. 그런 폴에게, 그의 E동으로, 잊지 못할 손님 여럿이 찾아온다.
죽음이란 단 한번뿐일 체험을 겪어낸 사람들은 같은 낯빛을 하고 있다.
  폴을 비롯한 간수들... 해리, 브루터스, 딘에게는 사형수들 또한 죽어서 같은 낯빛을 할 인간일 뿐이니 죄의 흉악성이야 어떻던 평안히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배려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대한다. 그에 반하는 간수인 퍼시가 있다. 약함 앞에서는 한없이 폭압을 부리는 기질 탓에 사형수들을 산송장에 다름없이 취급한다. 사람이라면 보편적으로 갖춰야 한다는 인간적인 마음가짐만큼이나 퍼시가 보이는 마약과도 같은 비열함 또한 보편적이지 않은 인간의 정서라 눈감아버릴 수는 없을 테니 오히려 더욱 인간적인 모양새에 가까운 형상일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 사형수인 들라크루아가 딸랑 씨라 이름 붙인 쥐 한마리가 출현한다. <그린마일>이 사형수감방의 뒷이야기를 담은 논픽션이 아닌 픽션으로서의 본격적인 모양새를 갖추는 지점이 바로 딸랑 씨의 출현이다. 애완동물처럼 제 주인을 알아보는 선을 넘어, 인간에 준하는 판단을 하거나 그리움을 표현하며 실행에 옮길 수 있다는 자체가 무척이나 소설적인 상황이어서, 킹의 다른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게 되는 비현실적인 기괴함이 이 조그마한 쥐 한 마리에 담겨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아무튼... 쥐 한 마리의 생사에 전전긍긍 하는 살인범의 모습이라니... 들라크루아의 뜬금없을 애정을 타자(他者)에 대한 존중감의 회복이라는 의미에서 본다면 인간은 본래 선하다는 역설일 수 있다.

  어린 소녀 둘을 무참히 강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 또 하나의 흑인 사형수 존 커피가 있다. 그는 병균일 수도, 아니면 하느님에 반하는 고약한 존재일 수도 있는 그 무엇을 들숨과 날숨으로 정화시킨다. 일종의 치유다. 사람의 속내를 읽거나 지난 죄를 감지하고, 그 죄에 대해 단죄를 내릴 수 있는 초인간적인 능력 또한 지니고 있다. 인종차별의 굴레에 씌어 짓지도 않은 죄에 대한 형벌을 감수하려는 이 흑인이야 말로 신의 형상이다. 십자가와 함께 인간의 죄를 짊어지려는 예수의 형상이고, 기적을 행하다 처형당한 성서 속 선각자들의 발현이다.

  또 한명의 사형수 와일드 빌이 있다. 예정된 죽음 앞에서도 결코 지난날을 후회하지 않는 존재로 퍼시의 또 다른 연장선이다. 퍼시와 와일드 빌, 이 둘은 같은 존재이기에 서로를 두려워하고, 경멸하며, 증오했는지도 모를 일. 와일드 빌로부터 수모를 당한 퍼시는 들라쿠르와의 사형집행 전 그가 자신의 생명만큼이나 애착을 느끼는 딸랑 씨를 무참히 밟아 버린다.
딸랑 씨의 등뼈가 부서지면서 뚝 소리가 났고 입에서는 피가 뿜어져 나왔다. 검고 작은 눈이 눈구멍에서 불룩 솟아올랐다. 거기에서 나는 인간과 너무도 비슷한 놀라움과 고통의 표정을 보았다...
  한낮 미물의 검고 작은 눈에서도 보이는 인간의 고통이라니... 하지만 존 커피는 이 생쥐에게 다다를 그린마일의 짧은 길마저도 틀어버린다. 이제부터가 숨 가쁜 이야기의 시작이다. 뇌종양으로 참혹하게 삶을 마감하던 교도소장의 부인 멜린다, 존 커피의 결백과 그의 능력을 믿는 간수들의 인간적인 고뇌, 들라크루아의 예정되었지만 너무나 참혹한 마지막 순간, 퍼시와 와일드 빌에 대한 누군가의 단죄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의 회환...

  시간은 흘러... 모든 사람이 그린마일 위를 걷게 된다. 오직 폴만이 살아남아 이 모든 것들을 회상한다. 그리고 그가 찾는 외딴 오두막... 그곳엔 언젠가부터 찾아온 그 옛날의 친구, 딸랑 씨가 있다. 여전히 실패를 굴리며 재롱을 부리는... 노쇠해 빛깔마저 바래버린 이 쥐 한 마리도 결국 숨쉬기를 멈춘다. 폴의 말마따나 죽음이든 뭐든 그 나쁜 놈이 모두를 해치고야 만 것이다.
어떨 때는, 후, 그린 마일이 너무도 길기만 하다.
  이 모든 상황에서 비켜나 있는 폴... 어떤 기운이 그를 지켜준다.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 앞에서, 그리고 홀연히 나타난 존 커피의 환영 앞에서 폴은 자신이 받은 선물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는다. 어둠을 남기는 시간의 흐름에 거스르는 힘... 하느님의 존재만큼이나 선명한 고약스러운 존재들을 물리치는 어떤 힘...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여태 자신을 지켜주는 신비한 힘을 느낀다. 누구나 걷게 될 그린마일의 길. 길든 짧든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회피할 수 없을 그 길이 그에게는 너무나 길게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신비스러운 힘은 그린마일로 향하는 발걸음을 한없이 더디게 하지만... 주변 모든 것들이 시간이 만들어낸 어둠에 휩싸여 있으니 그저 저주와 다름없지 않았을까?

  <그린마일>은 사형제도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법과 사회제도의 불합리에 대한 항변일 수도 있다. 아니면 존 커피로 재림한 예수나 신성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고, 성선설이나 성악설에 관한 철학적인 화두를 던질 수도 있다. 다만, 마지막 장을 덮고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폴의 짧은 한숨이니 언젠가는 단 한번 갚아야할 부채처럼 남아있는 죽음으로부터 멀어져 있지만 기를 쓰고 다가서고 싶었을 심정... 홀로 남겨진 외로움과 떠나보낸 소중한 대상들에 대한 그리움의 여운이 쓸쓸하다.

  딸랑 씨의 검은 눈에 나타난 놀라움과 고통의 표정처럼... 한숨을 쉬는 폴의 눈빛엔 망각할 수 없어 생기는 슬픔이 진득하게 배어 있을 것 같고,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릴 것만 같다. 다시 반복되는 무료한 일상... 폴의 한숨 앞으로 조금은 새삼스러운 것들이 생겨났을까...? 망각할 수 있는 순간을 맞이했기를...!


한 소녀의 바람 가득할 여정 길 '소멸 Vanish'

사색거리들/책 | 2011. 3. 16. 15:00 | ㅇiㅇrrㄱi

바람이 분다...
봄? 언젠가부터 봄은 만물이 소생하는 시작점이기 보다 저 멀리 대륙의 흙덩어리를 흩날리는 바람 부는 계절의 상징으로 떠오르곤 한다. 2011년의 봄은 유난히 바람이 많다. 회색 빛 건물 앞, 언덕을 가로지르는 나무 계단 곁에 놓인 절대 돌이 아닐 돌 외관의 스피커 속으로도 바람이 불고, 길을 걷다 지나치는 술집 내부의 와글와글한 젊은 열정 사이로도 바람이 분다. 퇴근길, 지쳐 서있던 횡단보도의 한편으로도 바람이 분다는 웅얼거림이 떠다니고, 이어폰으로 틀어 막힌 누군가의 귀 속에서도 그 바람은 새어 나온다. 새로운 계절의 중심으로 날짜가 하나 둘 넘어가며 바람은 더 많이 불어댈 기세다.

이번 바람은 모래를 실은 바람이 아니다. 경황없이 머리칼을 나부끼는 바람도 아니거니와 살갗의 서늘함으로 알아차릴 바람도 아니다. 눈으로 확인할 수 없고 만질 수 없다는 바람만의 속성만 갖춰냈을 뿐, 어린 시절 사모했던 어느 가수의 처량한 목소리에 실린 중얼거림일 뿐이다. 그런데도 바람은 이어진다. 세월에 녹슨 추억의 봉인마저 갈라버릴 날선 바람으로, 마음 속 짚이지도 않을 쓸쓸함까지 더할 묵직한 바람으로 불어온다. 사방이 바람이다. 

소멸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 영미소설일반
지은이 테스 게리첸 (랜덤하우스,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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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인가... 멕시코 사막 한가운데서 순결을 잃었다는 밀라의 여정 길에도 바람이 심하지 않았을까 선뜻 단정 지어 버리는 것이다. 바람에 실린 굵은 모래 알갱이가 밀라를 포함한 그녀들의 알몸 위를 살 따갑게 두드리지 않았을까...? 그녀들을 덮으며 희붐한 살갗의 백인 남성 여럿이 내질렀던 거칠은 숨소리마저 유린당하는 자의 고통과 수치 사이로 광풍이 되어 몰아치지 않았을까...? 단지 웨딩숍에서 드레스 파는 점원이 되고 싶다는 17살 소녀의 영혼과 육신은 바람에 흩날리는 잿더미가 그렇듯 위태롭다. 바람은 급기야 밀라 그녀의 완벽한 소멸 즉 죽음마저 꿈꿔낸다. 소박한 꿈을 가졌지만 이뤄내지 못하고, 남성의 노리개만으로 살아가야할 처지의 그녀에게 남은 것은 증오뿐일 테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증오를 되새길 짬도 주지 않고 죽음의 위협은 계속된다. 그녀가 무언가를 보았기 때문이고, 무언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엇을...?

테스 게리첸은 <외과의사 The Surgeon New York>, <파견의사 The Sinner>, <견습의사 The Apprentice> 등으로 이어지는 일명 의사시리즈를 통해 유명세를 치렀다. 의사라는 전직을 십분 살려 살인이나 범인 찾기 과정에 보탠 의학적 지식의 정교함은 작중 인물들에겐 넘치는 개성을, 연이은 사건에는 또렷한 개연성을 더하는 장점으로 작용한다. 여기에 법의국의 마우라 아일스 박사와 강력계의 제인 리졸리라는 두 여성을 내세워, 한편으론 자신의 의학적 지식을 효과적으로 담아내고 다른 한편으론 거친 듯싶어도 섬세할 수밖에 없는 여성의 심리를 담아낼 효과적인 방편으로 활용한다.

그렇게 마우라는 의학지식을 강력사건의 해결과정에 십분 담아낼 수 있는 다소 냉철한 인물로, 리졸리는 마초의 세계 내에서 여성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하며 고군분투 살아남기 위해 쌀쌀맞을 정도로 자존을 드높이는 다혈질의 인물로 그려지며 묘하게도 어긋나는 개성을 발한다. 또, 여성이라는... 왠지 따뜻하고 섬세한 속내의 소유자로 사랑에 취약해 보이는 이 둘의 기질은 긴박하게 전개되는 사건해결의 와중으로 멜로라인을 몇 가닥 걸쳐낼 보완재 역할을 제대로 해내기도 한다.

테스 게리첸의 신작 <소멸 Vanish>에서도 마우라와 리졸리의 존재감은 여전하다.
법의국에 도착해 부검대기 중이었던 시체 비닐 백에서 움직임이 느껴진다. 그리고 눈을 뜨는 의문의 여성. 마우라는 죽음에서 되살아난 그녀를 병원으로 이송하지만, 돌연 광란의 상태에 돌입한 그녀는 경비원을 죽이고 인질극을 벌인다. 6명의 인질이 병원 내에 억류되고 출산을 임박해 입원 중이었던 리졸리도 그 중 하나. 경찰신분이 밝혀지면 목숨이 위험할 수 있다. 리졸리와 세상 빛을 보기 직전인 아기를 구해내기 위한 FBI 요원이자 리졸리의 남편 에이브리얼 딘 그리고 마우라의 사투가 이어진다.
이 두 여성 주인공의 활극 사이로 17살 소녀 밀라의 고된 여정의 기록이 이어진다. 얼핏 달라 보이지만 무언지 잔뜩 슬퍼 보이는 사연들이 각자의 연결고리를 통해 꿰어지기 시작하고 어느 순간 하나가 된다. '차가운 스릴러에 따뜻한 감성을 불어넣는 작가' 라는 수식에 걸맞게 이번엔 영혼과 육신을 철저히 짓밟힌 한 소녀의 상처를 적당히(?) 차용해낸다. 하지만, 막연한 아메리칸 드림을 밑바탕으로 한 밀입국자의 현실이나 그들이 성적 노리개로 전락하고 마는 사회적 문제에 대한 성찰까지 담아냈다기엔 뻔한 설정이 적지 않다. 대부분의 장면에선 어디선가 보았던 듯싶은 기시감을 피할 수 없다. 그저 스릴러라는 장르에 쉽게 따라붙는 건조한 문맥을 어지간히 건드려내기만 한다.

그렇게 건드려낼 뿐이다. 이 작품이 스릴러라는 장르이기를 포기하지 않은 이상에야 본연의 맥락을 피해가진 못할 테다. 독자는 여전히 풀어내야할 몇 가지에서 눈길을 떼어 내지 못할 밖에... 죽음에서 일어난 여인은 누구인지, 왜 인질극이란 극단적 폭력 안으로 숨어들었는지, 리졸리는 어떻게 위기를 벗어날 것이고, 마우라와 딘은 어떻게 그녀를 구할지, 범인이 있다면 누구이며 음모가 있다면 그 사정이 어떠한 것인지... 그리고 이 모든 사이로 끼어드는 밀라의 삶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사건이 발생했다면 반드시 해결되어야 한다.
그게 원칙이다. 아마 장르작가로서의 능력은 이 모든 것들... 너무나 빤해 보이는 요소들을 그럴듯한 짜임새와 신선한 발상을 통해 적당히 감춰내고 에둘러 꺼내놓는 지점에 놓여 있지 않을까? <소멸>의 경우 한 소녀의 슬픈 삶에 대한 접근에서는 물기 가득한 바람을 불러 일으켰을지 몰라도, 빤한 걸 빤한 그대로 끌고 가는 식상함까지 껴안고 있다. 얼마나 그럴듯하게 풀어내려나? 기대감은 가득이지만 이번 참의 배신은 참 크다. 얄팍하게 손에 잡히는 남은 분량은 수긍할만한 해법의 과정을 담아내기엔 너무나 빈약하다. 그래도 설마...? 했던 기대마저 마지막 장과 함께 덮어버리곤 어리둥절해진다. 이런...

욕심을 접고 나면 소박할 인상 하나만이 남을 때가 있다. 문득 읽는 내내 들었던 노래 한곡을 떠올린다. 미우라고 리졸리고 음모고 뭐고 간에 다 던져버린다. 친구의 유골 앞에서... 모래 바람의 따가움 속에서 눈을 끔뻑이며 휘청거릴 말라깽이 한 소녀의 쓸쓸함 심정을 떠올려보고, 거세게 불고 있는 이 봄 바람에 모래 알갱이가 섞이지나 않았을까 입을 앙 다물어 보며 수십 번째 들었을 그 노래를 다시 처음으로 되돌려 보는 것이다. 바람이 거세다.

스릴러 한편을 읽고 괜한 바람 타령을 하는 걸 보면, 봄은 봄인가? 뜬금없음은 테스 게리첸이 아니라 내 속에서 찾아야 할까 보다.


괴담(怪談)이 아닌 괴담(愧談) '대학괴담 大學怪談'

사색거리들/책 | 2011. 3. 7. 17:34 | ㅇiㅇrrㄱi

  보통 괴담(怪談)이라고 하면 비현실성을 큰 전제로 갖곤 하니, 귀신이나 괴수 등 현실과 동떨어진 존재로 인해 발생하는 공포물을 떠올리기 일쑤다. 특히나 그 자체가 폐쇄적인데다, 그 안에서 생활하는 젊은 꿈들을 일방적인 목적으로 말살시키는 대표적 공간인 탓에 학교란 장소는 이미 괴담이 기생하기 최적의 양분으로 밑바탕 되어 있기도 하다. 옥상위에서 자신을 떨어뜨린 친구를 찾아내기 위해 머리를 발삼아 콩콩 뛰어다니는 거꾸로 귀신이나, 화장실에서 빨간 종이 줄까 파란 종이 줄까 의문의 선택을 강요하는 존재, 학교에 얽힌 비밀을 몽땅 알아내면 죽음을 당한다는 저주 등에 이르기까지 등골을 오싹케 하는 이야기들은 언제 적인지 기억나지도 않을 학창시절의 한때로부터 그림자 마냥 쫓아다니는 벗과 같았다. 

대학괴담
국내도서
저자 : 김장동
출판 : 북치는마을 2010.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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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이런 학교괴담이... 지성의 전당이자 학문추구의 산실이라는 대학의 상징과 전혀 어울리지 않을 기이하고 괴상한 전설 따위가 대학 내에서 과거 진행했고 여직 진행 중이라면...? 음습하기 그지없을 공포물에 대한 끌림으로 읽기 시작한 김장동의 장편소설 제목은 <대학괴담 大學怪談> 이다.

  기대와 달리, 읽다보니... 어쩌면 간절히(?) 바라마지 않았을 학교괴담과는 영 다른 방향으로 글이 진행된다. 귀신도, 괴수도, 저주나 미스터리한 일련의 사건 등은 일체 없고 교수 위주의 대학 구성원이 벌여내는 난장판 비리 수십여 편이 뷔페의 상차림을 연상케 할 만큼의 정도로 나열된다. 나열되고... 또 나열되는데... 그 끝이 요원할 지경이다.

  대학생이 되려거나 대학생이 된 사람이 대학사회를 직시할 수 있는, 대학생 학부모가 되려거나 된 사람들에게 읽힐 만한, 대학교수가 되려거나 교수로서 대학사회의 실상을 알고 스스로를 자성케 하는 소설이 없을까 라는 고민에서 집필을 시작했고... 대학 강단 30여 년 동안 보고 들었던 소재들을 총 동원해냈다는 작가의 말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비리교수의, 비리교수에 의한, 비리교수를 위한 일종의 사건 모음집과도 같다. 딱 거기까지... 그리고 하나 더

  일단, 모든 내용은 2년제 교육대학에서 초급대학으로 그리고 4년제 국립대학으로 승격한 DN대학을 배경으로 발생한다.

가 교수는, 소주잔을 입에 넣고 깨물어 가루를 낸 다음 교수임용에 도움을 주었음에도 인사 한마디 없던 상대 교수의 안면에 뱉어낸다.
나 교수는, 교수채용으로 돈 벌 궁리 중이었던 학장으로부터 내침을 당해 하루아침에 강의를 그만둔다.
다 교수는, 돌연 망치를 들고 완공한 건물을 부수며 트집을 잡아내는데 뒤늦게 각성한 건축업자들이 양 손 무겁이 교수 공관을 찾는다.
라 교수는, 막장인생이었지만 지역 유지에다 정치권에 손이 닿아있어 인사위원의 교체까지 강행한 학장의 배려 탓에 전임강사로 발령받는다. 
마 교수는, 학위취득을 위해 제자에게 논문 대필을 시킨 것도 모자라, 명예교수로 정년하기 위한 요건을 충족시키기 위한 논문 대필을 재차 부탁한다. 
바 교수는, 술자리에서 남자 제자들에게 구강성교를 지시하고 2차 가기를 밥 먹듯, 그 비용까지 일임하다 문제가 된다.
사 교수는, 연구 실적에 의한 성과급 차등을 역설하더니 같은 논문을 학회에 발표하고 등재지에 중복 게재하거나 이를 묶어 책을 내고, 제목만 바꿔 또 발표하는 등의 편법을 통해 성과급을 독차지한다. 
  이 외에도 수도 없는 교수와 각종 비리들이 등장하니 이를 열거하자면 아 교수, 자 교수, 차 교수... 그 뒤를 이어 A 교수, B 교수... 등등으로 명명해 열거해도 끝내기가 힘들 지경이다. 
괴담(怪談)이 아닌 괴담(愧談)
  괴담(怪談)의 사전적 의미를 보면 기이하고 괴상한 이야기라고 풀이된다. 언급된 사례들은 비현실적이기 보다는 현실에 가깝고, 지금도 어느 곳에선가 진행형일 여지의 성격인데다, 기이하거나 이상하다는 수식이 어색스러울 만큼 주변에서 흔히 마주해낼 수 있는 사건·사고 중 하나다. 더군다나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일상적으로 발각되는(되지 않은) 온갖 비위(非違)에 익숙해져있다 보니 과연 이 정도가 괴담(怪談)의 축에나 들까 싶다. 오히려 기이할 괴(怪) 한 글자를 부끄러울 괴(愧)로 바꾸어 부끄러울 이야기 정도로 풀이하면 어울리지 않으려나?

  그것보다는... 집필의도에서 밝힌 작가의 변이 무척 의아스럽다. 가 교수가 이랬고 나 교수가 저랬고, 다 교수는 이랬는데 라 교수는 이랬다... 는 식의 열거법에만 지독히 충실한 글에서, 읽는 이가 무얼 느껴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심정. 교수라는 지성의 무리들 속에서도 다양한 욕망에 의한 저열한 풍경들을 쉽게 찾아낼 수 있으니 이를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는 교훈...? 대학이란 조직과 그 내부 구성원이 지양해야할 것들을 구체화해 자성의 시간을 가져보자는...?

  사실 이에 대한 생각을 모아보기도 전에, 오히려 더 기이한 건... 곳곳으로 삽입된 작가의 정치적인 견해들이다.
노무현을 따라 자살 하려다 나무에 걸려 미수에 그친 여성을 덜 떨어진 여성이라 한다... 호남의 압도적 지지를 받아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자체가 역사의 오류이고 이후 정부의 좌파사고로 한과 복수의 정치가 판을 쳤다... 노무현은 삼당통합 시 은인인 김영삼을 배신하고 국정운영에서의 승기를 잡아내고자 탄핵을 자초한데다 자살이라는 사상최대의 잔머리를 굴려 가족의 평안과 재산, 지지 세력들의 안위까지 지켜내었으니 통밥 굴리거나 잔머리 돌리기의 달인이다... 서러움과 핍박받던 조중동에서 자살의 배경을 언급하지 않았으니 세상은 정의만이 아닌 부당과 불의가 판을 치는 곳이다... 이명박의 당선은 노무현패거리와 그 일당의 개판정치 탓이다... 노무현처럼 욕이란 욕은 다 얻어먹는 대통령이라도 하려면 운을 타고 나야한다... 등등
  제 친구 대하듯 노무현은 김대중... 운운하는 뜬금없이 노골적인 정치적 소견들을 왜 단락의 곳곳으로 어울리지도 않게 부려 놓았는지 수긍의 여부를 따지기 이전에 문학적인 의도를 이해할 수 없다. 명목은 상황에 대한 부연이겠지만... 일종의 정치적 편견을 그것도 지인들과의 술자리에서나 어울릴 수준의 노골적인 표현들을 써가며 언급하고 있는데다 작가 스스로의 입장이라 빤히 내세우고 있어 일종의 은유라 여기고 넘길 수도 없을 노릇이다.  

  그러니 읽는 도중, 기이하고 괴상하며 심지어 부끄럽기까지한 대상은 슬그머니 방향을 바꾸어 버린다.

  괴담(怪談)도 아닌데다 온통 괴담(愧談)스러울 지경이니 용케 400페이지를 넘게 읽어 낸 내 자신이 대견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