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같을테니까... '리시 이야기 Lisey's Story'

사색거리들/책 | 2016. 7. 16. 23:01 | ㅇiㅇrrㄱi

  킹이 얘기하는 '멀건이' 상태가 아니라면, 어느 누구든... 제 아무리 사소한 행위에서조차 '기대치'라는 것을 배제하긴 '종나' 어려운 삶들이다.

  적어도 킹이란 작가에 대한 기대치엔 스멀거리는 간지러움과 같은 멜로 따위는 자리 잡을 수 없었다. 그의 작품에선 악(惡)스러운 미지의 존재 또는 벽장 속 호박 빛 안광의 두려움 같은 것들이 더 제자리를 잘 찾아간다는 게 일종의 선입견이었던 셈이고, <리시이야기>의 광고문구인 '스티븐 킹 최초의 사랑 이야기'라는 문구에 시선을 던질 때마다 상기되는 거북스러움은 모던호러의 대가라는 식의 선입견 위에 놓여 있었겠다. 


리시 이야기 1, 2
국내도서
저자 : 스티븐 킹(Stephen King) / 김시현역
출판 : 황금가지 2007.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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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튼... 그런 이유로 강렬한 붉은 색 표지의 <리시 이야기>... 적어도 은근히 신경은 쓰고 있었고, 한편 다행으로 인기없음으로 누구도 손대지 않고 있었던 이 책을 읽기 시작한건, 퇴근 시간에 임박해 서둘러 나가야 한다는 조급증과 빈손으로 나가게 됐을 때, 그야말로 한 시간여를 '멀건이' 상태에서 보내야 한다는 짜증 때문이었던 듯.

세상에는 결코 잊을 수 없는 것도 있는 법이니. 노래, 달빛, 키스 등 현실 세계가 하루살이로 분류한 것이 때로는 가장 오래 지속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리시는 깨달았다. 쓸데 없는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단호히 망각을 거부할 수 있다. 좋다. 좋고말고...
  전미도서상을 수상한 유명작가 스콧 랜던의 미망인, 리시 랜던에겐 남편이 남기고간 그 모든 흔적들이 사소해야했다. 의미 자체의 가벼움 때문은 아니었다. 시간이 너무도 흘렀어도 남편에 대한 떠올림 일체는 슬픔의 되새김질에 다름 아니었으니, 자의든 타의든 연관된 기억들은 사소한 것으로 치부해 꺼내기 힘들 어딘가에 어렴풋이 놓아둘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남겨진 흔적들을 지워나가던 중, 리시는... 스콧과 함께 겪어냈던 과거, 사소한 것들로 이어지는 단서들을 발견하게 된다. 현실은 현실 자체만으로 서 있을 수 없기에 과거로 침전하고, 과거는 슬픔이나 사랑 혹은 낮은 햇살아래 '부야문'으로 이어지는 향기로운 오솔길로 다시 나타난다.

  '알망나니' 혹은 '멀건이'가 되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랜던 일가의 참담한 삶에 대해 완벽한 이해를 통해 아니면 망각으로 동참해냈던 리시 자신의 자취들을 되짚어 가는 과정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일종의 보물찾기! 죽은 남편의 단서들을 통해, 과거의 일부를 찾아내고, 다음의 단서로 또 다른 일부를 찾아내고... 그렇게 찾아낸 과거로 그 다음의 과거를... 떠올리는 식으로 리시는 사소해진 기억 속 보물찾기를 계속해낸다.

  <리시이야기>에도 현재라는 상황은 분명 존재한다. 집요한 인컨크 이야기나, 첫 대면에서 가슴을 도려내려는 짐 둘리... 리시의 기나긴 이야기에 동참하는 언니 아만다의 발작과 현실 속에 놓여진 보물찾기의 단서들... 하지만 대부분은 리시가 불현듯 추억해내는 과거속 한때이니, 굳이 비중을 두자면야 하루살이로 분류되었더라도 망각을 거부한 사소한 것들의 지난 이야기쪽이 오히려 묵직하다. 혹여나, 이 모든 것들을 '리시와 스콧의 사랑놀음에 대한 진부한 나열 정도'로 생각하고, 짧기도 길기도 한 단편들을 지나쳐버리면 더 이상의 책읽기가 어려워질 것을 각오해야만 한다. 소설 <리시 이야기>에서도, '주인공 리시'에게도 과거란 단순한 추억거리가 아닌 스스로 망각을 거부할 만큼의 의지를 지닌 강력한 실체이고 끊임없이 현실을 도발하기 때문이다. 제목처럼 '리시'의 이야기이긴 하나, 일부의 현실과 방대한 과거가 엮이다 보니 그녀의 끊임없는 상념에 대해 동의해야만 순조로운 책읽기가 가능하게 된다.

  당연하게도... 단지 죽은 남편에 대한 슬픈 회상이 내용의 전부라면, 킹의 애독자로서 무척이나 낙심했었겠지만... 부야문, 피의 챌, 서늘한 웃음소리의 거대하고 악한 존재, 목을 역류하는 물 한 모금으로의 순간이동 등등 그의 작품에서 접하기 쉬우면서도 비현실적이라는 자체만으로도 매력적인 소재들 또한 등장하기에, 그저 사랑 이야기에 그치지 않나 라는 걱정은 접을 수 있게 된다. 
"이제 이곳에서 할 일은 다 끝났어. 이만 갈게. 안녕." 불현듯 망설여졌다. 기다렸다. 무엇을 기다리는지는 알 수 없었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무엇인가의 느낌밖에. 손을 들어 흔들려다 당황한 듯 다시 내렸다. 살짝 미소 짓는 뺨 위로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여보, 사랑해. 모두 같아." 리시는 계단을 내려갔다. 그림자가 한동안 머물렀지만, 그것 역시 따라 내려갔다. 방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곤 침묵했다.
  마지막 장면... 스콧이 남긴 편지를 리시가 읽어간다. 얼마 남지 않은 남편과의 시간... 한 장 한 장 읽어갈 수록 줄어드는 편지지...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인데 스콧은 여전히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다. 몇 장이 남았는지 헤아리며 남편의 줄어드는 흔적에 안타까워하는 리시의 조급함에, 나도 마찬가지로 굵은 볼딕체로 인쇄된 편지의 남은 분량이 얼마만큼인지 자꾸 헤아리게 된다. 편지가 마무리되면 리시의 이 길고 긴 이야기도 끝나버릴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킹의 전작들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명확한 실체... 논리적인 전개... 사실 이런 걸 느끼긴 힘들었지만, 사랑이야기라는데... 사랑 앞에선 눈이 멀어버림을 대수로 여기면서 이해되지 않는 미지의 존재나 어처구니없는 상황이라는 게 뭐 그리 문제가 되겠나...? 사랑이라는데...

  참고로... 그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들, 리시와 스콧만의 용어들이 무수히도 난무하는데... 예를 들어, 가죽 이기다, 적보가이, 알망나니, 덩, 종나, 종나 대벙한, 챌 등등... 2편의 맨 뒤에 실린 '옮긴이의 말'을 미리 접해보는 것도 읽기에 도움이 될테다. 뭐 그렇지 않더라도 리시의 상념속에 같이 빠져 들다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테니 미리 걱정할 필요까지야 없을 듯...

  어찌한들... '모두 같을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