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입되지 않는 나열... '백마산장 살인사건'

사색거리들/책 | 2010. 5. 28. 09:44 | ㅇiㅇrrㄱi

상당히 다작(多作)하는 작가인,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몇 개만으로 그 안에 흐르는 일관성을 찾아낸다는 건 무의미한 시도이겠지만, 여태까지 몇 안 되는 작품을 접하면서 나름 괜찮다고 느꼈던 큰 이유는, 단순한 재미보다는 독자가 동참할 수 있는 여지를 많이 주고 있다는 신선함 때문이었다. 천재적인 탐정이나, 그에 못지않은 수완의 등장인물들의 활약상을 멀찍이 타자 입장에서 지켜봐야 했던 다른 추리소설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으니, 1인칭 서술이나 정교한 감정묘사의 3인칭 서술이 주는 기법이, 어느 정도 감정이입/동격화가 가능했던 소재거리와 묶여 느끼게 되는 신선함이었으리라.
여대생 나오코는 친구 마코토와 함께 백마산장의 머더구스 펜션을 방문한다. 1년 전 겨울 '마리아 님은 집에 언제 돌아왔지'라는 의문의 메시지를 남기고 자살한 오빠 고이치. 나오코는 오빠의 죽음에 의문을 품고... 매년 같은 시기, 같은 멤버들이 묵는 머더구스 펜션에서 오빠의 1년전 행적을 좇아간다. 영국의 전래동요 머더구스의 노래를 이름으로 딴 8개의 룸에는 머더구스의 노래가사가 하나씩 걸려있다. 오빠가 이 노래가사에 숨어있는 암호를 풀어 무언가를 찾으려 했다는 걸 알고, 나오코와 마코토는 8개의 룸을 돌아다니며, 1년 전의 투숙객들을 마주하며 단서들을 수집하는데... 돌연 발생한 또 하나의 살인사건, 밀실트릭에 묶여 있는 오빠의 죽음 그리고 오래전 있었던 투숙객의 추락사... 이 3가지 사건의 연결고리엔 노래가사에 숨겨진 암호가 중요한 단서가 됨을 밝혀낸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백마산장 살인사건>은 이전 유익했던(?) 작품과는 거리가 있다. 머더구스 노래가사라는 낯선 소재거리가 주축인데서 오는 거리감도 있을 테고, 나오코가 고이치의 뒷 행적을 따라가며 복잡스럽게 펼쳐진 여러 단서들을 조합하는, 즉 추리하는 과정들에선, 지난 번 <회랑정 살인사건>을 보며 느꼈던 우연적이면서도 지독스럽게 잘 맞춰진 조합들이 나열되고 있어, 등장인물 또는 소재거리 자체에 대한 감정이입보다는 철저하게 제 3자로서 갖는 관찰자의 시선만이 독자에게 강요되는 편이다. 누군가 살인을 하고 은폐하고 있으나 우리의 주인공이 천재적인 추리과정을 통해 범인을 발견해낸다... 라는 단순한 흐름을 갖고 있으니 읽기의 무리스러움이란 없을 것이지만, 여타 추리소설과의 차이성이란 걸 굳이 결론부분에서 찾아내기도 힘들만큼... 나름대로 제시하는 반전과 반전이 주는 효과 또한 맥 빠지는 노릇일 지경...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만 아는 신호가 있어서 언제든 함께 하게 되지.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는 뒤죽박죽 전혀 맞지 않는 콤비인데도 이상하게 같이 있으면 죽이 척척 맞는 사람들 말이야...
이 단순한 대화를 들으면서 나오코는 머더구스 노래가사의 암호를 풀 수 있는 중요한 단서인, 노래가사의 조합이란 영감(?)을 얻게 되는데... 말 그대로 우리의 주인공에게나 떠오를 수 있는 영감일 뿐이지, 독자입장에서는 뜬금없는 식의 해결과정일 수밖에 없으니, 나름대로 반전의 역할을 하는 마코토의 암호 재해석 결정이란 것도, 잠자다 말고 일어나 일방적으로 제시하는 아이디어로, 전개과정에 대한 긍정적인 몰입보다는 그 번득이는 두뇌에 일종의 당혹스러움까지 느끼게 된다.

백마산장 살인사건
카테고리 소설 > 일본소설 > 공포/추리소설
지은이 히가시노 게이고 (랜덤하우스코리아,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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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당혹스러움... 범죄의 동기나, 범인 찾기 과정에의 긴장감 등에 대한 이입이 불가능할 만큼 지나치게 방대하고... 너무나 시기적절하며, 지나치게 나열위주인 추리만을 위한 추리의 과정 때문인지, 경악스러울거라던 비밀의 규모는 그 크기를 잃어버리는데... 불현듯 끼어드는 멜로코너 마저 제자리를 찾기 힘든 건 이미 나열되어 있는 것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일 듯... 그래서 그저 가볍게 읽기에만 적합해 보인다. 읽는 재미만큼이나 아쉬울 따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