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근한 두려움의 아쉬움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 4'

사색거리들/책 | 2010. 12. 21. 13:56 | ㅇiㅇrrㄱi

의도하지 않은? 의도한? 외도성 책읽기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반드시 읽겠다고 모아놓은 책 무더기에 눈길이 가지 않는다. 공포, 두려움 그리고 긴박함 정도로 요약될 수 있는 장르소설들이 불량해 보이는 기울기로 겹쳐 서서는 어이 도대체 왜 그러는데? 퉁퉁거리는 듯 머릿속이 소란스럽다. 왠지 모를 책임감과 안타까움에 잠시 둘러보다가는 슬그머니 다른 방향으로 손길을 내밀고는 도망치듯 길을 나서는 건...

날이 추워서일까? 추워서 몸이 오돌오돌 거리는데 마음 한켠에라도 뜨뜻한 자연발화 난로 하나 넣어 다니자 싶은 심정이려나... 그래도 오랜만의 은근한 조바심, 공포나 두려움의 어둔 구석을 더듬고픈 욕망 같은 건 여전할 테다, 단지 날씨탓으로 미루어두었던... 죽음 빛, 핏 빛이 교차하는 표지로... 그것도 두툼해 보이는 책 한권을 오랜만에 골라낸다. 그리곤 순식간에 읽어버린다.
 
한국공포문학단편선.4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공포/추리소설
지은이 이종호 (황금가지,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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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공포문학단편선> 그러니까 시리즈 1편과의 첫 대면은 그저 우연이었다. 도서관 서가사이를 거닐다 공포라는 명확하고도 노골적인 키워드가 박힌 책등으로 자연스럽게 시선이 갔다. 국내 장르문학의 취약성이야 외국의 스릴러물, 추리물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또는 절대적으로도 빈곤한 출간 양을 고려치 않더라도 대강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고, 이런 취약성은 작품의 질적인 측면과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해서 사실 제대로 된 작품 접하기가 꽤 어려운 일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시리즈물로 자리를 잡아가는 한국공포문학단편선에 거는 기대란 게 남다를 수밖에 없게 되는데... 작가들이 활동할 수 있는 적절한 참여의 장이 마련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런 참여 즉 독자와의 대면을 통해 단련과 성장을 거듭할 수 있는 기회가 이어질 수 있다는 건 작가만이 아닌 독자에게도 기쁜 선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열혈이라고 하긴 뭣해도... 공포니 스릴러니 하는 분야를 참 좋아하는 입장이다 보니 한국공포문학단편선 시리즈를 접하며 느끼는 기대와 실망이 즐겁기까지 한데, 이번에 읽게 된 건 4편이다. 소재도 다양하거니와 재미도 있다...!

장은호의 <첫 출근>은 오직 전화회선으로만 지시사항을 전달받고 전달해주는 첫 번째 업무에 혼란을 겪는 사회초년생의 끔찍한 경험이다. 코드명과 짧은 지시사항, 전화 등으로 획일화된 업무 속에서 자신의 인간성마저 놓아버리는 미래의 어느 때가 빠싹 말라버린 낙엽처럼 건조하게 와 닿는다. 김종일의 <도둑놈의 갈고리>는 피핑 톰(Peeping Tom)이란 단어의 유래를 차용해 집단 관음증에 중독된 지금의 사회문제를 빗대 한 개인의 연애감정이 살의로 바꾸어버리는 처절한 과정을 보여준다. 1인칭 독백으로 일관해 가쁜 호흡에 빠져들 수 있고, 작품 전체의 분위기에 소재를 어우 누르는 기교가 좋아 보인다. 다만, 주제의 시사성이 워낙 커서 잘 그려낸 개인의 절망감과 공포 또한 이에 휩쓸리는 아쉬움이 있다.

이종호의 <플루토의 후예>에서는 결혼을 앞둔 한 남자가 어린 시절을... 기괴한 체험을 통해 가족을 잃은 기억을 꺼내놓는다. 저주받은 집, 고양이, 낯선 방문객, 저주 등 공포소재를 잘 섞어놓고 있지만, 이런 류의 대칭점에 서게 되는 포우의 <검은고양이>에 반한 상투성이란게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는 안타까움이 있다. 황태환의 <폭주>는 운석으로 지구멸망이 예고된 시점, 폭력과 살인이라는 광기에 휩싸이는 보통인간들의 심리를 담아내고 있다. 하지만 사람을 마구잡이로 죽이는 과정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것에 치중해, 광기에 대한 공감보다는 슬래셔풍의 단막극 하나를 들여다본 느낌뿐이다. 참혹함이란게 광기의 결론으론 충분하겠지만... 누군가를 동참시킬 과정이 되진 못하기 때문이다.

우명희의 <불귀>에서는 한국적인 한(恨)이란 소재를 고부갈등과 결합해 낸다. 죽은 남편의 유언 탓에 자신을 죽을 만큼 증오하던 시어머니의 병수발을 자청하는 며느리. 시한부 판정을 받고 죽어야 하는 시어머니는 죽지 않고 자신과 딸에겐 이상한 일들이 벌어진다. 한, 고부갈등, 마을에의 저주 그리고 알 수 없는 아이의 눈빛... 전형적인 소재들을 활용해 분위기 조성엔 성공했지만 거기까지 뿐이다. 유선형의 <도축장에서 일하는 남자>는 어느 날 술에 취해 기억을 잃은 한 남자가 알 수 없는 도축장에서 겪는 기묘한 체험이다. 탈출도 할 수 없는 곳에서 무언지 모를 고기를 다듬으며 어디인지? 왜 그곳에 와 있는 건지? 무엇의 고기인지?를 차례차례 해결해나간다. 근사한 상상력에 반해 빤히 예상되는 앞 대목들이 약간은 싱겁다.
 
최민호의 <더블>은 시공간의 뒤틀림으로 발생한 더블 즉 도플갱어의 자아를 찾기 위한 싸움이다. 나와 한치 다를 바 없는 다른 존재를 등장시켜 존재에 대한 불안감을 언급하는 상상력이 근사하지만 묵직한 질문을 던지기엔 다소 부족한 느낌이 있다. 김유라의 <배심원>에서는 가정불안과 왕따 그리고 인터넷의 폐해라는 사회문제를 짜임새 있게 고발한다. 시사성있는 소재는 공감대 형성에 효과적이긴 하나 지나친 극단만을 담아내다보니 작위적이라는 거부감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권정은의 <행복한 우리 집에 어서오세요>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좀비들이 나타나고 내가 사랑하는 이마저 좀비가 되어버려 고립된 한 가족의 이야기다. 전형적인 장르소재인 좀비를 차용해 구구절절 개연성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편의를 살렸지만,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은 상투성을 감수한다는 위험부담이 클 수도 있다. 가족 구성원간의 애정이 절절하긴 하지만 상투성을 벗어내진 못한다. 전건우의 <배수관은 알고 있다>는 나카타 히데오의 <검은 물밑에서> 느껴지는 아파트란 공간의 으스스함에 기러기 아빠의 현실적인 고충이 더해져 있다. 상투적으로 마무리될 뻔한 이야기를 반전 아닌 반전으로 수습해 묘한 울림을 끌어내는데 성공하고 있다.

공포라는게 대놓고 '무섭지!'를 연발해 부지불식간 탄식을 이끌어내는 단순한 방법도 분명 효과적이긴 하나 이런 노골적인 드러냄은 거부감을 끌어내는 지름길이 되기도 한다. 보편적 정서 밑바닥을 헤집기 보다는 무언가의 외피만 건드리다보니 식상함이나 유치함을 넘어서 우습다 라는 배신과 같은 감정까지 느끼게 될 위험이 있다. 밑바닥에 닿기 위해서 육탄으로 파헤치는 것도 나름의 묘미가 될 수 있겠지만, 은근하게 접근하며 느끼게 되는 분위기... 슬며시 어둑어둑한 공간속으로 한걸음 발을 내딛으며 얻게 되는 느릿한 감정이입이 좀 더 진득거리지 않으려나?

지나치게 현실적인 소재들의 나열이나 끔찍함에 대한 탐닉은 정서를 건드리기보다 사고력을 움직이게끔 한다. 이쯤 되면 공포 비스 무례한 정서적 공감은커녕 이래선 아니 되겠구나 또는 이래야겠구나 하는 식의 교훈 내지 호불호에 대한 이분법적 판단만이 남게 되니 내가 읽고 있는 게 무얼 내세우려는 것인가 싶은 의아스러움이 더해진다.  

공포 비스 무례한 정서로 독자를 이끌기 위해 작가에게 필요한 건 감추는 능력... 은근함의 미덕을 깨닫는 게 아닐까? 여기에 처절함에 대한 설계력 하나 보태면 그럴 듯 하지 않으려나...? 물론 처절함과 단순한 끔찍스러움과는 다른 문제일 듯... 끔찍함은 외면이라는 거부의 반응으로 이어지기 일쑤이지만, 처절함에는 공감이라는 자연스러운 수긍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일부는 다음이 기대되고, 일부는 그저 아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