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 그 자체에 대한 구토 '개인적인 체험'

사색거리들/책 | 2011. 3. 26. 07:00 | ㅇiㅇrrㄱi

  600년 수령의 은행나무 꼭지가 언뜻 보이는 포장마차, 매큼하게 곱창 타들어가는 연기가 자욱한 와중에도 맞은편 남학생의 선연한 매력이 가시처럼 눈에 박혀든다. 한 잔의 소주를 간단하게 떠넘기며 보이는 목젖의 적나라한 꿀럭임이 어찌나 시원스럽던지 한번 좇아보자 싶다. 한 손으로 유리잔을 가볍게 받쳐 들고 따라하던 억지 모방의 막바지는 다소의 시간차를 둔 구토로 이어진다. 술과 멀어지기 힘들 대한민국에서의 삶 탓에 같은 모양새의 고약한 구토는 일상이 되어버린다. 양은 무관하다. 한잔이거나 반잔이거나 구토는 뒤따른다.

  구토. 시각적으로는 원색의 강한 톤으로 알록달록해 보일 피자의 맛깔스러움(?)과 이어져 있으면서도 시큼한 내음을 동반한 불쾌함 쪽에 더 가까운 단어. 왠지 모를 더부룩함과 메스꺼움까지 연상케 하는 이 징글맞은 단어와 난 친하다. 술과의 조우라는 전제하에 그렇다. 그래서인가 위스키의 숙취를 못이긴 버드(Bird)가 자신이 근무하는 학원의 수강생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백개의 파리 대가리들 면전에서, 속에 있던 황토색 물웅덩이를 꺼내놓았을 때는 은근히 친근감마저 느끼게 되는 것이다.  

 

개인적인 체험
국내도서
저자 : 오에 겐자부로 / 서은혜역
출판 : 을유문화사 2009.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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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4년 <만엔원년의 풋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의 1964년 작품 <개인적인 체험>의 버드는 이제 막 2세 탄생을 맞이한 신출내기 아빠의 별명이다. 그는 경사스런 날에 왜 속이 뒤집히도록 술을 마셨을까? 자신의 토사물 물웅덩이를 불쌍하게도 꼼짝 않고 바라보며 무슨 생각에 잠겨 있었을까? 저 먼 아프리카의 땅 위에서 선글라스 너머로 눈부신 하늘 올려보기를 청춘의 유일하고 긴장된 바람으로 붙들어놓는 이 엉뚱한 인물의 구토는 단지 숙취 탓만이 아니다.

일찍이 맛본 적이 없는 끔찍한 공포감이 버드를 사로잡았다.
  그날, 버드가 아내의 첫 출산소식을 전해 듣던 날. 급히 찾은 병실의 분위기가 상당히 묘하다. 장모의 침울한 눈빛은 그렇다 치고, 낄낄거리는 듯 비웃음으로 아기의 상태를 전하는 병원 원장의 표정 또한 새로운 생명의 탄생에 즈음해 의례히 예상할 수 있는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뇌 헤르니아(腦 hernia), 두개골 결손으로 뇌의 내용물 일부가 빠져나와 버린 거예요..." 충격적인 말을 전해 듣는 바로 그 순간 이후부터의 고뇌와 연민, 괴로움과 공포, 무서움... 심지어 자신의 2세에 대한 역겨움까지 포함한 이 모든 감정의 울컥거림은 순전히 버드 자신만의 개인적인 체험으로 진행된다.

  개인적인 체험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체험의 동굴을 나아가다 마침내 인간의 삶 일반에 관련된 진실의 언저리를 체득할 수 있는 샛길로 빠져나올 수 있는 경우 하나, 그리고 다른 인간세계로부터 완벽히 고립되어 체험의 과정을 거듭하더라도 샛길은커녕 단 한 조각의 의미도 만들어낼 수 없는 경우 둘. 버드는 완벽히 후자 쪽의 개인적인 체험이도록 어느 누구와의 공유도 거부한 채, 미치기 직전의 상황으로 스스로를 몰아간다. 바로 아기의 죽음에 대한 간절한 바람으로의 체험이다. 정확한 진단과 수술에의 가능성 타진을 위해 아기를 대학 부속병원으로 이송하는 와중, 어둡고 고독한 전장에서 부상당한 듯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아 맨 아기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흘렸던 눈물은 어쩌면 그가 져버릴 인간적 의미에 대한 단출한 예의 따위였을 것이다.

  아기의 죽음을 바라다 못해 담당의에게 아기의 아사(餓死)를 넌지시 종용하고는 오로지 죽었다는 전화 한 통화만을 기다리는 아빠의 모습은 절망에 의한 잠시의 혼돈 정도로 수식하기엔 지나치게 참담하다. 그것도 오래전 알코올 중독의 교훈을 져버리고 장인이 한줌 위안으로 건네준 위스키 한 병을 마셔내기 위해, 질척한 성교를 통해 일말의 위안이라도 받고픈 마음에 히미코라는 여자친구의 집에서 오매불망 전화만을, 아기가 죽었다는 통보만을 기다린다. 버드가 학원에서의 수업진행 도중 일으킨 구토는 그래서 단지 숙취에 의한 것일 수 없다. 산도(産道)의 압력 때문에 가늘고 뾰족해진 아기의 긴 두상을 바라보며 느꼈던 구역질, 보다 근원적으로 존재 그 자체에 관련된 무서운 구토의 아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Sooner murder an infant in it's cradle than nurse unacted desires... 아직 활동을 시작하지 않은 욕망을 키워 주느니 아기는 요람 속에서 죽이는 편이 좋다...
  히미코가 언급하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한 구절 아래 아기의 죽음을 공모하는데 그치지 않고, 아프리카로 향하는 동반여행으로 현실에서 도주하려는 버드. 수술의 가능성마저 거부하고 불법의료행위를 서슴지 않는 히미코의 남자친구에게 아기의 처분을, 아기의 살인을 의뢰하기 위해 병원을 찾아 헤매는 그의 모습에선 절망과 공포만이 뚝뚝 흘러내린다. 아기의 상태에 대해 일체 모르고 있는 와이프로부터 행여나 아기가 죽으면 이혼하게 될 거라고 엄포까지 들은 터였지만 지척의 시간 앞을 바라볼 여유 따위는 없는 것이다. 

  절망적인 체험이 얼추 마무리된 이후의 게이바, 버드는 어떤 종류의 공포심으로부터도 자유로웠던 자신의 스무 살 때를 회상하다 문득 견고하고 거대한 물음과 맞닥뜨린다. 아기에게 수치스런 짓들을 무수히 거듭하여 도망치며 지키려 했던 것이 과연 무얼까? 대체 어떤 자신의 일부를 지켜 내겠다고 시도한 것일까? 절망에의 불안, 그것도 홀로만이 거쳐내야 했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고난을 진정 스스로 이겨내었던 것인가? 단순히 절망과 공포로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숨겨낼 뿐은 아니었을까? 이 기만스러운 도주를 멈춰내기 위한 버드의 결단이 필요한 시점, 27년 삶 전체가 말짱 무의미로 채워질 일찍이 맛본 적이 없는 끔찍한 공포가 그를 사로잡는다.

  <개인적인 체험>은 실제 선천성 장애아인 아들 히카리로부터 비롯된 오에 겐자부로 자신의 실제적인 체험의 반영이다. 버드라는, 아직 청년의 티를 벗어내지 못한 철부지가 별명이 어울리지 않는 한 남자로, 아기의 아빠로 성장해 가는 모습을 통해 불안에 떨어하는 한 인간이 자신과의 절망적인 싸움을 어떻게 수행해가는지를 세밀하게 담아내고 있다. 얼핏 간단해 보이는 단문과 단문의 연속으로 작품을 구성해내고 있고, 문장 자체에 내재한 생경한 비유와 상징 등으로 인해 다소간의 어리둥절함으로 작품 속 여행길에 나서야할 기분이란 것도 있다. 하지만 한 인간의 절망과 그 치유의 과정을 표현해내기엔 단문이라는 길이의 한계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그 묘사의 치밀함과 집요함 그리고 보편적 심리로의 추구 또한 눈에 띈다.

  아마도 작가 스스로의 순전히 개인적인 체험, 그 안에 있었을 절망과 퇴폐로의 직접적인 경험 탓일 게다. 그 고단한 경험을 이겨낼 수 있었던 인내, 그 끝에 놓였을 희망은 이 노(老) 작가의 여전할 바람 하나를 품고 있지 않았을까?

  아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 문학적 승화의 크기에 비해 너무나 약소할!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