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묘하게 짜집기된 상상력 '퀴르발 남작의 성'

사색거리들/책 | 2010. 11. 24. 15:01 | ㅇiㅇrrㄱi

읽어야할 책들은 나날이 쌓여만 가는 와중, 시선을 잡아끄는 표지를 발견해 낸다. 도서관 책인 관계로 외부를 장식하고 있었을 표지가 아닌 속표지만을 보게 됐는데, 도축장에서나 볼 수 있을 갈고리 3개에 누군가의 팔 하나 그리고 몸통으로 추정되는 덩어리(?)가 절단면의 선홍빛 육질이 보이는 방향으로 짙은 시체 빛을 띤 채로 꿰어져 있는 기괴한 장면이다. 그로테스크한 내 취향을 극단적으로 자극하는 이 작품은 도대체 무엇이냐...? 기대 섞인 호기심에 책을 들춰 페이지 사이를 건너뛰다 보니 퀴르발 남작, 셜록 홈즈, 마녀, 프랑켄슈타인 내지 정상적인 누군가의 이름, 톰과 제리 등 전혀 조합되지 않을 단어들이 뒤섞여 있다. 뭐 하는 이가 써내려간 글이냐 싶은 자연스러운 호기심에 이끌린다. 2007년 제7회 문학과사회 소설부문 신인문학상 수상으로 등단한 최제훈이란 작가란다.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와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서울에 살고 있다는 동갑내기 되시겠다. 30대 후반의 나이에 등단했으니 늦깎이 작가인데, 문예창작으로 전공분야를 달리해 뒤늦은 학구열을 불태웠을 테니 창작에 대한 열정과 자신이란게 남다를 것임은 머리 굴리지 않아도 쉽게 짐작해 낼 수 있다.

책을 덮고 나니, 그간의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낮은 조도의 백열등 아래 모여 아비규환 생 난리판을 벌이고 있으려니 싶다. 의문의 시체조각을 그러모아 놓고는 시체의 정체가 무엇이냐, 범인이 누구냐 서로 드잡이중이거나 각자 특성에 맞게 미쳐 날뛰는 중이니...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이름모를 창작물이 뒤뚱거리며 주변을 배회하고, 마녀들이 빗자루를 타고 좁은 공간 안에서의 무리한 비행 중 퉁퉁 튕겨 나가거나, 살인범으로 소환되었던 정신병자 강철수인지는 예의 멍키스패너를 휘두르며 발악 중이고, 그나마 정상적으로 보이는 이들까지 머리끄덩이를 잡고 뒹굴러 다니는 중, 셜록 홈즈와 주신 디오니소스가 멱살잡이와 권투놀이에 한창이거나...

그러다 책을 다시 여는 순간 퀴르발 남작이 소리친다. '각자 위치로, 누군가 책장을 연다!' 라고... 표지의 기괴한 일러에서 느껴지는 익살스러움이 여운으로 때론 강한 설득력으로 멤돌게 된다. 
 
퀴르발 남작의 성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한국소설일반
지은이 최제훈 (문학과지성사,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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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집 <퀴르발 남작의 성>은 널뛰는 듯한 분위기 어찌 보면 도대체가 종잡을 수 없는 상상속 여행담과 같다. 표제작이자 최제훈의 신인문학상 당선작인 <퀴르발 남작의 성> 외 7개 단편의 전반적인 분위기라는 게 그렇듯 기괴하면서도 흥미롭다.

200년이나 넘게 어린아이들을 잡아먹으며 젊음을 유지했다는 거인 남작의 동화에서부터 시작하는 <퀴르발 남작의 성>에서는 여러 방식의 이야기들이 시공간을 무시한채 짜깁기되어 한편의 이야기로 완성된다. 1993년 대한민국 서울의 K대학교에서는 학점으로 복수하겠다며 재치 있게 으르렁대는 백정인 강사의 '영화속의 여성들' 수업이 진행되고, 1932년 미국 뉴욕의 미셸 페로라는 원작자와 출판사 편집장간의 대화가 등장하거나 , 2004년 일본의 동경에서는 이 원작영화를 리메이크하려는 일본인 감독의 인터뷰가, 1952년 미국 마이애미에서는 원작을 영화화하기 위한 제작자와 배우들의 일화가 급하게 끼어드는 식인데... 마지막 남작의 성으로 향하는 르블랑 부부 일가의 발걸음이 안타깝기까지 할 정도로, 작가가 들이대는 여러 정황들에는 현실적인 통일감이 뚝뚝 흘러내린다.

<셜록 홈즈의 숨겨진 사건>에서는 시골에서 무료하게 요양중이던 홈즈가 맡게 되는 살인사건이 유명한 추리소설작가이자 의사인 코넌 도일의 죽음과 관련된 것이라는 우스꽝스러운 설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홈즈를 다시 살려내라는 독자들의 집단적인 '세레라자데 콤플렉스'앞에서 실존적 자아를 찾기 위한 코넌 도일경의 비극이 안타깝게 묘사되고 있다. 밀실트릭의 해법 앞에 놓인 창조주의 고뇌라... 코넌 도일의 겪었을지 모를 딜레마가 우스꽝스러운 형태로 작품 전체에 흘러내리게 된다.

이어지는 <그녀의 매듭>에서는 선택한 삶과 선택하지 않은 삶의 공존이란 다소 무거운 주제를 부분기억상실에 시달리는 차화연이란 한 여성의 이중성을 통해 풀어내고 있다. '그때, 나는 어떻게 했을까?' 라는 반복되는 질문 앞뒤로 교차되는 과거·현재가 묘한 방식으로 답을 내놓고는 있지만 내가 선택한 것과 선택하지 않은 것의 차이는 지워진 기억만큼이나 모호하기만 해, 자아에 대한 끔찍스러운 질문으로 회귀한다. <그림자 박제>에서는 가상의 인물을 통해 역할극에 몰입하던 한 남자의 정신분열 과정과 파국이 무겁지 않은 분위기로 그려지는데 그림자처럼 어두운 빛을 하고 있는 내 자신의 단면 돌아보기는 결국 상처받거나 결여된 자아 또한 내 자신의 또 다른 일부로 박제되어 감춰져 있는 건 아닐까라는 의문으로 돌아오게 된다.

<마녀의 스테레오 타입에 대한 고찰>은 15세기부터 18세기 유럽 전역을 휩쓸었던 마녀사냥의 광풍과 그로부터 기인했을 마녀에 대한 스테레오타입 형성과정의 전면적인 재해석이다. 월간 마녀 스타킹 2007년 12월호에 수록되었다는(물론 허구) 이 일종의 보고서는 마법의 여신인 헤카테를 비롯해 주신(酒神) 디오니소스, 심지어 오즈의 마법사에 107년째 출연중이라는 서쪽 마녀의 인터뷰 등과 작성자(?)의 분석이 교차 수록되며 각각의 사건과 신화에 대한 재해석을 단행한다. <마리아, 그런데 말이야> 다시 내가 누구냐 라는 질문의 반복이다. 우연히 만난 여자 후배가 늘 언급하는 마리아라는 의문의 인물은 어느 순간 실존인물이 아닌 내가 감추고픈 아니면 내가 지향하는 결국 내 자신일 수 있는 대상에 다름 아니다. <괴물을 위한 변명>은 메리 셀리의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재해석이다. 괴수의 대명사가 된 프랑켄슈타인이 실제로는 무명의 존재였다는 사실에서부터, 원작자 메리 셀리 여사와의 전화통화, 결국 괴물은 성적 정체성의 혼돈 속에서 내면의 자아를 뒤틀린 형태로 표출했던 박사 자신의 초상이었다는 허구가 교차된다.

다시... 책을 덮고 나니, 등장인물들의 악다구니가 책 틈 사이로 생생하게 새어나오는 듯 하다. 

최제훈이란 작가의 첫 단편집 <퀴르발 남작의 성>이 갖는 미덕 중 하나는 재미다. 문학작품 내지 신화, 조작된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 태반이 허구다. 허구의 대상으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듣거나 그 자체를 뒤엎어 말 그대로 난장을 만들어버리는 구성의 신선함과 더불어 적절하게 배치된 유머는 읽기의 지루함을 덜어준다.

그렇다고 단순한 말장난으로 치부할 수 없는 건... 건드려지는 신화, 문학작품 내지 현실 등에 대한 해박한 지식 때문일 것이다. 많이 알고 있다는 것에 대한 과시는 작품 전체의 분위기와 전혀 겉돌 생각 없이 각 문장에 녹아들어 있는 듯 적절하다. 때문에 고전에 대해 재해석을 내리고 있는 몇몇 수록작품들은 전혀 허투루지 않은 논리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거짓말인걸 뻔히 알면서도 사실일 성 여기게 되는 현실감의 힘이란게 있다. 여기에, 최제훈은 그저 망가뜨리고 분해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또 다른 무언가를 완성해낸 듯 보인다. 가벼워보이는 듯한 외양과 달리 그 안에서는 자아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거나, 오로지 인간만이 보이는 집단적 공포와 광기를 반추하고, 제도를 비아냥거리는 묵직함이 진득하다. 

자신만의 완성품을 위해 그 숱한 것들을 비틀고, 변형하고 속칭 손바닥위에서 갖고 놀 듯 건드리다가 다른 무언가로 뚝딱 완성해내는 작가의 기교가 상당히 매력적인... 이런 사람이 신인작가라니... 도대체 어디 숨어 있었던 거지...? 그의 첫 장편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