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적인 사랑과 기대되는 사랑... '잠자는 숲'

사색거리들/책 | 2010. 6. 8. 14:59 | ㅇiㅇrrㄱi

고독한 삶을 살아가는 발레리나...
잠자는 숲>은 일종의 밀실살인에 다름 아니다. 단지, <백마산장 살인사건>이나 <회랑정 살인사건> 등 공간상 제약을 두고 진행되었던 여타 작품과 달리... 이 작품의 밀실은 '다카야나기 발레단'으로, 결국 모든 사건의 원인과 경과는 발레단 내부 즉 발레단원들 개개인의 면모와 분리되지 않을 것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다. 한정된 배경으로 발레단이 제시되기 때문에, 작가는 단원들의 춤에 대한 열정과 맹목적인 삶 뒤의 그늘진 모습들에 대한 묘사에 상당부분을 할애하고 있고, <잠자는 숲>의 시작과 끝 또한 이들이 예술가이기 이전에 인간이어서 갖게 되는 고뇌 자체와 맞닿아 있다.
다카야나기 발레단의 사무실, 한 남자의 시체가 발견되고, 발레리나인 하루코는 무단 침입한 남자와의 실랑이 도중 발생한 우발적 사건이라며 정당방위를 주장한다. 사건현장에 도착한 발레리나 미오 또한 절친인 하루코의 무고함을 주장하는데... 가가형사는 미오가 언젠가 관람한 백조의 호수에서 '흑조역에 분했던-매혹당했던' 발레리나임을 알고 호감을 갖게 된다. 시체는 미국행을 며칠 앞둔 미술학도로 밝혀지지만, 그의 집에서 발견된 발레티켓을 제외하면 다카야나기 발레단과는 어떤 관련도 없는 인물이다. 가가형사가 침입동기에 의혹을 품고 발레단 주변을 탐문하기 시작하던 중, 발레단의 수석연출가인 가지타가 살해당하고, 다른 단원에 대한 살해시도, 용의자의 자살이 이어진다. 발레단 내부에 숨겨진 무언가가 있음을 눈치챈 가가형사는, 각각의 사건을 대하던 중... 춤 하나로 살아가는 고독한 발레리나들의 슬픈 사연과 대면하게 되는데...
드라마를 보자면, 월등한 실력의 동료 발레리나를 시샘해 모함에 빠뜨리고, 그 역할을 꿰차는 식의 소재가 종종 등장한다지만, 실제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소한 듯 보이지만 쉽게 넘어설 수 없는 실력차는 고된 훈련과 각성에 의해서만이 만회될 수 있음을 발레리나 본인들이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기 때문에, 춤 실력 외의 무언가로 경쟁자를 넘어선다는 것 자체가, 그네들의 자존심상 허락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어느 단원의 말마따나 춤에 대한 열정과 자존심, 절제 등으로 버티어가는 사람들이기에, 지극히도 일상적인 것들에 쉽게 마음을 내줄 수 없는 사람들이기도 한데... 비극이 시작하는 지점이다.
가가형사의 멜로...?
여기에 그간 연마한(?) 따뜻한 인간성 하나로 사랑전선에 뛰어드는 사람이 있으니 다름아닌 우리의 주인공 가가형사다. 덩달아, 가가형사의 사적인 면모가 적잖이 언급되고 있는데, <붉은 손가락>에서 애틋하게 이별하게 되는 부친과의 단촐한 대화장면, 옛 애인으로부터의 편지와 그 첫사랑 이야기 등이 있다. 발레리나 미오에게 조금씩 마음을 내놓던 이 남자, '너무나도 남성적인-의외의 씬'으로 마무리하며, 그 뒷 얘기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을 자극한다. 
잠자는 숲
카테고리 소설 > 일본소설 > 공포/추리소설
지은이 히가시노 게이고 (현대문학,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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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박하게 전개되어야할 추리소설에서 주인공의 멜로가 한 축으로 작용하기 때문인지, 독자입장에선 다소 손해보는 부분이 있게 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팬이라면 누구나 바라마지 않는 반전의 충격이 그 중 하나, 등장인물들이 갖는 행위의 필연성에 대한 묘사가 또 하나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은 많지 않은 분량과 간결한 문장이 특징이다. 그로 인해 읽기의 수월함이란 부수적인 장점도 얻을 수 있겠지만, 달리 보자면 짜임새 있게 맺어진 인물간의 관계, 긴박한 사건과 사건의 연결에 대한 응축이 돋보이곤 하는데... 즉 그의 작품을 덮고 나면, 별 비중도 없이 사소하게 언급된 것들이 거의 없다 싶을 만치 모든 것들은 철저한 인과관계속에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되고, 재미가 베어나오는 부분이다.

가가형사의 멜로는 이 짜임새-인과관계를 다소 산만하게 한다. 사건의 핵심이 되는 발레리나의 슬픈 사랑이나 사건 관련자들의 행위들에 대한 전후 묘사는 다소 가볍고, 간단하며, 느슨한 편이다. 사건해결의 단초가 되는 범행도구의 발견이란 계기가, 데이트(?) 도중 목격한 한 광경때문이란 우연성 자체가 철저하게 정황과 증거로 사건을 해결해내는 가가형사의 여타 방식과는 좀처럼 어울리지가 않는다.
기대되는 사랑 이야기...?
구구절절히, 각 인물들의 아픈 사연에 대해 언급하기도 불가능하겠지만... 여느 작품에서 느껴졌던, 작가 또는 주인공의 사람에 대한 세심한 시선도 그리 절절하지 않기에... 의외의-사실 의외스럽진 않았지만... 범인이 드러났을땐, 작가의 장점인 반전에 의한 충격보다는... 그랬었구나 하는 수긍의 정도란게 그저 이해 수준에서 머물고 만다.

아무튼, 느슨하다곤 해도 혜안을 번득이며 추리에 몰두하는 가가형사의... 격정(?)을 지켜볼 수 있다는 건 히가시노 게이고가 독자에게 건네는 선물일 수도 있으니... 가가형사의 팬이라면 느슨한 스토리 전개를 무릅쓰고라도 충분히 읽어볼만 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