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소녀의 바람 가득할 여정 길 '소멸 Vanish'

사색거리들/책 | 2011. 3. 16. 15:00 | ㅇiㅇrrㄱi

바람이 분다...
봄? 언젠가부터 봄은 만물이 소생하는 시작점이기 보다 저 멀리 대륙의 흙덩어리를 흩날리는 바람 부는 계절의 상징으로 떠오르곤 한다. 2011년의 봄은 유난히 바람이 많다. 회색 빛 건물 앞, 언덕을 가로지르는 나무 계단 곁에 놓인 절대 돌이 아닐 돌 외관의 스피커 속으로도 바람이 불고, 길을 걷다 지나치는 술집 내부의 와글와글한 젊은 열정 사이로도 바람이 분다. 퇴근길, 지쳐 서있던 횡단보도의 한편으로도 바람이 분다는 웅얼거림이 떠다니고, 이어폰으로 틀어 막힌 누군가의 귀 속에서도 그 바람은 새어 나온다. 새로운 계절의 중심으로 날짜가 하나 둘 넘어가며 바람은 더 많이 불어댈 기세다.

이번 바람은 모래를 실은 바람이 아니다. 경황없이 머리칼을 나부끼는 바람도 아니거니와 살갗의 서늘함으로 알아차릴 바람도 아니다. 눈으로 확인할 수 없고 만질 수 없다는 바람만의 속성만 갖춰냈을 뿐, 어린 시절 사모했던 어느 가수의 처량한 목소리에 실린 중얼거림일 뿐이다. 그런데도 바람은 이어진다. 세월에 녹슨 추억의 봉인마저 갈라버릴 날선 바람으로, 마음 속 짚이지도 않을 쓸쓸함까지 더할 묵직한 바람으로 불어온다. 사방이 바람이다. 

소멸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 영미소설일반
지은이 테스 게리첸 (랜덤하우스,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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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인가... 멕시코 사막 한가운데서 순결을 잃었다는 밀라의 여정 길에도 바람이 심하지 않았을까 선뜻 단정 지어 버리는 것이다. 바람에 실린 굵은 모래 알갱이가 밀라를 포함한 그녀들의 알몸 위를 살 따갑게 두드리지 않았을까...? 그녀들을 덮으며 희붐한 살갗의 백인 남성 여럿이 내질렀던 거칠은 숨소리마저 유린당하는 자의 고통과 수치 사이로 광풍이 되어 몰아치지 않았을까...? 단지 웨딩숍에서 드레스 파는 점원이 되고 싶다는 17살 소녀의 영혼과 육신은 바람에 흩날리는 잿더미가 그렇듯 위태롭다. 바람은 급기야 밀라 그녀의 완벽한 소멸 즉 죽음마저 꿈꿔낸다. 소박한 꿈을 가졌지만 이뤄내지 못하고, 남성의 노리개만으로 살아가야할 처지의 그녀에게 남은 것은 증오뿐일 테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증오를 되새길 짬도 주지 않고 죽음의 위협은 계속된다. 그녀가 무언가를 보았기 때문이고, 무언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엇을...?

테스 게리첸은 <외과의사 The Surgeon New York>, <파견의사 The Sinner>, <견습의사 The Apprentice> 등으로 이어지는 일명 의사시리즈를 통해 유명세를 치렀다. 의사라는 전직을 십분 살려 살인이나 범인 찾기 과정에 보탠 의학적 지식의 정교함은 작중 인물들에겐 넘치는 개성을, 연이은 사건에는 또렷한 개연성을 더하는 장점으로 작용한다. 여기에 법의국의 마우라 아일스 박사와 강력계의 제인 리졸리라는 두 여성을 내세워, 한편으론 자신의 의학적 지식을 효과적으로 담아내고 다른 한편으론 거친 듯싶어도 섬세할 수밖에 없는 여성의 심리를 담아낼 효과적인 방편으로 활용한다.

그렇게 마우라는 의학지식을 강력사건의 해결과정에 십분 담아낼 수 있는 다소 냉철한 인물로, 리졸리는 마초의 세계 내에서 여성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하며 고군분투 살아남기 위해 쌀쌀맞을 정도로 자존을 드높이는 다혈질의 인물로 그려지며 묘하게도 어긋나는 개성을 발한다. 또, 여성이라는... 왠지 따뜻하고 섬세한 속내의 소유자로 사랑에 취약해 보이는 이 둘의 기질은 긴박하게 전개되는 사건해결의 와중으로 멜로라인을 몇 가닥 걸쳐낼 보완재 역할을 제대로 해내기도 한다.

테스 게리첸의 신작 <소멸 Vanish>에서도 마우라와 리졸리의 존재감은 여전하다.
법의국에 도착해 부검대기 중이었던 시체 비닐 백에서 움직임이 느껴진다. 그리고 눈을 뜨는 의문의 여성. 마우라는 죽음에서 되살아난 그녀를 병원으로 이송하지만, 돌연 광란의 상태에 돌입한 그녀는 경비원을 죽이고 인질극을 벌인다. 6명의 인질이 병원 내에 억류되고 출산을 임박해 입원 중이었던 리졸리도 그 중 하나. 경찰신분이 밝혀지면 목숨이 위험할 수 있다. 리졸리와 세상 빛을 보기 직전인 아기를 구해내기 위한 FBI 요원이자 리졸리의 남편 에이브리얼 딘 그리고 마우라의 사투가 이어진다.
이 두 여성 주인공의 활극 사이로 17살 소녀 밀라의 고된 여정의 기록이 이어진다. 얼핏 달라 보이지만 무언지 잔뜩 슬퍼 보이는 사연들이 각자의 연결고리를 통해 꿰어지기 시작하고 어느 순간 하나가 된다. '차가운 스릴러에 따뜻한 감성을 불어넣는 작가' 라는 수식에 걸맞게 이번엔 영혼과 육신을 철저히 짓밟힌 한 소녀의 상처를 적당히(?) 차용해낸다. 하지만, 막연한 아메리칸 드림을 밑바탕으로 한 밀입국자의 현실이나 그들이 성적 노리개로 전락하고 마는 사회적 문제에 대한 성찰까지 담아냈다기엔 뻔한 설정이 적지 않다. 대부분의 장면에선 어디선가 보았던 듯싶은 기시감을 피할 수 없다. 그저 스릴러라는 장르에 쉽게 따라붙는 건조한 문맥을 어지간히 건드려내기만 한다.

그렇게 건드려낼 뿐이다. 이 작품이 스릴러라는 장르이기를 포기하지 않은 이상에야 본연의 맥락을 피해가진 못할 테다. 독자는 여전히 풀어내야할 몇 가지에서 눈길을 떼어 내지 못할 밖에... 죽음에서 일어난 여인은 누구인지, 왜 인질극이란 극단적 폭력 안으로 숨어들었는지, 리졸리는 어떻게 위기를 벗어날 것이고, 마우라와 딘은 어떻게 그녀를 구할지, 범인이 있다면 누구이며 음모가 있다면 그 사정이 어떠한 것인지... 그리고 이 모든 사이로 끼어드는 밀라의 삶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사건이 발생했다면 반드시 해결되어야 한다.
그게 원칙이다. 아마 장르작가로서의 능력은 이 모든 것들... 너무나 빤해 보이는 요소들을 그럴듯한 짜임새와 신선한 발상을 통해 적당히 감춰내고 에둘러 꺼내놓는 지점에 놓여 있지 않을까? <소멸>의 경우 한 소녀의 슬픈 삶에 대한 접근에서는 물기 가득한 바람을 불러 일으켰을지 몰라도, 빤한 걸 빤한 그대로 끌고 가는 식상함까지 껴안고 있다. 얼마나 그럴듯하게 풀어내려나? 기대감은 가득이지만 이번 참의 배신은 참 크다. 얄팍하게 손에 잡히는 남은 분량은 수긍할만한 해법의 과정을 담아내기엔 너무나 빈약하다. 그래도 설마...? 했던 기대마저 마지막 장과 함께 덮어버리곤 어리둥절해진다. 이런...

욕심을 접고 나면 소박할 인상 하나만이 남을 때가 있다. 문득 읽는 내내 들었던 노래 한곡을 떠올린다. 미우라고 리졸리고 음모고 뭐고 간에 다 던져버린다. 친구의 유골 앞에서... 모래 바람의 따가움 속에서 눈을 끔뻑이며 휘청거릴 말라깽이 한 소녀의 쓸쓸함 심정을 떠올려보고, 거세게 불고 있는 이 봄 바람에 모래 알갱이가 섞이지나 않았을까 입을 앙 다물어 보며 수십 번째 들었을 그 노래를 다시 처음으로 되돌려 보는 것이다. 바람이 거세다.

스릴러 한편을 읽고 괜한 바람 타령을 하는 걸 보면, 봄은 봄인가? 뜬금없음은 테스 게리첸이 아니라 내 속에서 찾아야 할까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