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지로는 이제 세상에 없다 '회랑정 살인사건'

사색거리들/책 | 2010. 5. 24. 09:43 | ㅇiㅇrrㄱi

'나', 기리유 에리코는 이미 죽었다. 재벌인 이치가하라 다카아키의 비서였던 나는, 이치가하라 일가의 가족모임이 예정된 회랑정 여관에서, 목숨과도 바꿀 수 없던 애인 사토나카 지로를 잃고, 가까스로 살아남았지만, 복수에 대한 일념으로 나를 죽였다. 자살을 가장해 내 흔적을 지우고, 이치가하라 일가와 연을 맺고 있었던 혼마 기쿠요라는 노부인으로 살아가며 완벽한 복수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중, 다카아키 회장의 죽음 이후, 유언장 공개를 앞둔 회랑정의 가족모임이 예고되고, '나' 또한 참관인 자격으로 초대를 받게 된다. 소중한 사토나카 지로는 살해당했다. 나의 지로는 이제 세상에 없다. 회랑정 여관에 모인 이치가하라 일가, 이 안에 범인이 있다.
<회랑정 살인사건>은 가까스로 죽음의 위기를 모면하고 살아남았지만, 자살을 가장하고 복수의 일념으로 때를 기다리던 기리유 에리코의 1인칭 관점으로 서술된다. 본인이 죽을 뻔 했던 비극적인 현장 회랑정의 바로 그 방(A-1 Room)에 노부인의 신분으로 위장한 채 돌아와, 범인 찾기 과정과 함께 참혹한 과거에 대한 곱씹음을 속도감 있게 전개해 간다. 못난 외모 탓에 얻게 된 젊은 날의 상처와 그 상처를 딛고 회장의 비서로까지 급상승하게 된 배경,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랑하게 된 지로에 대한 회상 너머로, 치열할 수밖에 없었던 삶 자체를 붕괴시킨 그 누군가에 대한 원한을 되새기게 된다.
지나치게 우연적인 상황들...
이 작품에서도 히가시노 게이고의 독자를 위한 친절한 배려는 끝이 없을 지경이다. 기리유가 복수를 품게 된 전후사정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하나 범행가능성이 있는 대상들을 추려가는... 독자의 몫일 수 있는 추리의 과정은 기리유의 1인칭 서술에 의해 의심의 내용, 그 근거와 해소되기까지의 흐름이 각 단계별로 제공이 되니, 그저 끄덕거리면서 읽기만 될 뿐... 별다른 고민 없이 기리유의 시선으로 책에 빠져 들어갈 수 있다. 물론 우리의 주인공에게 무작정 의지할 필요는 없으니 추리소설의 가장 큰 묘미, 독자 스스로의 범인 찾기에 어느 정도 성과를 올리고픈 바람이 있다면, 그 시선과 생각의 흐름에 넋을 놓고 빠져들기 보다는, 주인공이 흘리는 사소한 것들을 꼼꼼하게 챙겨두기만 하면 된다.

회랑정 살인 사건
카테고리 소설 > 일본소설 > 공포/추리소설
지은이 히가시노 게이고 (랜덤하우스코리아,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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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없이 쉽게 읽힌다는 장점과는 달리... 회랑정 내에서 현재 시점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전제가 되는 상황, 즉 기리유의 위장자살 후, 노파의 삶을 대신하고... 때마침 회랑정에서의 가족모임에 초대받아 복수의 기회를 얻게 된다는 가장 큰 이야기의 흐름이 절묘하게도 시기적절해 다소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지우긴 힘들다. 사실, 제 아무리 첨단의 시대라고 한들... 30대 여성이 70대 노파로 분장하고 주위 사람들을 깜쪽 같이 속여 넘길 수 있다는 게... 들통이 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기리유의 긴장과 나이에 비해 젊음이 느껴진다는 식으로 가벼이 지적하는 주변인들의 말을 통해 작가가 그 가능성을 적당히 두둔하곤 있지만 썩 개운치만은 않은 느낌이다.
교훈... 그리고 범인 찾기...
유산에 몰두하는 이치가하라네 사람들의 모습에서 물질지상주의를, 외모 탓에 짝사랑하던 직장 상사에게 크게 상처받고, 그간 남자하나 없이 외롭게 살아가던 기리유의 모습에선 이 시대에 만연한 외모지상주의를... 마지막에 밝혀지는 범죄행위를 통해서는 돈에 인성을 팔아버리는 자본주의의 병폐(?)를, 작가가 은근히 비판하고 있다지만... 그렇게까지 짜 맞출 것까지야 있을까... 사실, 불행한 한 여인네의 비극적 삶을 조망하기엔 사건의 진행이 너무나 급박하기 때문에 그렇게까지의 마음 씀이란 게 여유 없을 수도 있겠고, 너무나 동떨어진 극적 상황 탓인지 1인칭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과 일체화되기보다는 거리감을 두게 된다. 여성의 속내 표현이 가장 힘든 일이라는 작가의 토로처럼... 작가의 불안정이 반영되었을 수도 있고, 읽는 내가 남자이기에 갖는 한계일 수도 있으려나...

아무튼... 중간 정도엔... 사건의 전모까지는 아니더라도 범인이 누구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는데, 초반부의 큰 단서, 기리유는 자신이 목을 조른 범인의 얼굴을 알고 있을 것이다 라는 짐작, 끊임없이 반복되는 말, 나의 지로는 이제 세상에 없다... 라는 대사가 그것이다. <회랑정 살인사건>의 경우, 앞전에 읽었던 <붉은 손가락>과는 달리 공감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한 거리감이 상당했던 터라, 책 읽기는 범인 찾기와 다름 아니었고... 그런점에서 보자면... 다소 맥 빠지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나의 지로는 이제 세상에 없다...
누군가의 지로, 나의 지로가 죽었거나 살았거나... 아이스피크로 사람을 찌르고 목을 조르거나 분신을 할 만큼의 사랑과 배신이라는 심정에 공감키엔... 이제 내 나이가 너무나 많아져버렸다. 그래서 재미만 있다. 나의 지로여 안녕이 아닌... 나의 감정이여 이젠 안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