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만으로도 행복한, 숭고한 존재... '용의자 X의 헌신'

사색거리들/책 | 2010. 12. 23. 13:55 | ㅇiㅇrrㄱi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 한편...
히가시노 게이고의 대표작으로, 남들의 집중적 이목을 이끌어낸 일명 베스트셀러 읽기에 동참하는 걸 꺼리는 일종의 불치병(?) 탓에, 좀처럼 손대지 못하던 작품이다.

용의자 X의 헌신
카테고리 소설 > 일본소설 > 공포/추리소설
지은이 히가시노 게이고 (현대문학,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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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 상의 장르는 추리소설에 속해있을 지 몰라도,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전해오는 강한 여운, 이시가미의 혼을 토해내는 울음과 비명소리로 시끄러워지는 마음 한켠이란 게 비극적인 멜로드라마 한 편에 빠져있었던 듯싶다. 어찌 보면 사랑하는 한 여자에 대한 한 남자의 순애보와 다름 아니니, 추리소설 작가를 표방하고 일련의 추리소설을 내놓으면서도 전통적인 기법을 파괴하고, 드라마적인 인간의 일상사에 치중하는 히가시노 게이고란 작가의 장점이 진득이 배어 있다.

<옛날에 내가 죽은 집>, <붉은 손가락> 등 일련의 작품을 대하면서 단순한 재미수준의 유희적 쾌감에 반해 이 작가가 남달라 보였던 것도 이런 따뜻한 시선 때문이니 예를 들어 부모와 자식 간의 정이나 잃어버린 삶에 대한 애착, 남녀 간의 사랑 등 추리소설에 있어 주(主)가 될 수 없어 잔가지처럼 그저 언급되고 말 뿐인 소재들이 주(主)가 된다는데 있다. 여기에 추리소설에 빠질 수 없는 소재거리인 범행 그리고 범인 찾기 과정이 절묘한 반전의 트릭과 함께 어울려 있어, 여운은 여운대로, 읽는 재미는 재미 나름대로 찾을 수 있게 된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집중하는 인간의 욕망...
범행은 애초에 드러나 있다. 범인도 누구인지 알고 있다. 반전이라는 신선할 아이템이 숨어 있기야 하지만, 작품의 진행과정 자체를 부인하게 되는 충격요법으로서의 반전은 아니니, 이전의 작품에서 보이듯, 사랑했다면 더 사랑했다는, 아끼고 배려했다면 그 마음이 배가되고, 절절한 마음이 더해 속이 쓰릴 여운으로 다가올 뿐이다. 범행과 범인을 드러내, 속칭 차 떼고 포까지 떼 수세에 몰렸을 히가시노 게이고는 살아생전 누구도 겪어보지 못할 사랑과 희생으로... 절대 악이란 걸 방치하지 않고 모두를 화해케 하는 비장의 카드 한 장으로 수세를 만회하고야 만다.

소위 소설이란 것들에서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일 테지만, 등장인물의 다양한 인간적 욕망이란 게 각각으로 반영되곤 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런 인간적 욕망의 깊은 부분을 절절히 묘사하진 않는다. 글 사이를 쉬어가고, 깊이 심호흡케 하는 식의 세밀한 접근 대신 인물들의 심경에 대한 단출한 묘사와 더불어 일련의 사건과 전개과정만으로 얽혀있는 욕망들의 표현과 해소를 극대화해내고 있으니  이런 부분이 작가로서의 남다른 능력일 듯... 이번 작품에서는 살인과 은폐에 대한 욕망보다는 사랑과 헌신에 대한 욕망의 울림이 남다르다.
그 남자가 아름답고 멋있을 뿐...
인상적인 두 남자가 등장한다. 데이도 대학시절 인상적인 인연을 맺었던 이시가미와 유가와 그들이니, 완벽한 수학의 논리로 살인사건을 은폐하려던 천재적인 수학자 이시가미에게 천재적인 물리학자 유가와의 등장이란 불행 그 자체가 되어 버린다. 완벽하게 조성된 알리바이, 완벽하게 가장된 범죄공간에 대한 이시가미의 답을 어느 누구도 재검증 할 수 없었으나, 이런 논리와 논리와의 싸움에 있어 이시가미 측의 유일한 허점이 있었으니... 바로 그녀 야스코에 대한 사랑과 헌신 그리고 야스코 본인이 지켜낼 수밖에 없었을 인간으로서의 기본 도리가 그것이다.

유가와는 예리하게 이시가미의 마음 속 연정을 눈치 채고 그 지점에서부터 모든 것들을 되돌이키기 시작한다. 멋있는 호적수가 될 수 있었을 두 등장인물 중 하나가 하차해버려 다소 아쉽기까지 한데, 진상을 꿰뚫는 유가와의 논리나 친구에 대한 인간적 배려보다는 이시가미의 짐승 같은 사랑이 좀더 애틋하다. 그래서 그 남자가 멋있고... 그 마음이 아름다우며... 그의 하차가 아쉽고... 울부짖음에 눈물이 그렁거린다. 야스코가 뚱뚱하고 대머리기운이 역력한 이시가미의 외모가 아닌 진정한 마음에 눈을 돌려 퍽이나 다행스럽기까지 한 이유다. 

누군들... 마지막 장을 덮게 되면 떠올릴 듯싶다...

내가 이렇듯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나를 위해 이렇게 헌신해줄 사람이 있을까...? 평생 한번 만나볼 수 있기라도 하려나...?

'관계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숭고히 여겨지는 존재'란게 나에겐 있을까...? 

뒤돌아선 이시가미의 어깨 위로 올려놓은 유가와의 손등 위... 내 손 하나를 더 얹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