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소국 그랜드 펜윅을 아시나요? '약소국 그랜드 펜윅의 달나라 정복기 The Mouse on the Moon'

사색거리들/책 | 2010. 10. 2. 15:10 | ㅇiㅇrrㄱi

북한의 포격, 해병대 장병과 민간인 사망, 준전시... 여전히 미국과 중국, 일본 등의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살길을 모색하려는 우리네들. 진격 북으로!를 외치는 가열찬 분노의 함성과 이를 만류하는 이들... 어느 편의 뒷 허리춤이라도 잡고 줄을 서라며, 너와 나를 간단한 줄 하나로 갈라버리는 사방 가득한 고함소리에 눈앞이 멍해지는 하루하루.

누군가는 불타버린 보온병을 적들이 무차별로 쏟아 부은 포탄 중 하나라며 자랑스레 들어올리고, 유사시 최전선에서 이 한 몸 불사르겠다는 애국보은의 피 맺힌 절규가 이어지며, 어렵사리 모셔온 먼 나라 배 한척으로 막강해진 전투력 과시에 여념 없는 광경이란 것도 있다.

분노와 냉정 사이 이념의 긴장증에 시달리는 환자떼 무더기다. 웃을 수 없는 희극이면서도 나 또한 조연으로 비켜날 수 없을 다큐 한 편이기도 하니, 잠시 비켜나고픈 마음이란게 어쩔 수 없다.

문득, 약소국 그랜드 펜윅을 떠올린다. 
 
약소국 그랜드 펜윅의 달나라 정복기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 영미소설일반
지은이 레너드 위벌리 (뜨인돌출판사,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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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 알프스의 험준한 습곡에 위치한 그랜드 펜윅은 국토면적이 약 40제곱킬로미터이니 여의도(8.4제콥킬로미터)의 약 4.8배에 불과한 아담한 나라로, 총인구는 6천여 명에 불과하다. 국가의 주요 소득원은 와인과 양모 수출이고 대부분의 국민이 이와 관련한 1차 산업에 종사한다. 국가원수는 글로리아나 12세 대공녀로 전 국민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고 있으며, 집권 여당인 공화당과 야당인 노동당이 주요 국정을 다루는 입헌군주제와 의회민주주의가 결합된 정치체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 나라 수상이자 공화당을 이끌고 있는 마운트조이 백작은 1년 예산안을 짜다 신세한탄을 하고야 만다. 국가 방위 및 자주 유지를 위한 군 병력 양성 예산 항목에 배정된 예산액이 약 122파운드(약 20만원)로 그 상세내역을 보면 활시위 교체비용 13파운드, 화살에 사용할 거위 깃털 구매비용 7파운드... 이런 식이니 원대한 꿈의 소유자 마운트조이 백작으로서는 실망스럽기 그지없을 노릇이다. 다른 예로 이 나라 전체 예산이 2만파운드(약 3천 오백만원) 정도임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경제력 면에서는 최빈국에 속하니... 조만간 G20 정상회의를 개최해 국격을 드높여야할지 모를 상황이다.

마운트조이 백작의 올해 숙원사업은 현대적인 직선도로의 건설과 최신 수도설비를 갖추는 것이다. 도로건설은 작년에 공국을 지나간 총 네 대의 자동차 소음에 가축이 죽거나 조산했다는 등의 이유로 노동당 총수 벤트너가 결사반대 입장이고, 수도설비는 돈이 없어 못한다. 이 와중에 글로리아나 12세 대공녀께서는 유럽 여왕 중 자신만 없을 거라며 모피코트, 그것도 공국의 1년 치 예산과 맞먹는 고가의 모피코트를 사달라며 백작을 몰아붙이는데.., 우리의 지략가 마운트조이 백작. 대공녀의 모피코트 구입을 핑계 삼아 미국에 대한 차관요청건을 의회에서 통과시킨다. 하지만 실제 차관요청건에는 모피코트 구매비용 5만달러는 기본이고, 달에 유인우주선을 보낼 비용 500만달러까지 포함되어있다. 물론 500만달러는 도로정비, 수도사업, 호텔건설 등에 쓰일 비용이고 달 탐사선은 허울뿐임이 당연. 하지만 소련과 달에 대한 패권을 놓고 혈투 중이던 미국은 달이 인류 공동의 것이라는 국제협약의 당위성을 얻어내기 위해 그 속셈을 뻔히 알면서도 차관제공을 허락하곤 위신이 서지 않는다며 무려 5천만달러를 제공한다.

상환할 필요도 없는 어마어마한 거금을 들여온 그랜드 펜윅. 과연 전국토를 공사판화 하려는 마운트조이백작의 오랜숙원이 이루어질 것인가? 아니면 대의명분에 따라 달에 유인우주선을 보낼 것인가? 보낼 수는 있으려나? 달에 최초로 인간의 발자욱을 남긴 나라는 대관절 어디인가? 대공녀는 모피코트를 선물로 받을 수 있을 것인가?

이런 허무맹랑한 내용의 소설 <약소국 그랜드 펜윅의 달나라 정복기>는 아일랜드 출신의 저자 레너드 위벌리가 1962년에 내놓은 작품으로, 작품속의 배경은 1968년경이다. 보통 60년대 책이라 하면 대강 이런 걸 연상한다. 외양은? 어색한 세로읽기, 색이 누렇게 바래버린 데다 잘못 건드리면 바스락거리던 종이가 툭 꺾이는 불상사를 겪게 되기 십상. 내용은...? 고리타분하거나 너무 진지한, 떨어지는 최신성에 재미는 보장 못함...?

근래 재 인쇄되어 나온 책이니 외양의 남루함은 비켜간다 해도 그 내용은 어쩌려나. 참으로 멀고도 먼 예전, 미국과 소련이 전 세계를 양분하고 있던 냉전시기의 우주싸움(?)이 배경이라니 퍽이나 구태의연할 것 같다는 의구심은 당연할 수도 있다. 더군다나 대략의 소개에서 짐작컨데, 존재하지도 않았던 나라 그랜드 펜윅이란 곳에서 달나라에 유인우주선을 올려보낸다니, 그 떨어지는 개연성에 재미는커녕 허무맹랑함으로 인한 쓴웃음만 남지 않으려나 걱정이게 된다. 대공녀가 자신이 통치하는 나라 1년치 예산에 맞먹는 모피코트를 갖고 싶어 하거나, 모피코트 구매를 핑계로 한 차관요청에 대한 미국의 수락, NASA가 폐기처분한 새턴로켓을 빌려다 우주선을 쏘아 올리는 과정, 와인으로 만들었다는 피노튬이라는 무한에너지원의 개발과 본격적인 달탐사 과정 등등 하나같이 말이 안 될 상황뿐이다.

하지만 읽다보면 이 모든 게 헛걱정이었음을 알게 된다. <약소국 그랜드 펜윅의 달나라 정복기>는 심심함과 허무맹랑함의 약점을 풍자와 해학이라는 절묘한 비틀기로 성공적으로 비켜나간다. 더군다나 단순한 비틀기에 그치지 않고 정치인이라면 그 시침떼는 속내를, 강대국들의 모습에선 냉전이라는 사상적 대립과 국가 이기주의의 절묘한 결합을, 언론이라면 그 약아빠진 습성을, 선거나 여론이라면 민심의 가벼운 속성을... 심지어 문명·비문명에 대한 화두 등 꽤나 많은 것들의 진면목까지 까발리는 시선을 갖추고 있으니 그저 재미있다고 낄낄거릴 수만은 없는 묵직함까지 느끼게 되는 것이고, 웃음 뒤로 이끌려오는 이 무게로 인해 얻어지는 것이 바로 개연성이게 된다. 여기에 지금 봐도 전혀 뒤쳐지지 않아보이는 과학지식은 덤이다. 이런 균형감 탓에 웃을 수도, 웃지 않을 수도 없는 장면은 끊임없이 이어지게 된다.

미·소 강대국의 틈 사이에서도 당당하며, 원하는 모든 바를 쟁취하고, 모두들 웃으며 만족스러운 나날을 보내는 그랜드 펜윅의 사람들... 갈등이 있을지언정 진정 상대를 이겨내려는 것이 아닌 화합을 위한 갈등일 뿐이니... 패배의 문턱에서 승리를 쟁취하진 못했지만 (그보다 훨씬 어려운 일) 파멸의 문턱에서 가까스로 합의를 낚아채었다며 기분좋아하는 마운트조이백작의 아이같은 즐거움이 시사하는 바가 의미심장하다. 우리네 복잡스런 현실과 동떨어져 있어 회피하는 심정으로 돌아보는 동화속 이야기일 수 있지만, 40년도 더 된 풍자와 해학이 여전히도 적용되는 걸 보면... 외형적인 상황이란건 변했어도 그 상황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이란건 장고한 시간만큼의 변화를 갖지 못했나 싶은... 새삼스러움이 있다.

레너드 위벌리의 다른 작품 <약소국 그랜드 펜윅의 뉴욕 침공기The Mouse that Roared>, <약소국 그랜드 펜윅의 윌스트리트 공략기 The Mouse on Wall Street>, <약소국 그랜드 펜윅의 석유시장 쟁탈기 The Mouse that Saved the West> 등도 충분히 재미있고 진중할 것임을 확신하거니와 영화화되기도 했다하니 한번 찾아봐야할 듯 싶다.

혹, 재미를 의심하는 분들을 위해 덧붙이자면... 모 정당의 당대표님께서 보온병을 들고 포탄이라며 의미심장해하시던 풍자·해학 만땅의 장면이 처음부터 끝까지 쉬지않고 나열되는 것 같다 하면... 너무 과장이려나?

참고로 그 당대표님은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보온병 하나에서도 적의 도발과 만행에 대한 경각심을 일상생활에서도 잊지말고... 수시로 떠올려야한다는 차원에서 부러 그러신 거란다. 아마 저 행복한 나라 그랜드 펜윅의 풍자와 해학을 선행학습하신게 아닐까 싶기도... 믿거나 말거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