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록달록 이야기 모음. '지하도의 비'

사색거리들/책 | 2010. 11. 16. 07:00 | ㅇiㅇrrㄱi

미야베 미유키. 미미 여사님이라는 친근한 호칭으로 불리울 만큼 국내에서도 인기 높은 일본의 대중소설 작가. 일본작가 중 제일 유명인이라 하면 무라카리 류와 함께 흔히 언급되는 그런 그녀가 개인적으로는 이름만 알고 있는 작가류로 분류될 뿐이니... 그렇다. 단 한 번도 그녀의 작품을 접해본 적이 없다. 굳이 이유를 열거하자면야, 국내의 척박한 출판업계를 주도하는 일본문학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 운운하던 태곳적 논란거리가 여즉 귀에 담겨 있을 수도, 다작하는 작가의 열정 앞에서 어느 것부터 손을 대야할지 모르겠다는 혼란 때문일 수도... 아니면 베스트셀러에 대한 집단적 관심의 대열에서 슬쩍 비켜나고 싶어하는 괴팍한 기호 탓일런지도 모르겠다. 

지하도의 비
카테고리 소설 > 일본소설 > 공포/추리소설
지은이 미야베 미유키 (북스피어,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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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도의 비>는 미야베 미유키의 단편집으로, 도서관에 계신 상사분(비슷한 책 읽기 취향을 가지신)이 무조건적인 읽기를 강요하신데다, 재미가 없다면 근사한 식사대접(?)을 제공하겠다는 회유에 이끌려 접하게 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공짜 식사는 포기해야할 것 같다.

엄청 슬프기도, 살짝 무섭기도, 그리고 우습기도 하다... <지하도의 비>
사내 동료와의 파혼으로 회사를 그만 둔 아사코는 지하상가 카페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며 엇나간 인생을 괴로워한다. 카페 단골 손님인 요코라는 여성과의 대화를 통해 배신으로 인해 밑바닥으로 추락한 삶에 대한 동병상련의 고통을 나누게 되는데, 어느날 파혼한 남자친구의 친구였던 아쓰시와 우연히 재회하게 된다. 아쓰시에 대해 집착을 보이기 시작한 요코. 아사코는 요코가 자신에게 들러주었던 과거의 상처가 모두 날조되었음을 알게 되는데...

심장이 쿵쾅거리는 이상한 꿈을 꾸다... <결코 보이지 않는다>
에쓰로는 늦은 귀가길 정류장에서 택시를 기다릴 때마다 자신 뒤에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늘 신경이 쓰인다. 인적이 드문 동네였기에 뒤에 남겨진 이가 한참이야 택시를 기다려야할게 뻔하기 때문인데 언젠가는 젊은 여성과 합승을 한 일로 와이프에게 된통 혼나기까지 했다. 어느 늦은 밤, 택시는 몇 십분째 나타나질 않고 뒤에 있던 나이든 남성의 건의로 집까지 걷기로 한다. 나는 운이 나빴다라는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으며 그는 자신이 겪었다는 기묘한 이야기를 에쓰로에게 들려준다. 조용한 밤의 적막에 갇혀버린 두 남자가 그렇게 길을 걷는다.

왜 죽었을까...? <불문율>
일가족 네 명이 차에 탄 채로 바닷속으로 돌진 해, 모두 목숨을 잃는다. 자살로 추정되는 가타세 미쓰오 일가의 죽음의 뒷 이야기들이, 옆집 이웃과 회사동료와 부하직원, 친구, 부모와 친척들, 교통과 사고담당 직원과 담당의, 죽은 자녀의 학교담임 및 동급생 등의 입을 통해 전해진다. 디즈니랜드에 놀러가는 중이었던 행복한 가정의 실체, 도대체 그들은 왜 죽었을까...?

새벽 두시 반에 걸려온 장난 전화... <혼선>
새벽 두시 반, 그 시간이면 여동생에겐 늘 장난전화가 걸려온다. 오빠가 대신 전화를 받아보지만 상대는 전화를 끊어버린다. 다시 걸려온 전화. 맨정신으로 보이는 상대는 오빠를 바꾸지 말라며, 중간에 말을 끊지 말라며, 전화는 계속될 것이라며 폭언을 퍼붇는다. 다시 한번 상대와 대화를 시도하는 오빠. 역탐지로 발신자의 번호는 이미 알고 있음을 밝히고, 친구의 이야기를, 대학시절 장난전화에 유난히 집착했던 다케시를 친구로 둔 유지가 겪었다는 기묘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오빠의 긴 이야기가 이어진다.

죽음 앞에서 발견한 멋진 승리... <영원한 승리>
조카인 히로미는 가쓰코 이모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중학교 선생님을 거쳐 교감으로 재직중이었던 이모는 외가식구들 중에서 가장 똑똑했고 성공한 캐리어 우먼이었다. 고별식 전날 밤샘에 참석한 외가식구들은 평생 독신으로 지내며 번번히 연애도 하지 못했을 이모의 건조한 삶에 대해 시기심 섞인 비난을 쏟아놓기 시작하는데... 히로미는 이모의 집에서 이미 개봉된 오래된 편지 한통을 발견해 읽던 중 놀라운 비밀이 감춰져 있음을 알게 된다.

내 안에 살고 있는 연쇄살인마의 초상... <무쿠로바라>
집에서도 반장이란 호칭으로 불리우는 형사반장은 하시바의 방문이 늘 당황스럽다. 하시바는 무쿠로바라라는 성을 가진 각성제 중독자의 습격에 맞서다 엉겹결에 그를 죽이고 정당방위로 풀려나긴 했지만 살인범이라는 낙인 탓에 가정도 일도 본인의 정신상태도 놓아버린 가여운 인물이다. 하시바는 살인사건의 기사를 스크랩해와서는 무쿠로바라가 아직 연쇄살인을 벌이고 있다며 그를 서둘러 체포해달라는 이상한 말을 늘어놓곤 한다. 하시바의 방문이 거듭될 수록 반장은 이상한 분노에 휩싸이게 되는데...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안녕, 기리하라 씨>
소란스러운 우리 집. 집안에서 어우러지는 다섯 명의 목소리는 늘 귀가 따가울 정도다. 어느 날, 늦은 회식 뒤에 귀가한 집안에선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물 떨어지는 소리도, 한숨 소리도, 일부러 낸 소리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다음 날 아침 모든 것이 정상으로 되돌아왔음을 느낀 미치코는 술기운 탓에 일시적 난청을 경험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결국엔 집안에서 소리가 사라지는 현상을 가족 모두가 겪게 된다. 소리는 집 안에서만 들리지 않는 것이다. 당황해하는 그들 앞에 기리하라라는 의문의 남자가 나타난다.

...

총 7편의 단편들은 다양한 장르를 분주히도 넘나드는 듯 보인다. 표제작인 <지하도의 비>를 보면, 줄곧 내려도 눈치채지 못하다가 결국 온몸을 적시는 지하도의 비와 같은 배신의 아픔에 시달리는 두 여성의 한탄이 교차하며 일종의 실연극복담인가 싶었다가, 이상한 광기를 흘리는 요코의 집착에서는 미스테리·스릴러의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붉은 동백문양의 넥타이 앞에서 재회한 두 여인의 사연을 접하다보면 웃어야 되는건가 울어야 되는건가 모르겠다는 주인공 아사코의 심정이 복잡하게 엉겨드는 진한 여운까지 느끼게 되는 것이다. 

'호러, SF, 스릴러까지의 다채로운 빛' 운운하는 소개문구와 함께 요상하게 채택된 표지 탓인지, 그저 기괴한 이야기일 거야! 공포물이구나! 라는 선입견을 강하게 갖게 되는데,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을 <혼선>편만 제외하자면, 나머지 이야기들은 다양한 분위기를 슬쩍 비추다가는 우리 살아가는 일상사로 용케 제자리를 찾아가고 적어도 휴~ 가슴을 쓸어내리고 별탈 없이 끝났음에 안도할 수 있는 평안함을 기본으로 제공하니 굳이 장르로 구분짓자면 드라마(Drama) 정도라 해도 되지 않을까?

장르작가의 기본으로는... 기발한 발상, 그러니까 독자들이 우와~ 할만한 것들을 제시하는데 있어 눈에 띄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거나 가다듬는 걸 언급하곤 하지만, 이런 재기(才氣)만으로는 작가로서의 생명력을 보전 받진 못할 것이다. 몇몇 유명 일본작가의 책을 접하다보면 이런 식의 기발한 아이디어 특히 신선한 전개과정, 트릭 내지 뒤틀림 등을 통해 작품의 특성을 갖춰 나가는 경우들을 쉽게 접하게 된다. 물론, 재미는 있다. 다만 '재미있다' 외에 뭔가 여운이 남는... 다 읽고 났더니 마음 한구석에 이상한 찌꺼기들이 투둑투둑 놓여있어 작가도 작품도 다시 흘끔거리게 하는 식의 묘한 매혹이 일어나지 않는 점이 아쉽게 된다. '재미 외' 또는 '재미와 동반된' 이런 여운은 인간을 바라보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지켜보는 작가의 시선이란게 얄팍하지 않은 어떤 무게감을 띄고 있을 때, 그리고 독자가 이를 부분부분에서 알아차리게 될때에나 자연스럽게 묻어나오는 꽤나 어려운 과제일텐데...

처음 접하는 미미 여사님... 사실 주변에서는 <모방범> 말고는 별로 재미없다, 권하고 싶지 않다 등등의 실망감의 표현도 적지 않았기에 기대반 덤덤함 반으로 접하게 되었지만. 그녀의 글에 베어있는 묘한 맛깔스러움속엔 재기발랄한 재미도, 여운도 충분히 넘쳐 흐른다. 여기에 SF적 요소까지 우리의 일상사로 내지르는 신통한 상상력이 가미되어 있으니... 다른 작품의 기복에 대한 걱정은 슬쩍 접어놓는다.
계속 지하에 있으면 비가 내려도, 줄곧 내려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지? 그런데 어느 순간 별생각 없이 옆 사람을 보니 젖은 우산을 들었어. 아. 비가 내리는구나. 그때 비로소 알지. 그러기 전까지 지상은 당연히 화창하리라고 굳게 믿었던 거야. 내 머리 위에 비가 내릴 리가 없다고. 배신당할 때의 기분이랑 참 비슷해...
<지하도의 비>편에서 아사코와 요코가 배신에 대해 대화를 나누며 등장하는 대목이다. 배신의 의미를 이리 어렵지 않게, 직관적으로 풀어내려가면서도 왠지 내가 배신당했을 때도 그런 기분이었어 싶은 묘한 여운까지 유발시킬 수 있는... 그런 작가라면...

공짜 식사 한끼는 안 먹어도 충분하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