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의 누군가...

사색거리들/산(山) | 2016. 7. 4. 19:06 | ㅇiㅇrrㄱi

  1994년... 당시 역대 최악이라 하는 무더위가 기승이었던 6월 현역으로 입대를 했다. 매일 정제된 소금 알맹이가 배급되었고, 훈련 도중 앞뒤에서 쓰러지는 젊은 덩치들이 부지기수였으며, 농업이 가입인 훈련병들에겐 특별 휴가가 주어지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차인표라는 낯선 연예인이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다는 훈련소 밖 소식 사이로는 멀쩡한 계란을 자동차 보닛 위에 올려놓고 익히기 경쟁을 하느라 분주했던 뉴스가 종종 끼어들기도 했다. 열기 때문이었을까? 전염병이 돌았지... 자대배치 후, 매일 눈 시뻘건 감염자들을 만들어낸 아폴로 눈병 탓에, 연병장 구석 창고를 활용한 임시거처로 내몰려 노숙자와 다름없는 신세를 보내기도 했다. 건강한 이들이 사는 연병장 윗 나라에서 매끼니 때마다 내려오는 식판이 그리웠던... 1994년의 여름이었다.

 

  입대 후 6개월 지나 나오는 일병 진급휴가를 갈 수 있었고... 무기한 연기를 스스로에게 선언했다. 소중한 첫 휴가에 대한 바람을 연기했던 건, 입대 한 달 여전, 홀로 다녀왔던 지리산 산행에서의 약속 때문이었다. 군대 가기 전 혼자 여행이나 다녀와봐... 라는 선배의 조언에 대학 1, 2학년 여름 방학 때 단 두 번 가보았던 지리산을 떠올렸고,  종주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 안에서 했던 약속이 있었다. '곧 다시 오마... 건강한 모습으로 조만간 다시 오마...' 뭐 그런 결연한(?) 내용이었지. 남원에서부터 한참을 굽이굽이 이어지는 지리산 펼친 자락을 좇으며 슬며시 눈시울을 붉히며 까지 했던 약속인지라 지켜야만했던 것이다. 사실, 한 번의 경험도 없었던 겨울 산행은 엄두가 나질 않아, 꽃 필 무렵의 봄으로 휴가를 미루고 있었던 게다. 4월 말이면 철쭉 핀 화려한 지리산을, 세석의 만개한 철쭉을 직접 볼 수 있겠다는 바람이 있었던 건데... 요즘 같이 검색 한 번으로 온갖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상황에선 이해하기 어려울 무지의 소산이었을 뿐... 아무튼, 4월 말경에 휴가를 나오자마자 바로 서울역으로 가서 남원 행 밤 기차표를 끊었다. 가족들과 간단히 인사하고 당일 23:50 밤기차로 출발. 주능선 종주는 이미 해보았으니, 남부능선 종주를 해보자 즉석에서 산행계획도 잡았다. 쌍계사에서 출발해 지리산 10경 중 하나인 불일폭포를 보고, 세석산장에서 1박, 다음 날 천왕봉에 들렀다가 한신지계곡 쪽으로 하산, 밤차를 타고 다시 서울로 복귀!

 

  남원에서 쌍계사까지 버스로 이동했고, 산행 초입 길에서 본격적인 등산준비를 시작했다. 군대에서 축구할 때나 입던 짧은 반바지와 민소매 티로 갈아입고, 물을 뜨면 준비 끝...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당시 갖고 다니던 등산용 수통 뚜껑에 고무이음새가 빠져있는 걸 발견했는데, 그 상태로 물을 담으면 줄줄 흘러내릴 터였다. 준비할 때 분명 있었으니 배낭 저 아래 처 박혀 있는 게 확실했지만, 텐트까지 포함해 그 많은 짐들을 다 들어낸다는 건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냥 출발했다. 이래봬도 육군 일병인데, 물 없다고 무슨 일이 나는 것도 아니고, 누구 만나면 얻어 마시거나 하면 되겠지... 라는 무지한 생각이 있기도 했고... 물만큼의 기운을 불어넣어줄 상징인마냥 자랑스레 목에 걸고 있던 군번줄을 몇 번 부지작거렸던 것 같다.

 

  산행 길 초입부터 고역의 연속이었다. 우선 체력문제였는데... 큰 훈련이나 운동 없이 보낸 겨울 탓에 몸이 다소 불어 있었다. 어마어마한 배낭 무게와 함께 경사 자체를 감당할만한 체력이 아니었던 게다. 걷다 힘들면 쉬고, 잠시 걷다 또 쉬고, 도대체 내가 여길 왜 왔나 하는 한탄 속에 지난 약속의 결의와 육군 일병으로서의 자존감은 가쁜 숨 속에 금방 소진됐다. 다음으로, 식수 문제... 식수를 준비 안한 게 얼마나 무지하고 미련스러운 일이었는지는 계곡이 끝나고 본격적인 종주 길에 들어선 다음에야 알게 됐다. 식수를 동냥할만한 등반객 하나 만날 수 없었다. 결국 그날 산행 종료까지 단 한 사람도 만나질 못했으니... 봄철 산불로 인한 통제기간임에도 나를 입장시켜준 국립공원관리공단 측의 무책임에 대해 한참을 투덜거렸던 시간이었다. 아무튼, 지도를 보니 세석산장 바로 아래 음양수샘 그리고 산장 조금 못 미친 곳에 샘물 하나가 표시되어 있었고, 그때까지만 참자 싶었다. 나무뿌리에서 떨어지는 눈 녹은 물을 받아 마시다가, 밑반찬으로 싸간 김칫국물을 마셔가며 갈증을 버텨내려했고... 소금기 가득한 김칫국물이 더 큰 갈증을 유발한다는 일상의 지혜따위는 애시당초 없었으니까.

 

  눈 녹은 물...! 또 하나의 난관은 날씨였다. 4월 하순이면 지리산 전체가 철쭉을 비롯한 봄꽃으로 만발할 줄 알았는데... 꽃은커녕 이파리 달린 나무 하나 보기 힘들었다. 눈이 녹다 만 얼음덩어리들이 보일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능선 길에서의 바람과 추위는 정말 대단했고, 반바지와 민소매 차림이었으니 추위와 함께 나뭇가지에 긁힌 상처기는 여기저기 늘어만 나고... 너무 힘들었다. 아팠다. 그러던 중... 너무 추워서 싸구려 등산점퍼를 꺼내 입고 걸었다. 잠시 걷다보니 어지럼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걷다보면 몸에서 후끈후끈 열이 나는데, 열이 방출되질 못해 그러려니 해서 벗고는 걷고, 그렇게 걷다보면 너무나 추워 다시 입고, 그런 와중에 어지럼증이 찾아오고... 반복이었다. 능선 어디에서인가 다시 어지럼증이 생기기에 바위에 걸터앉았다. 시계를 보니 오후 5시경... 지도를 보며 어림짐작을 해보니 앞으로 2-3시간 정도면 산장에 도착하겠네? 빨리 걸으면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할 수도 있겠구나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잠시 후...? 누군가가 나를 흔든다. '일어나, 빨리 일어나!' 눈을 떴다. 주위는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해가 일찌감치 진 상태였고, 한 밤 중이었다. 잠깐 앉아 있는 다는 게 그만 잠이 들었던 게다. 그 사람(?)이 또... '빨리 일어나! 어서 가야해!' 재촉을 했고, 바로 뛰기 시작했다. 뒤에서는 계속 목소리가 들렸다. '빨리 가야해! 빨리!' 하나, 둘, 셋 하면서 뛰고 있는 걸음 수까지도 맞춰주었다. 그렇게 10여분 넘게 뛰다가 그제야 이상한 생각이 들어 뒤를 돌아 봤고... 아무도 없었다. 어둠속엔 아무도 없었다. 달빛에 기대 산죽나무 무성한 등산로를 훑는 숨 가쁜 한 사람... 나 뿐이었다. 오싹했지만, 그러고 있을 틈이 없었다. 랜턴을 꺼내들곤 뛰다시피 걸었다. 음양수 샘을 만나 종일 갈증났던 몸덩이를 채우고 걷다 보니 여기저기 텐트 터와 가는 물줄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다시 어지럼증이 나타나는데... 코 앞의 산장까지 갈 힘 따윈 남아있지 않다 판단해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급히 요기를 하고 잠을 청했다. 너무 지쳤더랬다. 힘들었고... 졸렸다. 다른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여유는 없었으니... 도대체 누구였을까? 하는 궁금증만 잠들기 직전 슬쩍 지나쳤던 기억이다.

 

  그날 밤 추위는... 끔찍했다. 가벼운 홑이불 하나로 이겨낼 만한 정도가 아니었다. 질식해 죽을 수 있다는 거 뻔히 알고 있었지만, 텐트 안에 버너를 켜놓고 그냥 자버릴 정도였다. 가스버너에 불이 켜지자마자 훈훈해지는 열기에 만족해하며 죽어도 모르겠다 싶은 심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저 위 세석산장의 쓰레기 수거차 들렸음 직한 헬기의 요란한 소리에 깨어나... 텐트 밖을 내다보고는 깜짝 놀랐다. 4월 말인데... 텐트 터 사이로 흘러내리던 물은 모두 얼어 있었다. 세석산장 편에서 텐트 터 사이 등산로를 따라 내려오는 물줄기들이 꽝꽝 얼어 있었다. '텐트 칠 곳도... 물을 구할 곳도 없었던 그 능선 길에서 계속 잠들어 있었으면, 이 추위에 큰일 날 뻔 했구나, 그 누군가가 날 깨워주지 않았다면 얼어 죽었겠구나' 싶었다. 신 내지 미지의 존재를 믿지는 않는 터였으나... 그 때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가 나를 도와줬구나... 나를 살려줬구나... 산이 나를 도왔구나...' 싶었을 뿐... 수분 부족과 극심한 피로 또는 해지기 전 산장에 도착해야한다는 강박이 만들어낸 환각 같은게 아니었을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리 치부하기엔 흔들어 깨우고 따라오며 재촉하던 그 목소리가 너무나 생생했다.

 

  그 날부터의 산행은 원활했다. 세석산장부터는 등반 객들이 한두 명씩 보였고, 몸도 이상스레 개운했다. 천왕봉에 들려 지리산 구비구비를 조망하고, 한신지계곡 쪽으로 하산하는 길... 미끄러지거나 나무둥치에 머리를 부딪치거나 할 때마다, '아... 산이 나에게 조심하라는 가보다...' 하곤 머리를 조아렸고, 산행이 마무리되던 계곡 말미에서는 과일 하나 돌 위에 올려놓고, 한참동안 인사를 드렸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지리산에서의 3번째 산행을 끝냈다. 상병 휴가 때도, 병장 휴가 때도 지리산을 찾았고, 산행 길 매순간순간 산에게? 또는 그 무엇에게? 감사를 드렸다. 누군가 또는 어떤 존재로부터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 탓인지... 지리산의 능선과 계곡, 사소한듯 뿌리내리고 있는 나무 한그루까지도... 내겐 영험의 대상일수밖에 없었다. 문득 의문이 치밀때가 있긴 하다. 당시 학교 산악회 활동하던 선배는 '산신령’이 지켜준거다... 라고 해기해주었는데... 신령이든 귀신이든 또 다른 무어든... 그냥 '산'이란 존재 자체가 신성한 대상이 되어 버린 계기였을 뿐... 명확하진 않다.

 

  도대체...? 누가 나를 깨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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