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情死)와 정사(情事)의 차이. '김치 애국주의'

사색거리들/책 | 2010. 11. 29. 19:01 | ㅇiㅇrrㄱi

사실... 일본이 싫다. 일본인도 싫다. 생김새며 하는 말이며,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행태며 그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싫다. 행여나 이런 반일감정을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스포츠 경기라도 있을라치면 나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긴장감에 '극일의 함성'을 드높이곤 한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상념... 왜 이렇게 저들이 저나라가 싫을까. 독도문제, 동해표기문제 등을 비롯한 일부 정치인사나 극우단체들의 망언 때문에? 위안부 문제나 강제노역, 일제 강점기 등에 대한 역사적인 피해의식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지만, 반일감정의 크기를 가늠해보면 직접적인 원인으로 열거하기엔 부족해 보인다. 또 다른 이유가 있으려나...? 
 
김치 애국주의 : 언론의 이유없는 반일
카테고리 정치/사회 > 언론/신문/방송 > 언론일반 > 언론일반서
지은이 최석영 (인물과사상사,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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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 애국주의>에서는 정치적·사회적 의도에 의해 검증되지 않은 보도를 생산해내는 국내언론의 보도행태가 적지 않은 원인이 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2004년 3월 24일 <日, 아들 성폭행하려 한 어머니 시신으로 발견>이란 뉴스가 보도된다.
정신지체아들과 성관계를 가지려다 실패한 친어머니의 엽기적인 범행이니만큼 큰 이슈가 될 것임은 명확한 상황이었겠다. 경찰은 집에서 유서를 발견했고 '아들을 사랑해 관계를 하고 싶어 했지만, 아들이 이를 거부해 살해하고 나도 죽겠다'는 내용... 모자간의 치정 관계로 인한 살인 여부를 조사 중... 주변 사람들에 따르면 아들은 심한 정신지체 증상이 있었던 것으로... 정신지체아들과 억지로 성관계를 가지려다 이를 거부당하자 화가 난 어머니가 아들을 숨지게 한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다. <노컷뉴스 2004년 3월 24일자>
인터넷 매체를 통한 일본의 이 엽기적인 사건소식을 대하는 한국 네티즌들의 반응은 굳이 본문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뻔했을 테다. 근친상간, 살인, 자살 중 하나의 키워드만으로도 집단적 분노를 불러일으켰을 진데, 이 엽기행각이 이웃나라 일본에의 일이라니... 반윤리적 행위에 대한 비난 그리고 이와 결합된 반일정서는 엄청난 시너지효과를 일으키며 댓글란에 흐르고 흘러내렸을테니 말이다.

그런데 이 기사의 원문은...?
장남이 쓰러져 있다는 신고를 받은 경찰은 현장에 출동하여 장남을 병원으로 옮겼으나 이미 사망한 상태... 현장에서 1.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불에 탄 승용차 안에는 자살한 것으로 보이는 장남의 모친이 숨져 있었다. 모친의 유서에는 ‘아들을 사랑한다. 아들도 죽고 나도 죽겠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장애가 있는 아들을 죽이고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요미우리신문 2004년 3월 22일자>
물론, 자식과의 동반자살을 꾀한 비정한 모정이 변호받을 일은 아니지만, 요미우리 신문의 원문과 노컷뉴스의 인용기사는 어마어마한 간극을 보인다. 바로, 어머니가 아들과의 억지 성관계를 시도했다는 부분인데, 이런 어마어마한 오역의 원인은 이렇다.

원문에 사용된 무리신주(無理心中)라는 단어는 어린이, 노인, 환자 등 힘이 없는 사람과 자살하는 동반자살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한사전에서의 풀이에서는 강제정사(情死)로 풀이된다. 여기서 정사(情死)동반자살을 의미하는 단어로 국내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 말이다. 하지만 동음이의어인 정사(情事)성관계를 의미한다.

이 한 단어에 대한 오역으로 원문의 내용이 한층 엽기적인 사건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정정보도나 해명보도 없이 슬그머니 사라져버린 이 해프닝(?)이 발생한 원인에는 검증을 통해 기사의 정확성을 담보하기 보다는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문구로 자사의 게시물 클릭수를 늘려야 하는 인터넷 언론매체의 태생적인 한계 탓일 수도, 이슈 한번 만들고 보자는 무책임한 기자정신의 발로이거나 단순한 실수 일 수도 있을테지만, <김치 애국주의>는 이의 심각성을, 자국민의 반일정서에 기반을 둔 무책임한 보도가 대부분의 언론매체에서 반복생산된다는 점에서 뒤돌아보고 있다.

우리가 일본에 대해 갖고 있는 악감정의 많은 부분이, 일본쪽의 잘못에 의한 자발적인 애국심의 발로 내지 정당한 비판 등과 같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기 보다는 국내 언론의 포뮬리즘적 행태에 의해 부지불식간 몸체를 키워왔던 기형적 현상일 수도 있음을 유의해야한다는 것이다.

일본프로야구 최고의 에이스인 마쓰자카는 이승엽이 두렵지 않다고 말해 국내 프로야구팬 뿐만 아니라 이승엽의 성공을 기원하는 많은 사람들을 도발했고, 일본의 극우신문 산케이는, 한국의 낮은 국민성 탓에 신종플루 감염자 파악이 안 되는 것이라 보도한다. 일본의 방송프로그램을 차용한 국내 프로그램은 언론과 시청자들로부터 두고두고 욕을 먹고, 우리의 막걸리 상표권을 일본기업이 선점했다는 기사가 공분을 불러일으킨다. 김희로씨는 차별철폐를 위한 민족적 긍지 하나만으로 야쿠자를 살인하고, 남대문이 전소된 후 일본관광객들이 그 앞에서 웃으며 촬영한 사진이 보도된다. 황우석사태에 대해 일본언론들은 그것보라는 비아냥을 숨기지 않고, 동해와 독도표기를 바로잡기 위한 대학도서관 습격사건이 민족의 혼을 계승하는 운동으로 전개된다. 허술한 보건의료제도 탓에 일본이 결핵후진국이라는 지적이 보도되고, 민족의 정기를 끊어내기 위해 일제가 곳곳에 박아놓은 쇠말뚝 이야기는 여전히 여러언론을 통해 기사화되곤 한다.

어디까지 사실이고, 만약 사실이 아니라면 어떤 의도로 거짓 보도가 남발되고 있는 것인가. <김치 애국주의>에서는 이와 관련된 여러 가지 예를 오역과 오류, 피해자 만들기, 침묵하거나 분노 만들기, 편견이나 증오의 확산, 도시전설의 맹신 등으로 구분해 반일보도의 형태를 분석하고 있다.

전 국가적으로 형성된 반일정서의 형성엔 국내 언론보도의 잘못된 행태가 한몫 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일본의 잘못을 비판하는 것이 나쁜 게 아니라 왜곡된 보도에 자극되어 증오를 키우는 현재의 행태는 반드시 극복되어야 할 과제임을 역설한다.

<김치 애국주의>는 일본이 매사 잘했다고 편드는 책이 아니며 더군다나 비판의 대상이 조·중·동으로 대변되는 국내의 보수언론매체로 제한되지도 않는다. 그 누구도 지적하지 않는 지적할 필요 없어하는 부분이지만,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을 막연한 반일정서의 근저엔 언론에서 저지르고 있는 과오가 깊이 관여되어있음을 일본 관련 기사의 낱낱을 통해 돌아보자는 것이다.

또한 언론의 자성과 함께, 이런 언론보도의 이면을 바로 볼 수 있는 매의 눈을 갖기를 독자들에게 촉구하고 있다.

한국의 반일정서 하나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진 않지만, 본문 중의 인용글엔 언론이나 독자 양편에게 각성을 요한다는 위 내용이 잘 담겨있다.
오보를 100퍼센트 없애기란 불가능하다. 어느 정도의 오보가 발생하는 것은 그 나라의 저널리즘이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오보를 냈다면 나중에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사죄'다.
싫다! 싫어! 에 막연히 휩쓸리기 보다는... 언론이든 내 자신이든... 찬찬히 돌아볼 수 있는 차분함이란게 중한 시절이다...


교묘하게 짜집기된 상상력 '퀴르발 남작의 성'

사색거리들/책 | 2010. 11. 24. 15:01 | ㅇiㅇrrㄱi

읽어야할 책들은 나날이 쌓여만 가는 와중, 시선을 잡아끄는 표지를 발견해 낸다. 도서관 책인 관계로 외부를 장식하고 있었을 표지가 아닌 속표지만을 보게 됐는데, 도축장에서나 볼 수 있을 갈고리 3개에 누군가의 팔 하나 그리고 몸통으로 추정되는 덩어리(?)가 절단면의 선홍빛 육질이 보이는 방향으로 짙은 시체 빛을 띤 채로 꿰어져 있는 기괴한 장면이다. 그로테스크한 내 취향을 극단적으로 자극하는 이 작품은 도대체 무엇이냐...? 기대 섞인 호기심에 책을 들춰 페이지 사이를 건너뛰다 보니 퀴르발 남작, 셜록 홈즈, 마녀, 프랑켄슈타인 내지 정상적인 누군가의 이름, 톰과 제리 등 전혀 조합되지 않을 단어들이 뒤섞여 있다. 뭐 하는 이가 써내려간 글이냐 싶은 자연스러운 호기심에 이끌린다. 2007년 제7회 문학과사회 소설부문 신인문학상 수상으로 등단한 최제훈이란 작가란다.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와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서울에 살고 있다는 동갑내기 되시겠다. 30대 후반의 나이에 등단했으니 늦깎이 작가인데, 문예창작으로 전공분야를 달리해 뒤늦은 학구열을 불태웠을 테니 창작에 대한 열정과 자신이란게 남다를 것임은 머리 굴리지 않아도 쉽게 짐작해 낼 수 있다.

책을 덮고 나니, 그간의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낮은 조도의 백열등 아래 모여 아비규환 생 난리판을 벌이고 있으려니 싶다. 의문의 시체조각을 그러모아 놓고는 시체의 정체가 무엇이냐, 범인이 누구냐 서로 드잡이중이거나 각자 특성에 맞게 미쳐 날뛰는 중이니...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이름모를 창작물이 뒤뚱거리며 주변을 배회하고, 마녀들이 빗자루를 타고 좁은 공간 안에서의 무리한 비행 중 퉁퉁 튕겨 나가거나, 살인범으로 소환되었던 정신병자 강철수인지는 예의 멍키스패너를 휘두르며 발악 중이고, 그나마 정상적으로 보이는 이들까지 머리끄덩이를 잡고 뒹굴러 다니는 중, 셜록 홈즈와 주신 디오니소스가 멱살잡이와 권투놀이에 한창이거나...

그러다 책을 다시 여는 순간 퀴르발 남작이 소리친다. '각자 위치로, 누군가 책장을 연다!' 라고... 표지의 기괴한 일러에서 느껴지는 익살스러움이 여운으로 때론 강한 설득력으로 멤돌게 된다. 
 
퀴르발 남작의 성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한국소설일반
지은이 최제훈 (문학과지성사,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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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집 <퀴르발 남작의 성>은 널뛰는 듯한 분위기 어찌 보면 도대체가 종잡을 수 없는 상상속 여행담과 같다. 표제작이자 최제훈의 신인문학상 당선작인 <퀴르발 남작의 성> 외 7개 단편의 전반적인 분위기라는 게 그렇듯 기괴하면서도 흥미롭다.

200년이나 넘게 어린아이들을 잡아먹으며 젊음을 유지했다는 거인 남작의 동화에서부터 시작하는 <퀴르발 남작의 성>에서는 여러 방식의 이야기들이 시공간을 무시한채 짜깁기되어 한편의 이야기로 완성된다. 1993년 대한민국 서울의 K대학교에서는 학점으로 복수하겠다며 재치 있게 으르렁대는 백정인 강사의 '영화속의 여성들' 수업이 진행되고, 1932년 미국 뉴욕의 미셸 페로라는 원작자와 출판사 편집장간의 대화가 등장하거나 , 2004년 일본의 동경에서는 이 원작영화를 리메이크하려는 일본인 감독의 인터뷰가, 1952년 미국 마이애미에서는 원작을 영화화하기 위한 제작자와 배우들의 일화가 급하게 끼어드는 식인데... 마지막 남작의 성으로 향하는 르블랑 부부 일가의 발걸음이 안타깝기까지 할 정도로, 작가가 들이대는 여러 정황들에는 현실적인 통일감이 뚝뚝 흘러내린다.

<셜록 홈즈의 숨겨진 사건>에서는 시골에서 무료하게 요양중이던 홈즈가 맡게 되는 살인사건이 유명한 추리소설작가이자 의사인 코넌 도일의 죽음과 관련된 것이라는 우스꽝스러운 설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홈즈를 다시 살려내라는 독자들의 집단적인 '세레라자데 콤플렉스'앞에서 실존적 자아를 찾기 위한 코넌 도일경의 비극이 안타깝게 묘사되고 있다. 밀실트릭의 해법 앞에 놓인 창조주의 고뇌라... 코넌 도일의 겪었을지 모를 딜레마가 우스꽝스러운 형태로 작품 전체에 흘러내리게 된다.

이어지는 <그녀의 매듭>에서는 선택한 삶과 선택하지 않은 삶의 공존이란 다소 무거운 주제를 부분기억상실에 시달리는 차화연이란 한 여성의 이중성을 통해 풀어내고 있다. '그때, 나는 어떻게 했을까?' 라는 반복되는 질문 앞뒤로 교차되는 과거·현재가 묘한 방식으로 답을 내놓고는 있지만 내가 선택한 것과 선택하지 않은 것의 차이는 지워진 기억만큼이나 모호하기만 해, 자아에 대한 끔찍스러운 질문으로 회귀한다. <그림자 박제>에서는 가상의 인물을 통해 역할극에 몰입하던 한 남자의 정신분열 과정과 파국이 무겁지 않은 분위기로 그려지는데 그림자처럼 어두운 빛을 하고 있는 내 자신의 단면 돌아보기는 결국 상처받거나 결여된 자아 또한 내 자신의 또 다른 일부로 박제되어 감춰져 있는 건 아닐까라는 의문으로 돌아오게 된다.

<마녀의 스테레오 타입에 대한 고찰>은 15세기부터 18세기 유럽 전역을 휩쓸었던 마녀사냥의 광풍과 그로부터 기인했을 마녀에 대한 스테레오타입 형성과정의 전면적인 재해석이다. 월간 마녀 스타킹 2007년 12월호에 수록되었다는(물론 허구) 이 일종의 보고서는 마법의 여신인 헤카테를 비롯해 주신(酒神) 디오니소스, 심지어 오즈의 마법사에 107년째 출연중이라는 서쪽 마녀의 인터뷰 등과 작성자(?)의 분석이 교차 수록되며 각각의 사건과 신화에 대한 재해석을 단행한다. <마리아, 그런데 말이야> 다시 내가 누구냐 라는 질문의 반복이다. 우연히 만난 여자 후배가 늘 언급하는 마리아라는 의문의 인물은 어느 순간 실존인물이 아닌 내가 감추고픈 아니면 내가 지향하는 결국 내 자신일 수 있는 대상에 다름 아니다. <괴물을 위한 변명>은 메리 셀리의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재해석이다. 괴수의 대명사가 된 프랑켄슈타인이 실제로는 무명의 존재였다는 사실에서부터, 원작자 메리 셀리 여사와의 전화통화, 결국 괴물은 성적 정체성의 혼돈 속에서 내면의 자아를 뒤틀린 형태로 표출했던 박사 자신의 초상이었다는 허구가 교차된다.

다시... 책을 덮고 나니, 등장인물들의 악다구니가 책 틈 사이로 생생하게 새어나오는 듯 하다. 

최제훈이란 작가의 첫 단편집 <퀴르발 남작의 성>이 갖는 미덕 중 하나는 재미다. 문학작품 내지 신화, 조작된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 태반이 허구다. 허구의 대상으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듣거나 그 자체를 뒤엎어 말 그대로 난장을 만들어버리는 구성의 신선함과 더불어 적절하게 배치된 유머는 읽기의 지루함을 덜어준다.

그렇다고 단순한 말장난으로 치부할 수 없는 건... 건드려지는 신화, 문학작품 내지 현실 등에 대한 해박한 지식 때문일 것이다. 많이 알고 있다는 것에 대한 과시는 작품 전체의 분위기와 전혀 겉돌 생각 없이 각 문장에 녹아들어 있는 듯 적절하다. 때문에 고전에 대해 재해석을 내리고 있는 몇몇 수록작품들은 전혀 허투루지 않은 논리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거짓말인걸 뻔히 알면서도 사실일 성 여기게 되는 현실감의 힘이란게 있다. 여기에, 최제훈은 그저 망가뜨리고 분해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또 다른 무언가를 완성해낸 듯 보인다. 가벼워보이는 듯한 외양과 달리 그 안에서는 자아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거나, 오로지 인간만이 보이는 집단적 공포와 광기를 반추하고, 제도를 비아냥거리는 묵직함이 진득하다. 

자신만의 완성품을 위해 그 숱한 것들을 비틀고, 변형하고 속칭 손바닥위에서 갖고 놀 듯 건드리다가 다른 무언가로 뚝딱 완성해내는 작가의 기교가 상당히 매력적인... 이런 사람이 신인작가라니... 도대체 어디 숨어 있었던 거지...? 그의 첫 장편이 기대된다.


알록달록 이야기 모음. '지하도의 비'

사색거리들/책 | 2010. 11. 16. 07:00 | ㅇiㅇrrㄱi

미야베 미유키. 미미 여사님이라는 친근한 호칭으로 불리울 만큼 국내에서도 인기 높은 일본의 대중소설 작가. 일본작가 중 제일 유명인이라 하면 무라카리 류와 함께 흔히 언급되는 그런 그녀가 개인적으로는 이름만 알고 있는 작가류로 분류될 뿐이니... 그렇다. 단 한 번도 그녀의 작품을 접해본 적이 없다. 굳이 이유를 열거하자면야, 국내의 척박한 출판업계를 주도하는 일본문학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 운운하던 태곳적 논란거리가 여즉 귀에 담겨 있을 수도, 다작하는 작가의 열정 앞에서 어느 것부터 손을 대야할지 모르겠다는 혼란 때문일 수도... 아니면 베스트셀러에 대한 집단적 관심의 대열에서 슬쩍 비켜나고 싶어하는 괴팍한 기호 탓일런지도 모르겠다. 

지하도의 비
카테고리 소설 > 일본소설 > 공포/추리소설
지은이 미야베 미유키 (북스피어,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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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도의 비>는 미야베 미유키의 단편집으로, 도서관에 계신 상사분(비슷한 책 읽기 취향을 가지신)이 무조건적인 읽기를 강요하신데다, 재미가 없다면 근사한 식사대접(?)을 제공하겠다는 회유에 이끌려 접하게 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공짜 식사는 포기해야할 것 같다.

엄청 슬프기도, 살짝 무섭기도, 그리고 우습기도 하다... <지하도의 비>
사내 동료와의 파혼으로 회사를 그만 둔 아사코는 지하상가 카페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며 엇나간 인생을 괴로워한다. 카페 단골 손님인 요코라는 여성과의 대화를 통해 배신으로 인해 밑바닥으로 추락한 삶에 대한 동병상련의 고통을 나누게 되는데, 어느날 파혼한 남자친구의 친구였던 아쓰시와 우연히 재회하게 된다. 아쓰시에 대해 집착을 보이기 시작한 요코. 아사코는 요코가 자신에게 들러주었던 과거의 상처가 모두 날조되었음을 알게 되는데...

심장이 쿵쾅거리는 이상한 꿈을 꾸다... <결코 보이지 않는다>
에쓰로는 늦은 귀가길 정류장에서 택시를 기다릴 때마다 자신 뒤에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늘 신경이 쓰인다. 인적이 드문 동네였기에 뒤에 남겨진 이가 한참이야 택시를 기다려야할게 뻔하기 때문인데 언젠가는 젊은 여성과 합승을 한 일로 와이프에게 된통 혼나기까지 했다. 어느 늦은 밤, 택시는 몇 십분째 나타나질 않고 뒤에 있던 나이든 남성의 건의로 집까지 걷기로 한다. 나는 운이 나빴다라는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으며 그는 자신이 겪었다는 기묘한 이야기를 에쓰로에게 들려준다. 조용한 밤의 적막에 갇혀버린 두 남자가 그렇게 길을 걷는다.

왜 죽었을까...? <불문율>
일가족 네 명이 차에 탄 채로 바닷속으로 돌진 해, 모두 목숨을 잃는다. 자살로 추정되는 가타세 미쓰오 일가의 죽음의 뒷 이야기들이, 옆집 이웃과 회사동료와 부하직원, 친구, 부모와 친척들, 교통과 사고담당 직원과 담당의, 죽은 자녀의 학교담임 및 동급생 등의 입을 통해 전해진다. 디즈니랜드에 놀러가는 중이었던 행복한 가정의 실체, 도대체 그들은 왜 죽었을까...?

새벽 두시 반에 걸려온 장난 전화... <혼선>
새벽 두시 반, 그 시간이면 여동생에겐 늘 장난전화가 걸려온다. 오빠가 대신 전화를 받아보지만 상대는 전화를 끊어버린다. 다시 걸려온 전화. 맨정신으로 보이는 상대는 오빠를 바꾸지 말라며, 중간에 말을 끊지 말라며, 전화는 계속될 것이라며 폭언을 퍼붇는다. 다시 한번 상대와 대화를 시도하는 오빠. 역탐지로 발신자의 번호는 이미 알고 있음을 밝히고, 친구의 이야기를, 대학시절 장난전화에 유난히 집착했던 다케시를 친구로 둔 유지가 겪었다는 기묘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오빠의 긴 이야기가 이어진다.

죽음 앞에서 발견한 멋진 승리... <영원한 승리>
조카인 히로미는 가쓰코 이모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중학교 선생님을 거쳐 교감으로 재직중이었던 이모는 외가식구들 중에서 가장 똑똑했고 성공한 캐리어 우먼이었다. 고별식 전날 밤샘에 참석한 외가식구들은 평생 독신으로 지내며 번번히 연애도 하지 못했을 이모의 건조한 삶에 대해 시기심 섞인 비난을 쏟아놓기 시작하는데... 히로미는 이모의 집에서 이미 개봉된 오래된 편지 한통을 발견해 읽던 중 놀라운 비밀이 감춰져 있음을 알게 된다.

내 안에 살고 있는 연쇄살인마의 초상... <무쿠로바라>
집에서도 반장이란 호칭으로 불리우는 형사반장은 하시바의 방문이 늘 당황스럽다. 하시바는 무쿠로바라라는 성을 가진 각성제 중독자의 습격에 맞서다 엉겹결에 그를 죽이고 정당방위로 풀려나긴 했지만 살인범이라는 낙인 탓에 가정도 일도 본인의 정신상태도 놓아버린 가여운 인물이다. 하시바는 살인사건의 기사를 스크랩해와서는 무쿠로바라가 아직 연쇄살인을 벌이고 있다며 그를 서둘러 체포해달라는 이상한 말을 늘어놓곤 한다. 하시바의 방문이 거듭될 수록 반장은 이상한 분노에 휩싸이게 되는데...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안녕, 기리하라 씨>
소란스러운 우리 집. 집안에서 어우러지는 다섯 명의 목소리는 늘 귀가 따가울 정도다. 어느 날, 늦은 회식 뒤에 귀가한 집안에선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물 떨어지는 소리도, 한숨 소리도, 일부러 낸 소리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다음 날 아침 모든 것이 정상으로 되돌아왔음을 느낀 미치코는 술기운 탓에 일시적 난청을 경험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결국엔 집안에서 소리가 사라지는 현상을 가족 모두가 겪게 된다. 소리는 집 안에서만 들리지 않는 것이다. 당황해하는 그들 앞에 기리하라라는 의문의 남자가 나타난다.

...

총 7편의 단편들은 다양한 장르를 분주히도 넘나드는 듯 보인다. 표제작인 <지하도의 비>를 보면, 줄곧 내려도 눈치채지 못하다가 결국 온몸을 적시는 지하도의 비와 같은 배신의 아픔에 시달리는 두 여성의 한탄이 교차하며 일종의 실연극복담인가 싶었다가, 이상한 광기를 흘리는 요코의 집착에서는 미스테리·스릴러의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붉은 동백문양의 넥타이 앞에서 재회한 두 여인의 사연을 접하다보면 웃어야 되는건가 울어야 되는건가 모르겠다는 주인공 아사코의 심정이 복잡하게 엉겨드는 진한 여운까지 느끼게 되는 것이다. 

'호러, SF, 스릴러까지의 다채로운 빛' 운운하는 소개문구와 함께 요상하게 채택된 표지 탓인지, 그저 기괴한 이야기일 거야! 공포물이구나! 라는 선입견을 강하게 갖게 되는데,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을 <혼선>편만 제외하자면, 나머지 이야기들은 다양한 분위기를 슬쩍 비추다가는 우리 살아가는 일상사로 용케 제자리를 찾아가고 적어도 휴~ 가슴을 쓸어내리고 별탈 없이 끝났음에 안도할 수 있는 평안함을 기본으로 제공하니 굳이 장르로 구분짓자면 드라마(Drama) 정도라 해도 되지 않을까?

장르작가의 기본으로는... 기발한 발상, 그러니까 독자들이 우와~ 할만한 것들을 제시하는데 있어 눈에 띄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거나 가다듬는 걸 언급하곤 하지만, 이런 재기(才氣)만으로는 작가로서의 생명력을 보전 받진 못할 것이다. 몇몇 유명 일본작가의 책을 접하다보면 이런 식의 기발한 아이디어 특히 신선한 전개과정, 트릭 내지 뒤틀림 등을 통해 작품의 특성을 갖춰 나가는 경우들을 쉽게 접하게 된다. 물론, 재미는 있다. 다만 '재미있다' 외에 뭔가 여운이 남는... 다 읽고 났더니 마음 한구석에 이상한 찌꺼기들이 투둑투둑 놓여있어 작가도 작품도 다시 흘끔거리게 하는 식의 묘한 매혹이 일어나지 않는 점이 아쉽게 된다. '재미 외' 또는 '재미와 동반된' 이런 여운은 인간을 바라보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지켜보는 작가의 시선이란게 얄팍하지 않은 어떤 무게감을 띄고 있을 때, 그리고 독자가 이를 부분부분에서 알아차리게 될때에나 자연스럽게 묻어나오는 꽤나 어려운 과제일텐데...

처음 접하는 미미 여사님... 사실 주변에서는 <모방범> 말고는 별로 재미없다, 권하고 싶지 않다 등등의 실망감의 표현도 적지 않았기에 기대반 덤덤함 반으로 접하게 되었지만. 그녀의 글에 베어있는 묘한 맛깔스러움속엔 재기발랄한 재미도, 여운도 충분히 넘쳐 흐른다. 여기에 SF적 요소까지 우리의 일상사로 내지르는 신통한 상상력이 가미되어 있으니... 다른 작품의 기복에 대한 걱정은 슬쩍 접어놓는다.
계속 지하에 있으면 비가 내려도, 줄곧 내려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지? 그런데 어느 순간 별생각 없이 옆 사람을 보니 젖은 우산을 들었어. 아. 비가 내리는구나. 그때 비로소 알지. 그러기 전까지 지상은 당연히 화창하리라고 굳게 믿었던 거야. 내 머리 위에 비가 내릴 리가 없다고. 배신당할 때의 기분이랑 참 비슷해...
<지하도의 비>편에서 아사코와 요코가 배신에 대해 대화를 나누며 등장하는 대목이다. 배신의 의미를 이리 어렵지 않게, 직관적으로 풀어내려가면서도 왠지 내가 배신당했을 때도 그런 기분이었어 싶은 묘한 여운까지 유발시킬 수 있는... 그런 작가라면...

공짜 식사 한끼는 안 먹어도 충분하지 싶다.

그와의 두번째 만남 '코로나도 Coronado'

사색거리들/책 | 2010. 11. 13. 07:00 | ㅇiㅇrrㄱi

지하철의 낯선 여성분의 중얼거림속에서 만났던 데니스 루헤인(2010/10/13 - [사색거리들/책] - 슬픈 살인자들. '살인자들의 섬 Shutter Island') 그와의 두번째 만남은 <코로나도>라는 낯선 서명을 통해 이루어진다. <살인자들의 섬>에서는 반전에 의한 여운, 뒤통수를 얻어맞는 것 같은 극적전환에서 얻게 되는 쾌감보다는, 테디와 그의 아내 돌로레스간의 감춰진 사연으로 인한 슬픔의 여운이 컸던게 사실이고 그래서인가 세 아이와 아내를 읽은 한 남자의 고통스러움, 외로움 같은 것들이 격하게 와닿게 된다. 그러니 데니스 루헤인이란 작가는 심리극에 치중된 스릴러를 잘 쓰는 작가라고, 왠지 누구네가 겪곤 하는 지독한 외로움이니 슬픔이니 하는 것들을 스릴러란 장르의 틀 속에서 잘 그려내는 작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코로나도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 공포/추리소설
지은이 데니스 루헤인 (황금가지,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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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도>는 그의 단편집으로, <들개사냥>, <ICU>, <코퍼스 가는 길>, <독버섯>, <그웬을 만나기 전> 총 5편의 단편과 <코로나도> 라는 1편의 희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코로나도>는 여기에 실린 <그웬을 만나기 전>이란 작품을 뉴욕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하는 형 게리를 위해 각색한 것으로 당연히 동일한 내용이며, 분량상 더 길고 세밀해야할 희곡인만큼, 원작에서 생략되었거나 간단히 묘사되고 마는 부분들에 좀더 살이 붙게 된다. 

읽는 내내 왠지 영화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살인자들의 섬>을 영화화한 <셔터아일랜드>를 보자면, 테디 본인 자신이 겪은 생생한 전쟁의 상흔에 대한 묘사가 여럿인데, 세계대전 참전 당시의 수용소 진입, 죽여주길 바라는 수용소 소장을 고통속에 방치하거나, 순순히 투항한 독일병사에 대한 집단 학살이나 수용소에 버려진 시민들의 처참한 시체 등의 묘사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한다. 원작에서 집중하게 된 부분이 테디의 잊혀진 가족사인만큼 전쟁씬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중이 적은 듯 싶어 원작에 대한 일종의 훼손이지 싶은 불만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 <코로나도>에 수록된 첫 단편 <들개사냥>에서 중요하게 묘사되는... '월남전에서의 참극을 떠올리고 그에 시달리는 엘진이란 인물'을 따라가다보면, 어쩌면 데니스 루헤인이란 작가가 말하고픈건 지극히 개인적인 비극사에 그치는게 아니라, 전쟁이든 사회적인 집단 따돌림에 의한 소외이든 사회적인·현실적인 문제들에 대한 고찰이 아닐까... 라는 의문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작가의 약력소개 첫 문구. 반전 운동가...라는 대목에 이르게 되면, 스릴러라는 장르의 틀을 빌리기야 하지만 결국 그가 말하고자 하는 건, 경쾌한 속도감 내지 반전의 묘미 아니면 가벼운 즐거움이란 외형을 하고 있을 지언정 자신이 속한 사회내의 여러 문제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일 수도 있겠다는데 수긍하게 되는데... 표지에서 갖게 되는 첫느낌처럼, 정체모를 안개속에 갇혀 정처없이 휘휘 젖고 있는 양 손의 먹먹함이란게 수록작품 모두에서 느껴진다. 일종의 광기속에 살아가는 등장인물들 모두는 처참한 전쟁속의 생손자이거나, 막장 인생을 살아가는 하류(?) 계층이거나, 불륜 내지 살인의 틀 속에서 태어나고 연이 닿거나, 단 한번 찾아온 사랑을 구덩이속에 방치할 수 밖에 없었기에 삽날을 거칠게 휘두르게 되는 외로운 인생들이다.

극단적인 폭력과 애증의 칼날 위를 위태롭게 배회하던 그들의 삶이 마음 한켠을 묵직하게 하면서도 결코 과장되지 않는 현실감으로 느껴지는 건 <코로나도>가 데니스 루헤인에게 갖게 되는 스릴러 작가라는 선입견에서가 아니라 본격 문학 작가로서의 출중한 기예를 담고 있다는 각성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살인자들의 섬>에서 느끼게 되는 참담함의 연속이기야 하지만, 기발한 구상의 부산물로 얻어내는게 아니라 이 문제많은 사회란 놈을 발 아래 굳게 딛고 살아가는 인간들을 그려낼 줄 알고, 그들 중 어떤 부류가 갖게 되는 비극적인 삶과 그 안에 베어 있는 무엇가를 알아내기 위해 좀더 깊은 시선을 던질 줄 아는 진중한 작가...

지하철이 아닌 서가 사이에서 만나게 된 데니스 루헤인이란 작가의 두번째 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