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기억은 사랑이 남긴 상처와 같다 '스탠 바이 미 The Body'

사색거리들/책 | 2011. 2. 21. 13:48 | ㅇiㅇrrㄱi

제일 중요한 일들은 말하기도 제일 어렵다
<스티븐 킹의 사계> 중 세 번째 편에 해당하며 자각의 가을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스탠 바이 미>는 레이 브라워라는 실종소년의 사체를 찾기 위한 소년들의 짧지만, 지울 수 없는 긴 여정이자, 12살에서 13살로 넘어가는 무더웠던 그해 여름과 맞물린 성장의 이야기다. 지금의 베스트셀러 작가 고든 라챈스는 친구들(번과 테디, 크리스)과 함께 했던 이틀간의 여정, 사체 찾기의 기억들을 곱씹어 본다. 제일 중요한 일들은 말하기도 제일 어렵다... 로 시작하는 이 회고록은 이해하며 들어줄 사람이 없어 마음속 비밀로 가둬버린... 하지만 생소해진 고향의 풍경 속에서도 변함없이 흐르는 강과 같이 여전히 존재하는... 고든 라챈스 자신의 삶 일부이자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형의 죽음 이후, 낙심한 부모의 외면 속에 유령 같은 존재로 살아가던 고든, 그리고 나름대로의 절박한 현실 속에 방치된 세 친구는 실종된 레이 브라워라는 소년의 사체가 발견된 장소에 대한 대화를 우연히 엿듣고 첫 발견의 영예(?)를 얻고자 길을 나서는데... 쓰레기장 울타리를 넘으며 어린 날 신화속의 맹견 맷돌을 따돌리고, GS&WM 철도가 캐슬 강을 지르는 교각의 두 줄기 선로를 건너며, 숲속에서 들려오는 흐느낌 소리에 몸서리치는 야영지의 밤을 보내고, 거머리 떼들과의 물질에 울음을 터뜨리는 등의 우여곡절 끝에 목적지에 다다른다.
이제는 훌쩍 커버린 고든 라챈스가 그 시절 친구였던 크리스의 죽음을 전해 듣고 그토록 사랑하는 아내의 곁에서조차 눈물을 흘리지 못했던 건... 계집애처럼 보이기 싫어서가 아니라, 막상 꺼내놓으면 말의 크기만큼 줄어드는 기억의 초라함이 견디기 싫었을 뿐이다. 여전히 생생한 그 시간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미래의 죽음에 대비하기 위해서... 유쾌하지 않았던 기억들과의 본격적인 조우가 이어진다.
소설가가 작품을 쓰는 유일한 이유는 과거를 이해하고 미래의 죽음에 대비하기 위해서예요. 그래서 소설에서는 모든 동사가 '.....했다'로 끝나는 거죠.
두 줄기 선로로 대변되는 그해 여름 이들이 지나버린 이 통로는... 이젠 다시 볼 수 없는 친구들, 그들이 마주할 미래의 죽음과도 이어지는 상징과도 같았다. 심장이 터지도록 앞으로 달음박질 칠 수밖에 없는 성장의 통로이기도 했지만, 목적지에서 맞닥뜨린 사체의 부릅뜬 눈이 암시하듯 그들에게 그림자를 드리우는 죽음의 통로이기도 했던 것이다. 살인의 근처에선 살인의 악취에 물들 수밖에 없듯... 죽음의 현장을 목전에 두게 된 그들에겐... 죽음이 금세 찾아갈 수 있을 번호표가 등 뒤로 붙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스탠 바이 미 : 스티븐 킹의 사계(가을/겨울)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 영미소설일반
지은이 스티븐 킹 (황금가지, 2010년)
상세보기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하지 않고, 안하고, 못하고, 해서도 안 되고, 하려고 하지도 않고, 하려고 해도 못하는' 레이 브라워라는 아이의 사체를 발견한 그들에겐 크리스의 형을 포함한 다른 일행과의 혈투가 남아있었지만, 지독한 후환을 감수하고라도 지켜내야 할 명분이 있었다. 뚜렷한 이유도, 그 이유를 반추할 필요도 없었다. 지난 이틀간 거룩한 의식처럼 먼 길을 통과해 다다랐던 어린 소년들이 그해 여름 가진 단 하나의 목적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처음 마주한 죽음이었기 때문에...? 아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맹목성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으려나...?
사랑은 이빨을 가지고 있다. 그 이빨로 물어뜯는다. 그렇게 생긴 상처는 영원히 아물지 않는다. 사랑의 상처는 어떤 말로도, 어떤 말들의 조합으로도 아물게 할 수 없다.
기억의 끝 장면... 고든이 돌아가는 크리스의 뒷모습에 아무 말도 던져내지 못했던 건 마음속에 깃든 그 당시의 심정이... 어린 시절의 친구에 대한 사랑 또는 같이 했던 시간에 대한 사랑... 어쩌면 언젠가 그 유대라는 게 결국엔 비극적으로 파괴될 것임을 예감했기 때문이었을 테다. 이제 현실의 고든에게 12살 그해 여름의 친구들은 지워져가지만 용케 상처내지 않은 기억일 뿐이었다.

하지만 과거의 기억은 그저 지나버렸기에 그래서 흐릿해진 글씨 자국마냥 소홀히 지나칠만한 게 아니다. 상처 낼까 두려워 가만히 방치하다 결국 망각해버릴 대상은 더더욱 아니다. 이빨로 물어 뜯겨 영원히 아물지 않을 상처를 남긴다 해도 분명 돌이켜야할 필요라는 게 있기 마련이다. 그 기억과 마주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일...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일은... 어느 가을날,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애처롭게 자신의 존재를 되새기고 지금의 나를 자각케 하는 과정일 수도 있기 때문이 아닐까...?

영화 '스탠 바이 미'

누구나 미로 하나쯤을 갖고 있다. 이미 다 돌아 나와 앞으로 걸어가는 듯해도 내 일부는 출구 없는 미로에 갇혀버린 듯 제자리만 맴돌게 되는... 그런 시간과 그런 공간에 갇혀 있는 꼴이 반복된다. 지금 내가 걷는 이 길을 가늠하거나... 어디로 가야할지 고개를 들고 둘러보려면... 설령 빠져나오진 못하더라도 왜 그런 곳에 갇혀 버렸는지 그리고 지체되고 있는 내 일부가 무언지를 돌아봐야할 때가 분명 있다.
 
그러나 종종... 내가 여전히 빠져나오지 못했음을... 뺑뺑이만 돌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경우가 많다. 울컥 짜증이 날 테다. 나를 자각하는 건 가능할지 몰라도, 나를 인정하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탓이다. 자각의 가을, 고든이 눈물 흘리게 된 연유이기도 하다.

참고로, <스탠 바이 미>에는 주인공 고든의 초기作 두 편이 실려 있다. <가식의 도시>와 <뚱보 호건의 복수>인데, 소설 속에서 또 다른 소설을 대하는 낯선 재미도 있겠지만, 이 단편들이 갖는 나름대로의 재미란 것도 대단한 편으로, 특히 <뚱보 호건의 복수>는 그야말로 사람을 미치게(?) 한다. 지하철 문가에서 꺽꺽거리며 웃음을 참느라 고생했던 당황스러운 경험을 떠올려보면, 지금도 식은땀이 날 지경... 그야말로 웃음을 토할 지경이라 하면 적당한 표현인가...?


※ <스탠 바이 미 The Body>는 영화 <스탠 바이 미 Stand by Me>의 원작입니다.
※ 본문 중 사용된 이미지의 저작권은 NAVER 영화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