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비된 상상력을 치유하기 위한 노력 '정호승의 의자'

사색거리들/책 | 2010. 12. 28. 13:53 | ㅇiㅇrrㄱi

크리스마스이브, 잠자리에 들기 직전, 아이가 투박하게 적어 내려간 편지 한통을 머리맡에 올려놓는다. 삐뚤빼뚤한 필적으로 산타할아버지 사랑합니다 라는 문구가 하트나 루돌프 등으로 치장되어 적혀 있다.


선물 전달을 위해 이 추운 날 하늘 위로 날아오신 산타할아버지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하기 위함이라는데, 결론인즉슨, 자신이 선물을 받을 것임에는 일체의 의심이 없다는 것이고, 다음으로 편지는 자취를 감춰야한다는 것이다. 기쁘게도 산타할아버지는 편지를 가져가셨고, 머리맡이 아닌 엉뚱한 곳에 선물을 놓고 가는 가벼운 실수 한건이 있기야 했지만... 한 아이의 꿈과 희망, 설렘... 오로지 아이만이 올곧게 즐길 수 있는 그 마음은 그렇게 1년을 더 살아남을 수 있게 된다.

아이에게 걱정은 단 하나였다. 자신이 선물을 받을 자격이 안 될까라는 게 아니라, 혹시 바람과 다른 선물이 놓여있을지 모른다는 것... 재미있다. 가방 아래로 꽁꽁 숨겨 반출해온 편지를 보자니 부러운 마음도 순간 일렁인다. 어린 날 누구나 겪게 되는 미지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한 유일한 치료는 상상력을 마비시키는 것뿐이고 그것이 어른이 되는 과정이라 한다지만, 이제 어른이 되었다 하는 심정에서 돌아보면 마비시켜버린 상상력은 두려움에 관한 것뿐만이 아니라 밝고 희망찬 것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 버렸다. 
 
의자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어른을위한동화/우화
지은이 정호승 (열림원,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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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이브날 설렘과도 같이 아이의  백지장처럼 하얗게 밑채색 된 상상력을 어른들의 모습 속에서 마주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 나에게 마비된 상상력은 무얼까 가늠해보기도 하지만 왠지 놓치고 있는 것들 태반은 좋은 축에 속해 있을 거라는 확신에만 믿음이 생긴다. 우리(?) 어른들이 다시금 그때 그 시절, 아이만이 갖고 있을 수 있는 정서 속으로 빠져들어 갈 수 있다면 지금 세상은 화기애애하고 애틋한 그런 이야기들로만 가득할까...? 남을 속이거나 다툼하고, 빼앗고 자만하며 사랑하지 않는 자들의 행적으로 충만한 각종 매체의 구석구석이 서로 사랑하고 행복했노라 라는 따위의 따뜻함으로 가득할까...?
우리는 모두 봄볕처럼 따스한 사랑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정호승 시인의 <의자>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 어른들에게 필요할지 모를 아름다운 상상력의 세계를 담아내기 있다. 사랑은 결국 사랑만을 필요로 하고, 우리의 삶을 완성시킬 수 있는 것도 오직 사랑뿐이라는 큰 전제 속에서, 진정한 사랑에 대한 공부와 이해의 노력이 필요하기에 이 책을 썼다는 머리글에서 알 수 있듯... 작가가 아름다운 동화적 상상력을 빌어 말하고픈 건 오로지 사랑 하나만을 향해 있어 보인다.

<비목어>에서는 외눈박이 물고기 한 마리가 비목동행(比目同行) 즉 한 쌍의 눈처럼 같이 다닐 수 있는 평생의 짝을 찾아 떠나는 짧은 여정 끝에 서로의 모습을 눈동자로 하여금 맑게 반영시킬 수 있는 진실한 사랑을 찾아내기도 하고, <난초와 풀꽃>에는 보금자리에 날아든 풀꽃에 대한 미운마음을 버리면서 꽃을 피워내는 춘란의 각성이란 게 담겨 있기도 하다. <빈 들판>에는 애써 키워낸 소나무를 떠나보낸 후에도 사랑의 감정으로 텅 빈 가슴을 채우곤 하는 빈 들판의 애틋한 이야기 한편이 그려져 있고, <제비와 제비꽃>에서는 제비꽃에 얽힌 부부제비의 절절한 부부애를 담아내고 있으니, 비록 등장인물이 사람은 아닐지언정 사랑을 갈망하거나, 찾아 떠나거나... 사랑에 대해 각성해야 행복해질 수 있다 믿으며 살아가는 사람들... 어른들이 갖고 있을 모든 삶의 원칙에는 사랑이 놓여 있어야 한다는 교훈에 다름 아니다.

한편, <해어화>와 <해어견>에서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모란과 개가 등장해 사람들의 거짓된 사랑고백과 조건부 만남, 추악한 내면에 대해 역겨워하기도 하고, <못자국>에서는 자신의 상처를 감춰내기 위해 아내의 가슴에 못자국과 같은 상처를 내던 남편이 진정한 사랑을 통해 지난 과오를 깨닫기도 하는데, 결국 진정한 사랑의 반대편에 있을 잘못되거나 왜곡된 일부를 지적하는 것이기도 하니 올바른 사랑에 대한 지침... 그 연장선에 있기도 하고... 

슬쩍 다른 이야기들을 넣어보기도 하지만, 자기애(愛)의 연장이라 본다면 이 또한 사랑의 다른 형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명태>에서는 오랜 기다림과 고통 끝에 존재 의미를 찾아내는 동해 명태 떼들의 자각을 통해, 세상 모든 것들이 갖는 나름의 존재이유를 역설하기도 하고, <풍경>이나 <슬픈 목걸이>에서는 풍경과 옥 목걸이를 등장시켜 타인에 대한 배려 없이 자만에 젖어 살아가는 인간의 오만한 독선을 비난하며, <현대인>에서는 오아시스를 앞에 두고 고민에 휩싸이는 한 청년을 통해, 생명만큼의 무게를 지닌 신뢰라는 덕목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갈등 속에서 무너져 버리는지를 지적하기도 하는 등... 26편의 동화에는 사람... 그리고 물고기나 소나무, 개와 의자, 망아지나 돌 등과 같이 사람의 곁에 존재하는 다양한 소재들을 활용한 맑은 이야기들이 그려지고 있다. 명상의 화가로 유명한 박항률 화백의 그림 여러 편이 삽입되어 있는데... 책을 대하는 차분한 마음을 좀더 가라앉히는데 어느 정도의 비중이 느껴질 만큼 음미할 대목이 되기도 한다.
 
동화의 장점은 명확하다는데 있다. 등장인물과 사건은... 즉 작가는... 전혀 망설임 없이 좋은 것과 나쁜 것, 착한 일과 나쁜 일, 할 일과 말아야할 일, 가져야할 마음과 아닌 마음, 선인과 악인 등을 구분해 내기 때문에, 깨달음이나 교훈은 직관적으로 다가온다. 정호승의 <의자>가 어른들을 위한 동화를 표방하곤 있지만... 몇몇의 상황들이 비아동(?)적이어서 그렇지 동화 본연의 성격에서 크게 벗어나는 특색이 엿보이진 않는다. 그렇게 보자면, 동화 <신데렐라>나 <백설공주> 등을 읽을 때의 느낌과 별반 다르지 않을 테니...

이제부터는 받아들이는 사람의 몫이 되어 버린다. 꽃과 나무의 이야기를 이해하고, 사슴과 같은 깨끗한 눈을 지녔다는 정호승 시인의 맑고 투명한 상상력의 세계에 빠져들 수도 있겠지만, 사랑해야하고 교만하지 말 것이며, 남을 배려하고 자존의 의미를 되새겨라 라는 누구나가 그건 아니야! 라고 거부할 수 없을 만큼의 큰 도덕적·심리적 명제들에 대해 식상하게 느낄 수도 있을 테다. 모두 동의한다면서도 삶이란 게 그리 간단치 않다면서 어른의 경험과 지식으로 재단질 하려 할지도 모르겠고, 시인의 유려한 문체와 의미심장한 그림 몇 편에 만족감 전부를 걸 수도 있을 테다.

책을 덮고 답답한 마음이 드는 건... 아이와 그 이후를 지나 어른이 되어가면서 잃었던 상상력의 한 부분이란 게 무언지 좀더 실감나게 와 닿았기 때문이다. 그 상상력의 일부는 아마도 일체의 의심 없는 공감과 신뢰 인 듯싶다. 이제와선 도저히 회복 불가능한 것임을 알기에 답답하고, 그보다 더한 무언가도 빠져나가 있는 듯싶어 한편 슬프기도 한 심정... 노력한다고 되찾아지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차린 씁쓸함과 혹이나 치유할 수 있을까 싶은 기댐...

그게 동화책을 읽는 한 어른의 마음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