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살인자들. '살인자들의 섬 Shutter Island'

사색거리들/책 | 2010. 10. 13. 01:32 | ㅇiㅇrrㄱi

두 가지 잡담...
어느 늦은 저녁, 텅 비어있다 시피한 지하철 좌석에 앉아 책을 읽던 중, 무언가 할말이 있다는 듯 앞에 나타난 한 여성분. 읽고 있던 책의 작가를 묻더니 자신도 너무 좋아하는 작가라고 말을 꺼낸다. 사이비종교인이다 라는 확신과 달리, 어느 작가 이름을 호명하더니 짧은 추천사를 밝히곤 수줍게 내려버렸다. 당황스러움으로 인한 단기 기억상실(?)... 다시 들으면 알 것 같은데... 잊어버렸던 작가의 이름을 우연히 다시 접하게 된다. 바로 '데니스 루헤인'이다.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식스센스> 이후였던가... '반전'이란 키워드가 영화감상의 키포인트로 부각되기 시작했고, 수많은 영화에서 '반전'이 누락된 플롯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스릴러적 요소 갖추기에 급급한 분위기란 게 있었다. 개인적으로, 내용을 미리 알고 보는 것이 오히려 감상에 긍정적이라 느끼는 터라, 스포일러라는 경고문구 따위는 하등 문제될 것이 없었다. 책이라고 별다른게 있을까 싶었지만, 적어도 <살인자들의 섬>에서는 몹쓸 습성이었다는 안타까움이 뒤따른다.
살인자들의 섬과 셔터 아일랜드, 그리고 '슬픔'
정신이상 범죄자를 수용하는 셔터 아일랜드의 애시클리프 병원에 연방 보안관 테디처크가 도착한다. 자신의 세 아이를 살해한 전력의 레이첼 솔란도라는 여성수감자의 행방을 찾기 위해서인데, 그녀는 알 수 없는 암호가 적힌 메모를 남긴채 안개처럼 증발해버린 상태. 수감자들의 정신치료 담당인 콜리박사의 도움을 얻어 테디와 처크는 그녀의 행적을 수사하고, 그녀가 남긴 암호의 일부가 섬에 수감된 환자 66명을 제외한 또 다른 인물의 존재를 알리는 단서임을 알아차리게 된다.

콜리박사를 위시한 섬 전체가 레이첼의 실종사건 은폐를 위한 모종의 음모에 동참하고 있을거라 불안해하던 테디와 처크는 허리케인으로 인해 외부와의 연락이 두절된 셔터 아일랜드에 고립되는데, 사라졌던 그녀, 자신만을 위한 환영에 갇혀 살아가던 레이첼 솔란도가 발견된다.

풀리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고 직감한 테디는 2년전 방화에 목숨을 잃은 아내 돌로레스가 등장하는 알 수 없는 상징으로 가득한 꿈과 편두통에 시달리던 중 또 하나의 단서가 아내를 죽인 앤드루 레이디스에 대한 것임을 깨닫고, 병원 어딘가에 수감되어 있을 그를 찾아내 죽여버릴 결심을 한다. 테디는 자취를 감춰버린 동료보안관 처크를 찾던 도중 절벽의 동굴속에서 한 여인과 마주치게 되는데, 자신이 진짜 레이첼 솔란도라 주장하는 이 여인은 애시클리프 병원에서 불법적인 생체실험이 자행되고 있음을 알리고, 테디 또한 그들의 음모에 빠져들어가고 있음을 경고한다. 다시 만난 콜리박사 그리고 병원의 모든 관계자가 애초에 테디에겐 일행이 없었다고 말하는데, 아직 풀지 않은 마지막 암호! 그 안에 답이 있다.

살인자들의 섬 (밀리언셀러클럽3)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 공포/추리소설
지은이 데니스 루헤인 (황금가지,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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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들의 섬>은 마틴 스콜세지가 감독하고, 늙수그레해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연을 맡은 <셔터 아일랜드>의 원작으로, 영화에 대한 '해석'을 요구하는 여러 게시물을 얼핏 접했던 터라, '아주' 대강이긴 했어도, 큰 골격은 알고 있는 상태였다. 마지막 장을 덮은 지금, 영화를 미리 보지 않았음이 한편 다행스럽다. 알고 있는 것이 대강이었던게 다행스럽기도, 대강이어서 안타깝기도 하다. '재미있다'라는 감상평이 주류이기도 했고, 거장 감독과 특급 배우의 조우만으로도 어떤 기준에서든 일정 수준 이상의 감흥을 얻었을 전제가 되었겠지만, 스릴러란 장르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슬픔' 내지 '처연함'이란 생소한 울림이 덜했을 것 같다는 안도감 때문이었으려니...

영화라는 시청각매체가 선사하는 직관성만큼이나 텍스트엔 여백이라는, 독자가 채워나가야하는 공간의 광활함이라는 게 있고, 막연함에서 시작해 글 하나하나를 챙겨가며 진득하게 완성되었기 때문인지, 그 무언가의 형태엔 미묘한 차이가 있게 된다. <살인자들의 섬>의 그 무언가는 '충격적인 슬픔'이다. 뭐 이 따위가 있어! 라는 떨떠름한 기분 뒤로 채워드는 아픔이 여백 곳곳에 가득한 슬픔이다. 범인이 누구인지, 사건의 전모에 대한 궁금증 대신 한 인간의 서글픈 삶에 급격히 젖어가며 느껴지는 속쓰림이고, 여자와 아이, 자신, 바라보던 이들과 지켜주려 했던 이들, 그들 모두의 바람이 이뤄지지 못한데 대한 푸념이기도 하며, 작게는 물결을 따라 흔들리던 통나무의 정체 앞에서 '누군가의 부모된 이'로서 수긍케 되는 안타까움일 테다.

레이첼 솔란드의 실종에서부터 시작되는 셔터 아일랜드란 섬 전체의 음모, 그에 맞서는 테디 보안관 일행. <살인자들의 섬>의 기본 골격은 전형적인 스릴러답다. 테디 일행의 주변을 둘러쌓고 있는 알 수 없는 단서들, 그 안에서 감지되는 음모들... 이를 풀어가며 느껴지는 긴장감은 허리케인처럼 수위와 속도를 높이면서도, 점차 빈도를 높여 찾아오는 테디의 몽환적 세상처럼 여전히 풀리지 않는 상징들로 인해 극한으로 팽창한다. 그러던 중 찾아오는 충격적인 결말. '음모는 있기도 했지만, 없기도 했다'라는 합리적인 풀이를 저 구석으로 밀어버리는 다른 것이 차오른다. 몸을 잔뜩 부풀린 긴장이 순간 온통 한 인간에 대한 처연한 시선으로 바뀌어버린다.

데니스 루헤인의 작가적 능력. 현실과 몽환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도 긴장의 끈을 계속 조여가는 탁월한 구성력, 전쟁이나 폭력이 인간에게 남기는 상흔에 대한 고찰 등으로 인한 재미는 더 이상 <살인자들의 섬>의 감흥일 수 없다. 그가 세밀하게 완성해내는 각 인물들의 심리를 따라가다보면... 늘 물에 젖어서도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테디의 가엾은 아내 돌로레스 샤날을 떠올려야 하고, 배에 뚫린 구멍 위에 얹은 누군가의 손길에 고맙다라고 회한하는 심정만이 남으며, 늘 공포에 질리고 외로움에 시달리던 그녀의 절망과 너무 하얗게 밝아져 마주보기 힘들었을 그녀의 눈빛만이 슬퍼진다.

그리고...그녀를 사랑했지만... 사랑했기 때문에 내버려두었던 한 남자. 모든 걸 잃고, 과거마저 잃어버려 미래조차 확보하지 못했던 한 남자의 '현실과 눈물과 그리고 마지막 태연함'이 여전히 먹먹해진다...  

지하철에서 처음 만난 데니스 루헤인은... 그렇게 슬픔이란 첫 인상을 남겨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