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악의들로 넘쳐나는 세상 '악의'

사색거리들/책 | 2011. 2. 11. 13:38 | ㅇiㅇrrㄱi

모든 것이 종료된 상황에서,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된다
27페이지에 이르면 이후 내용의 시발점이 되는 히다카의 시체가 발견된다. 85페이지부터 106페이지 사이에서는 용의자의 알리바이가 격파되고 범인으로 체포되기에 이른다. 107페이지부터 245페이지에 걸쳐 범인의 살해동기가 밝혀지고, 그 다음부터는 담당형사와 주변인물간의 독백이 교차하며 누군가(?)의 악의가 드러난다.
 
악의
카테고리 소설 > 일본소설 > 공포/추리소설
지은이 히가시노 게이고 (현대문학,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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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수를 기재해본 건... 어느 정도 예상이야 있었지만, 책 읽는 동안의 당황스러움을 전하고 싶어서인데, 초반부 긴박하게 돌아가는 살인사건의 전후과정이야 속도감 확보를 위한 작가의 배려라 한다 쳐도, 불과 100페이지가 안되어 범인이 밝혀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여곡절 사연이 담긴 살해동기까지 밝혀지니... 여전히 오른편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남은 분량의 두툼한 정도를 고려해볼 때, 도대체 무엇이 이 뒤를 차지하고 있을까 싶은 의아심? 걱정? 등이 다소 있었던 게 사실이다.
베스트셀러작가 히다카의 시신을 친구이자 아동문학작가인 노노구치가 발견한다. 한때, 노노구치와 동료 교사로 재직했던 가가형사는 그가 기록 중이라는 사건 수기에 큰 관심을 보인다. 수기를 토대로 알리바이가 조작되었음을 간파하고 범인으로 그를 지목하게 되는데, 범행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동기에 대해서는 함구하는 노노구치. 가가형사는 히다카의 발표작 대부분이 실제로는 노노구치의 작품이었음을 그 배경엔 불륜 등을 빌미로 한 히다카의 협박이 있었음을 밝혀낸다. 돌연, 피해자는 파렴치한 협박 꾼으로 가해자는 가여운 희생자로 역할을 맞바꾼다. 문득 노노구치의 오른 손가락에 박힌 굳은살을 보게 된 가가형사에겐 기괴하고 비현실적인 생각이 떠오르는데... 실마리를 따라 사건을 재구성하던 중 마주치게 되는 추악한 현실...
범인을 다 드러내놓고 본격적인 이야기를 전개하는 등의... 히가시노 게이고가 종종 보여주었던 여러 작품 탓에 낯설음은 덜했지만, <악의>의 경우는 여타 작품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이는 <악의>가 전형적인 추리소설의 방식을 일부 고수하고 있어서인데, 사건이 발생하고 주인공의 추리과정을 거쳐 범인이 검거되고 범행동기에 대한 설명으로 주요 사건이 마무리되는 방식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보편적인 추리소설의 전개 특성에 맞춰 초반부가 진행되기 때문에, 범인이 검거되었을 뿐만 아니라 범행동기마저 밝혀진 상황에선 모든 것들이 종결되어 더 이상의 이야기 전개가 불필요함을 느끼게 된다.

나름 반전이라 할 만한 극적인 기점들이 몇 차례 반복됨과 동시에 가가형사가 보여주는 번득이는 혜안의 추리과정이 노노구치의 체포와 그 살인동기가 드러나는 긴박한 흐름에 겹쳐지며 주된 긴장요인이 해소되고 마는데 독자 입장에서는 엔딩에 다다랐다는 느낌이 더 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정작 후반부가 작품의 핵심으로... 여태 '그려진-완성된' 듯 보인 정황들이란, 사건의 본질 즉 살해동기에 대한 역전극(?)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장치였음을 알게 된다. 추리소설의 '기-승-전-결'을 갖춘 사건 자체의 종료(전반부)는 한 인간의 악의에 대한 본격적인 시작점일 뿐이다.
말할 입을 빼앗겨버린 선의(善意)가 음습하고 치밀한 악의(惡意)에 의해 철저히 말살되는 데 대한 분노가 가슴속에 회오리바람 같은 열정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을까...?
명백히 앞뒤가 들어맞는 얘기, 가가형사 본인으로서도 일처리 능력에 자부심까지 갖게 하던 이번 사건은 치밀한 두뇌싸움의 덧에 교묘하게 걸려든 본인의 사고 뒤엎기를 통해 재해석되는데, 결국 드러난 한 인간의, 인간에 대한 논리적 해석이 불가능할 악의란 것을 범행의 단서로 제시하기에 이른다.

가가형사의 재수사는 본인(?) 말로는 왠지 모를 찜찜함 때문으로, 옮긴이의 해석으로는 선의(善意)를 회복하고픈 강한 분노에 의해 촉발되었다는데... 여하튼, 피해자의 피해사실과 가해자의 범죄 행위 또한 명확하니... 이제 의심의 여지는 피해자, 가해자 각자의 인간적인 면모 또는 그 둘 간의 얽힌 관계로 옮겨갈 수밖에 없다. 결국 살해동기만이 돌이킬만한 과제로 남는데... 작가의 큰 매력점인 인간 또는 인간성에 대한 나름 세밀한 관찰력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게 된다.
마음에 안 든다, 아무튼 마음에 안 든다...
한편, 드러난 사람 속이란 게 너무나 철저히도 조작되었고, 천재적이며, 악랄하기 때문에 아무튼 마음에 안 든다 라는 식의 악의 자체가 담고 있는 단출한 상징만으로 도대체 납득할 수 있겠냐 싶기도 하지만... 누구나 여러 차례 겪었을 까닭모를 증오, 시기나 질투, 증오 등을 평생 동안 담아온 이 라면... 또 악역으로서의 천재적인 존재감을 갖춰 낸 이라면 충분히 해낼까도 싶어진다.

실제 동시대의 어딘 가에선... 아무튼 마음에 안 들어서... 라는 비논리적이며 이성적이지 못할 감정상의 이유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누구를 괴롭히고, 누군가를 죽이며, 무언가를 강탈하거나 핍박하는 등의 반도덕·반윤리적 상황들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공감되는 바도 있을 테니... 악의라는 단어가 갖는 과감한 생략 내지 비약에도 불구하고 그네들 마음 한 편으로 수긍하는 심정이 놓이는지 모를 일이다.

아무튼... 우리 스스로는 그 모든 것들을 꿰뚫는 혜안을 갖춰내야 한다. 또한, 악의 자체에 대한 대응으로 일방적인 거부감만을 떠올릴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설명해낼 수 있는 악의를 갖추는 것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데 있어 필수적인 덕목이 아닐까...? 지독스런 악의 하나만으로 대하더라도 끄떡없을 거대한 악의들로 넘쳐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이런 세상에선 제 스스로가 의도된 악의를 마련해 날이 무뎌지지 않도록 늘 가다듬는 자세가 분명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