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행복 선택자들의 가난한 삶? '지리산 행복학교'

사색거리들/책 | 2010. 12. 15. 07:00 | ㅇiㅇrrㄱi

지리산(智異山)... 이 단어가 눈에 들어오면 할 말이 참으로 많아진다.
고백컨대... 학창시절 내내 오래달리기 꼴등을 수성하고, 고교 연합고사 체력장 16점이라는 전무후무한 대기록의 달성자였던 내게, 대학 신입생 때 고학번 선배들의 반강압적인 권유로 따라나선 지리산 산행은 무리일 수밖에 없었다. 꽁지작가와 마찬가지로 심해어족 출신인 듯 조금씩 높아지는 고도에 비례해 찾아오는 현기증 탓에 잠시 주어지는 휴식시간마다 까무룩 졸기 일쑤였고, 차마 돌아내려갈 엄두조차 내지 못할 지점부터는 오로지 여선배의 등산화 뒤꿈치에 눈을 박아놓고 걷기 시작했다. '그래... 내가 그래도 남자인데, 여자도 저리 씩씩하게 오르는 길을 나라고 못갈 리 없다'며 뜻하지 않은 남성우월 사상에 바드득 이를 갈고, 앞선 선배들의 뒤통수와 애꿎은 지리산에 저주를 퍼부으며 이어갔던 산행이었다.

이 빌어먹을 곳 다시는 오나 봐라... 결열한 결심과 달리, 지리산 산행은 그 다음 해에도, 또 다음 해에도... 이어졌고, 입대 전 홀로 떠났던 첫 산행 길을 되돌아올 때에는 굽이굽이 이어져 따라오는 산세를 바라보며 이젠 너마저 못 보겠구나 싶어 눈물이 왈칵 차오르기까지 했으니 사모하는 연인을 대하는 심정에 다름 아니었던 듯싶다. 이등병 첫 휴가를 일병 달고도 미루고 미뤄 이쯤이면 봄꽃이 볼만하겠구나 싶은 때로 골랐던 것도, 부대를 빠져나오자마자 술주정에 해롱거리는 선임들을 버려두고 서울역으로 향했던 것도, 밤 11시 50분경 출발하는 남원행 무궁화호 기차표를 끊어야 했던 것도 모두 지리산에 가야한다는 설레는 강박 때문이었으니 그곳에 숨겨둔 여인네라도 있는 것 아니냐는 비아냥거림도 있었던 듯싶다.

사실, 이등병 첫 휴가 때의 단독산행에서 겪었던 기이한(?)체험은 지리산을 그저 가고 싶은 곳 정도가 아니라 영험한 신비의 장소로 격상시켜버리게 되는데, 쌍계사에서 세석산장까지로의 남부능선 종주길. 본격적인 산행 전 물을 넣어야할 등산용 수통에 고무이음새가 사라져버린 것을 알아채고는 물 없이 오르기로 결정한 미련스러움이 화근이었다. 늦은 4월의 어느 날... 등산객은 단 한명도 없고, 만개했을 꽃무더기는커녕 눈도 채 녹지 않은 산길을 오르고 오르다, 찾아오는 갈증을 달래겠다고 소금기 가득한 김칫국물을 마셔가는 극단적 무식으로 인해 대한민국 육군 일병은 지리산 능선 길 어딘가에서 절명하겠구나 싶은 시간이 이어진다.

번갈아 찾아오는 현기증과 추위에 시달리다 어느 바위에 걸터앉았던 그때는 늦은 오후로 달려가던 시각이었고 이대로 두어 시간 걷다보면 세석산장 근방의 야영지에 다다르려니 하던 참이었다.

그리고... 누군가 나를 흔들어 깨운다. 큰일이라고 서둘러 걸으라고 뛰라는 재촉...

눈을 떠보니 해가 있어야할 하늘엔 달이 덩그러니 걸려있다. 주변에 어둠만이 가득하니 아마 오래도록 잠이 들어있었던 것 같았는데 어쩌나 싶은 당혹감을 떠올릴 새도 없이 그 누군가의 재촉에 뛰기 시작했고 그는 하나 둘, 하나 둘... 걸음의 박자까지 맞춰주며 뒤를 따랐다. 그렇게 산죽나무 길을 헤치며 달리다 보니 뒤를 따라오는 게, 나를 깨운 게 무언가 싶은 의혹이 참으로 뒤늦게 찾아온다. 아무도 없다... 하지만 의혹이나 두려움을 계속 떠올릴 게재가 아니다. 없던 힘까지 내 열심히 달리고 걷기를 반복하다보니 음양수샘이 나타난다. 그날 산행 시작 이후 처음 대하는 물을 입안으로 가득 퍼 넣고는 걸음을 이어가다... 다시 찾아온 체력저하에 근방을 둘러보니 텐트를 칠만한 터가 보이고... 바로 야영준비를 하곤 그날의 산행을 마무리했다. 등산로를 따라 흐르는 물을 받아 대충 끼니를 해결하곤 얇은 누비이불 안에서 잠을 청하는 그날 밤... 그냥 질식해 죽어도 모르겠다 결심하고 부탄가스가 다 소진되는 줄도 모르게 버너를 켜놓았을 정도로 정말 추웠다.

다음 날 눈을 떠보니... 주변에 흐르던 물줄기가 모두 꽝꽝 얼어있는 걸 보고는 전날의 이상한 존재를 다시 떠올리게 된다. 아... 그 누군가가 나를 깨우지 않았더라면 능선 길 어딘가에서 꼼짝없이 얼어 죽거나 탈진해 죽었겠구나... 그 각성 탓인지 이후의 산행은 경건함 자체였다. 걸음이 엉키거나 부딪치거나 하면, 아... 지리산이 나보고 조심하라고 하나 보다 라는 식의 마음 속 대화를 이어나갔고... 천왕봉을 거쳐 내려오던 한신지 계곡의 어딘가에선 밥 한 덩어리 놓고는 조촐히 감사의 예도 갖추었던 것 같다.
자발적 가난 선택자? 자발적 행복 선택자!
<꽁지작가(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를 읽고 나서의 마음에 단순한 귀경·전원생활의 유유자적함에 대한 부러움이 아닌, 지리산이 저들을 저리 만들었을 거야라는 신앙과 마찬가지인 감흥이 끼어드는 것도 이런 연장이었을 테고, 그의 신작에 눈길이 머물 수 밖에 없었던 것 또한 지리산이라는 한 단어 탓이었다. 
 
지리산 행복학교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 한국에세이
지은이 공지영 (오픈하우스,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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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필요에 의해 부분 각색되었을지언 정, 태반 픽션이 아니다. 어느 날 지리산으로 떠났다는 친구들의 삶이란 게, 왠지 기록해놓으면 재미있을 성 싶어 그 자체를 옮겨놓은 수기와도 같다. 자발적으로 가난을 선택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간다고 표현된 그들을 지켜보자니, 현재도 이어가고 있을 그들의 삶이란 게 행복한 삶인지, 부유하거나 가난한 삶인 지야 보는 이들의 가치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겠지만, 그들 스스로가 선택한건 가난이 아닌 행복일거라는 확신이 든다.

근사한 외모와 좋은 학벌, 부유한 부모나 근사한 배우자, 넓은 집과 큰 차 등등 획일적인 우리네 욕망의 기준으로 본다면... 버들치 시인이나 낙장불입 시인, 최도사, 수경스님 등등의 등장인물 모두는 최하류의 인생을 살아가는 셈이다. 변변한 수입하나 없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살 집 구하기에 연연해하고, 끼니는 산나물 몇 가지로 연명을 하거나, 술에 취해 하루하루를 허송세월하는 등의 모습들을 보자면 한량이란 말이 딱 어울릴 정도인데다, 행복학교란걸 만들어 사람들과 함께하거나, 자연파괴를 저지하겠다고 온몸이 상하도록 도로순례하는 뜬금없는 행동들은 4차원세상에서 우리네 현실로 뚝 떨어진 괴짜들에 다름 아니다. 4대강 공사 반대를 위해 소신공양하신 문수스님을 두고 땡 중 하나 자살한 것 갖고 왜 이리 난리냐라고 했던 어느 의사의 말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그런 류와 결국 다르지 않을 욕망과 가치에 파묻혀사는 우리네 평범인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이질감이 쉽게 거두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바람도 아닌 것에 흔들리고 뒤척이기 싫어 나는 도시를 떠났다.
하지만, 그들 모두 우리와 마찬가지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보통사람일 뿐이다. 단지 다른 욕망을, 획일적인 우리네 욕망과 사뭇 다른 욕망을 선택했을 뿐이다. 자신에게서, 타인이나 사회에게서 또는 무언가로부터 받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증오와 복수, 성공이나 부 대신 생명을 지닌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다고 결심한 우리 옆집 아저씨일 수도 건넛마을 아주머니일 수도 있다.

다만, 기분전환으로 잠시 동안의 전원생활을 체험하고자 하는 대신, 켜켜이 심어져 있는 나무 한그루 마냥 생명 자체인 지리산 너른 텃밭위에 몸을 묻고 살아간다는... 태반이 마음 한구석으로 밀어 넣고 방치해뒀을 자연과 자연스러움에의 귀의 라는 어려운 결정을 선택적으로 실행에 옮기고 있는... 실천가로서의 용기가 덧붙여진 멋진 분들일 뿐이다. 그렇기에 이질감 탓으로 이 양반들은 도대체 뭔가 싶다가도, 우리네 이웃들이 빚어내는 짧은 촌극들을 바라보다보면 내 일인 것마냥 흐뭇하고, 가난한 삶이겠지만 스스로가 선택한 행복들이란게 참으로 근사해 보일 수밖에 없게 된다.

그들이 선택하고 누리는 건... 유유자적해 보이는 전원생활의 찬양, 근사하게 전원주택 하나 마련해놓고 텃밭을 일군다거나 산속으로 들어간다고 얻어지는 것들이 아니다. 자연의 품으로 떠나라 부추키는 건 더더군다나 아닐 것이다. 바람도 아닌 것 따위에 위태위태 흔들리는 내 자신의 욕망이나 가치란 것들이 부질없을 수도 있다는 건... 행복이란 게 산 너머 먼 곳에 있을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내 주변 내지 마음 속 외진 구석에 있을 수도 있으니 가끔은 둘러보거나, 천천히 숨 쉬며 살아가도 해될 것 없다는 가벼운 가르침일 수 있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 저 분들은 지리산 인근에 있어 저럴 수 있을거야 라는 부러움은 그치지 않는다. 그래서 문득 지리산에 가고 싶어진다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 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시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노을을 품으려거든,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몸이 달아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굳이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불일폭포의 물 방망이를 맞으러, 벌 받는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의 눈 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서지는 회환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세석평전 철쭉꽃 길을 따라, 온 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고...
최후의 처녀림 칠선 계곡에는,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진실로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섬진강 푸른 그림자 속으로, 백사장 모래알처럼 겸허하게 오고...
연하봉의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암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마음이니, 행여 견딜 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행여 견딜 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본문에 인용된 낙장불입 시인의 시 한편을 소개해본다. 지리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각각이 무얼 의미하는지 그리움에 절절매며 느끼게 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