훼손당한 나의 안드로이드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 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

사색거리들/책 | 2010. 12. 11. 07:00 | ㅇiㅇrrㄱi

어린 시절, 속도계 하나 달린 걸 위안삼아 타고 다니던 고물자전거로 할아버지 뒤를 좇다보면 이제는 사라져버린 한옥 한 채... 할아버지 댁에 이르곤 했다. 강단지게 자라나길 바라셨던 건지 늘 자전거로 따라올 것을 원하셨던 탓에,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거리를... 대로변의 씽씽 거리는 차들 뒤로 숱하게 달음질쳤다.

그리 어렵게 도착한 할아버지 댁에선 늘 설렐 수밖에 없는 나만의 놀이거리들이 기다리곤 했으니... 정원에 딸린 연못의 붕어들에게 드리우는 밥풀떼기 낚시가 그 중 하나였고, 골목어귀의 만화책 가게도 하나, 무엇보다 삼촌들이 방치한 불법 비디오테이프 관람은 그 중 백미(?)였다. 철저한 사생활보호원칙에 준한 우리 조상들의 건축기술 덕분으로 한옥의 구석으로 위치한 외딴 방에선 은밀한 영화 관람이 이어지곤 했으니 이제야 돌이켜보면 대작이니 수작이니 해서 영화사의 한축을 장식하고 있는 작품들을 너무도 어린 나이에... 접하던 시간들이 그때였던 기억이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 Blade Runner> 도 그 시기 홀로 즐겼던 영화 중 하나였는데 사실 나이가 나이인지라 그 안에 담겨 있다는 디스토피아적 세계에 대한 진지한 성찰 따위는 염두에도 없었고, 늘 벙벙한 표정으로 허둥거리는 릭 데커드 역의 해리슨 포드 역시 관심 밖의 인물이었을 밖에... 오로지 물기에 젖으며 생을 마감하는 안드로이드 로이의 짧은 삶만 인상적이었으니... 

비인지 눈인지 안개인지도 모를 습기에 온종일 잠겨 있는 도시와 인공조명만이 번쩍거리는 밤과 밤의 이어짐, 여기에 인간보다 더 인간적으로 생을 마무리하는 안드로이드의 슬픈 결단이란 게 어린 날 잠시 그려볼 수 있는 미래의 어느 시기였던 것 같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 판타지소설
지은이 필립 K. 딕 (황금가지,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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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는 영화 <블레이드 러너 Blade Runner>의 원작으로 SF소설의 대가로 불리우는 필립 K. 딕의 작품이다. 원작이란 게 있음도 처음이었고 <마이너리티 리포트>, <토탈 리콜>, <페이첵> 등 유명한 영화의 원작자가 필립 K. 딕이라는 사실 또한 처음. 사실 원작이 있음을 알고 반가웠던 건 영화를 다시 보곤 싶으나 다시 볼 수 없는 일종의 아이러니한 상황 때문으로, 영화 속 잿빛 정경과 재회하고픈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1982년에 제작된 영화를 이제 다시 돌려본다면 분명 특수효과의 어벙함으로 이전의 인상마저 해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 탓이었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라는 누군가의 수필 한 구절이 떠올라 망설이던 차... 원작을 대하는 반가움이 클 수 밖에...
전쟁으로 황폐해진 지구, 살아남은 자들 일부는 식민지행성으로 이주하고 나머지 일부는 매일매일 떨어지는 방사능낙진에 파 먹히며 일상을 이어나가고, 유전형질이 오염된 또 다른 일부는 은둔해 살아간다. 행성이주 유인책으로 활용된 안드로이드 중 일부가 지구로 탈출해 오고, 릭 데커드는 그들을 은퇴(파괴)시키는 현상금 사냥꾼이다. 신형 넥서스6 타입의 은퇴 지시를 받은 릭은 안드로이드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보이그트-캄프 감정이입 검사툴을 챙겨 추적을 시작한다.
원작의 경우에도 1968년 당시로서는 기발했을 여러 발상들이 여럿 눈에 들어온다. 다만 영화로 인한 선입견 탓인지 원작의 골격이 간단하리라 짐작되는데, 결국 예상되는 건 현상금 사냥꾼 릭과 넥서스6 안드로이드간의 활극이리라. 기대치가 영화에서 보여주는 이런 역동적 대결에 맞춰져 있다면 원작의 말미에서 느끼게 되는 배신감은 클 수밖에 없는데, 왠지 비범한 능력을 갖고 있을 법한 두목격 안드로이드 로이와 현상금 사냥꾼 릭 간의 대결조차도 허망하게 지나버리는 탓이다. 영화 속, 인간을 증오하면서도 생명연장에 대한 인간의 집착을 닮아가려던 안드로이드 로이가 단 일격에 박살나 버리는 기계 나부렁이로 치부되는 것이다.

원작을 대하면서 가졌던 나의 기대가 선입견이었음을... 안드로이드는 본디 주연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영화에서의 안드로이드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인간임을 거부당하고,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감정을 표현해내는 존재로... 애시당초, 인간과 그의 피조물인 안드로이드를 구분해내는 기준이란 게 있다면 그 자체를 모호하게 만드는 주체이기도 하다. 마지막 안드로이드 로이가 자신을 은퇴시키려던 릭에게 손길을 내밀어 인간이 아닐지언정 그보다 더 인간적인 격한 감정을 보이는 대목에선... 언젠가 먼 미래, 감정이입이란 게 인간과 아닌 것을 구분해내는 기준이라면 결국 구분이란 것 자체가 불가능할 상황과 맞닥뜨릴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불안함과 더불어 정서적으로 소진된 인간은 과연 인간이라 할 수 있을는지, 인간이 무언가 싶은 의아스러움이 더해졌다.

하지만 원작인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에서의 안드로이드는 영원히 인간일 수 없는 대상에 다름 아니다. 오로지 입력된 지능에 준해서 행동하는 탓에, 생명의 소중함에 대한 감정적 동요를 보이질 않고 이 약점으로 인해 안드로이드임이 발각되고야 만다. 모든 가치가 모호해진 세상에서도 생명의 준엄함에 동의하지 못하고 기쁨과 슬픔에 빠져들지 못하는 무감정을 절대 악이자 살인자의 극명한 유형이라 규정당해 사냥당하고야 마는 조연으로 전락한다.
전기 동물에게도 그들만의 삶이 있는 거니까. 그 삶이 아무리 빈약한 것이라 해도...
머서주의라는 거짓 신흥종교의 감정이입상태에 몰두하고, 감정조절기계 따위에 그때그때의 기분전환을 맡기는 인간들. 거의 멸종되다시피 한 진짜 동물 키우기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가늠하는 그들. 자신들보다 더 오염되어 있다는 이유로 타인을 소외시키고, 살아있기라도 한 듯 보살펴야 하는 전기 양을 향해 증오를 떠올리며 그런 감정변화 자체가 진짜 인간임을 드러내는 지표라고 억지 안심하는 그들... 그리고 자신의 형상을 한 대상들을 거리낌없이 파괴하는 그들이야 말로 세기말의 두려움과 공포로 인해 인간성을 놓아버리는 미약한 존재들이 아닐까...? 

인간인 릭도 안드로이드 사냥 과정에서 갈등하게 된다. 안드로이드보다 더 무감각한 동료 사냥꾼의 냉정함으로 인해, 사냥 대상일 뿐인 안드로이드와 동침을 하거나, 인간보다 더 인간답게 살아가고 있는 안드로이드의 일상과 마주하면서 겪는 혼동속에서 릭은 심지어 전기 동물에게까지도 그들만의 삶이 있다며 감정을 이입하게 된다. 무언가의 도움이 아닌 오로지 스스로의 자율적인 선택으로 기계조차도 가치를 지닐 수 있다는 감정적 풍요상태에 빠지면서 이런 감정만이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특성이라는... 안드로이드와 구별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이 될 수 있음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묘하게 어긋나 버린다.

어린 시절 안쓰럽게 지켜보았던 영화 속 안드로이드 로이는 인간과 마찬가지로 전기양을 꿈꾸고도 남을 인간적인 존재이니 당연히 꿈꿀 수 있다라는 게 답이 될 테지만, 원작 속 안드로이드 로이는 인간일 수 없으니 전기양을 꿈꾸지 못한다가 답이 될 테다. 여기에 전기양 조차도 안타깝게 보살필 수 있는 건 인간만이 지닌 무엇 때문이라고 각성하게 되는 릭의 감정선을 따라가다 보면... 안드로이드는 기계 따위에 불과하다 라는 반증에 새삼 맞닥뜨리게 된다. 

어린 시절 안쓰럽게 지켜보았던 영화 속 안드로이드 로이의... 왠지 손대면 온기가 남아있을 것 같은 그 뒷모습이... 형상만 인간을 본뜬 기계 따위의 서늘함으로 전락하고야 마는 것이다. 그게 유쾌하지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