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미저리?? '미저리 Misery'

사색거리들/책 | 2010. 11. 30. 07:00 | ㅇiㅇrrㄱi

주변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며, 적잖은 이들이 스티븐 킹이라는 작가를 소설이 아닌 영화로 접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게 된다. 사실 <미저리>의 경우에도 그의 작품 태반이 그렇듯 원작소설보다는 영화가 더 유명한 사례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영화 <미저리> 자체를 원작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상당히 많은 편일만큼 개봉당시 대단한 흥행작이었다. 고등학교때 친구로부터 두어시간에 걸쳐 영화 줄거리를 들었던 나름 즐거웠지만 고된(?) 기억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야! 이 미저리야!', '아, 이 미저리 같은 X' 등등의 욕설(주로 여성 대상)을 여즉 접할 수 있는 걸 보면, 영화 개봉 당시의 분위기는 미저리 신드롬이라 할만 했을 정도다.

줄거리야 간단하다.

폴 셸던이란 베스트셀러작가가 자신에게 명성을 얻게 해준 소설 '미저리'의 마지막 편을 탈고 후, 여행도중 교통사고를 당한다. 애니 윌크스라는 한 여성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지만, 두 다리는 망신창이가 된 상태. 애니의 집에서 그녀가 건네는 노브릴이란 진통제를 먹으며 부상의 고통을 견디던 폴 셸던은, '미저리'의 넘버원 팬임을 자처하는 애니의 이상스러운 행동으로 공포에 빠져들어간다. 폴이 갖고 있던 원고에서 소설속 주인공 미저리가 죽게 된다는 것을 안 애니는 그를 위협하고... 애니가 던져준 구형 타자기 앞에서 미저리를 살려내기 위한 폴의 집필이... 계속되는 '애니의 광기'에 맞서 살아남기 위한, 작품을 완성하기 위한 폴의 사투가 이어진다.
그가 본 것은 텅 빈 공허감이었다. 땅속으로 움푹 꺼진 산 위의 균열 같은 공허감, 꽃도 자라지 않는 천길 낭떠러지일 듯한 암흑의 공허감. 그것은 잠시 동안 인생의 중요한 장소와 표시물에서 멀리 벗어난 여인의 얼굴이었으며, 자신이 이야기하던 중이었다는 기억을 잊었을 뿐 아니라 기억이 있다는 사실 그 자체까지 잊어버린 여인의 얼굴이었다.
결론부근에 접어들어 등장하는 몇몇 인물을 제외하면, <미저리>의 등장인물은 단 두명이라 해도 무방한데, 애니 윌크스란 인물에 대한 폴의 묘사가 상당히 많을 수 밖에 없다. 수시로 공허한 얼굴빛을 보이는 그녀는, 폴에 의하자면 긴장병(緊張症)이라는 질환을 앓고 있는 정신병 환자다. 그런데 이여자... 가볍게 넘길 증상의 환자가 결코 아닌게... 그녀의 어린시절부터, 간호사로 재직하던 시절 그리고 그 이후에까지 주변 사람들이 수도 없이 비명횡사했음이 드러난다. 꼬리가 잡혀 외진 곳에 홀로 살아가곤 있지만... 그녀의 진정한 잔혹함에 대해 어느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을만큼 지능적인 두뇌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명석한 사고와 긴장증, 이 양립하지 않았음 하는 불편한 동거로 인해 폴은 점점 궁지에 몰리고야 만다.

미저리(스티븐킹전집10)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 공포/추리소설
지은이 스티븐 킹 (황금가지,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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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영화에서는 애니의 광기어린 행동이나, 폴의 사투 정도에 초점이 맞춰져 있겠지만, 원작에서 좀더 부각되는 부분은 작가로서 폴이 겪는 고뇌나 창작의 과정들이다.
작가들은 모든 것을 기억하기 때문이야. 특히나 아픈 기억들을. 작가 한명을 홀딱 벗겨 놓고 상처들을 하나하나 가리키면. 그 작가는 작은 상처들 각각에 얽힌 사연을 들려줄 거다. 커다란 상처들을 통해 장편 소설을 얻는 거야. 망각은 소설 쓰는데 아무 쓸모도 없어. 작가가 되고 싶다면 작은 재능 정도는 갖고 있는 편이 좋겠지만, 단 한가지 진짜로 필요한 것은 모든 상처에 얽힌 사연을 철저하게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이야.
부와 명예를 안겨준 '미저리'를 종결하고, 본격작가로서의 길을 걷기 위해 완성한 새 작품은 애니에 의해 불태워져버리고, 미저리를 되살리기 위한 초고(初稿) 또한 애니의 날카로운 지적 앞에 폐기할 수 밖에 없다. 그 와중, 살아 남기 위해서가 아닌 작가로서의 순수한 열정에 빠져들어가며 집필에 몰두하게 되는 폴의 모습은, 킹 자신의 이야기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생생하다. 창작의 아이디어를 얻어내기 위해 괴로와하다 원고 속 커더란 구멍(?)에 몰입하기까지의 과정도 인상적이지만, '알고 싶어'의 힘이라 풀이된 애니의 광기와 독자들의 감정을 '세헤라자데 콤플렉스'로 풀이한 부분은 상당히 흥미롭다.
'세헤라자데'는 아라비안나이트(千一夜話)에 나오는 미모와 재색을 겸비한 왕비. 인도와 중국까지 통치한 사산왕조의 샤리아르라는 왕은 다른 남자와 정을 통하던 왕비를 죽여버린다. 배신의 후유증으로 세상의 모든 여성을 증오하게 된 왕은 매일 밤마다 처녀를 데려다 동침하곤 다음날 아침에 죽여 버리는 만행을 반복한다. 대신의 딸인 세헤라자데는 자진해 왕의 신부가 되어, 첫날밤부터 왕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하는데, 왕은 그녀의 이야기 솜씨에 홀려 1,001밤을 함께 보내게 된다. 그녀의 마지막 이야기가 끝났을 때 샤리아르 왕은 세헤라자데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고 영원히 해로할 것을 다짐하며 선정을 베푼다.
작가를 세헤라자데로 간주해, 그가 들려줄 다음 이야기에 대한 '알고 싶어'라는 본질적인 집착이 독자들이 갖는 공통적인 감정상태라는 것이다. 폴은... 킹은... 이 세헤라자데 콤플렉스의 연장선에서 애니의 피해망상적 집착과 일반독자들의 감정상태의 근원은 별반 다르지 않다고 풀이하고 있다. 아무튼, 폴이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발견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우연적인 행운이란게 있기야 했어도, 폴이 발견한 애니의, 독자의 본질적인 감정상태(소설에 대한, 작가에 대한)로 인해 그는 목숨을 구하게 된다.

그러고 보면... 킹의 작품엔 직업이 소설가인 사람들이 꽤나 많이 등장하는 듯... <샤이닝>, <데스퍼레이션>, <살렘스롯>, <자루속의 뼈>, <스탠 바이 미>, <리시이야기>, <그것> 등등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품의 주인공 내지 주변인물로 소설가를 내세우고 있다. 때론 미쳐버리고, 너무나 거드름을 피우기도 하고, 괴수와의 싸움에 앞장서기도 하며, 영적인 존재와의 접촉에 긴장하기도 하는... 어린시절을 떠올리거나, 어린시절속 악한 존재와 사투를 벌이기도 하며,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환상의 공간을 넘나드는 이 모든 인물들의 공통된 직업이 소설가다. 킹 자신일테고... 아마 그래서인가, 자신을 공포소설작가로 또는 단순 상업작가로 치부하는 '비평가'들에 대한 실랄한 비아냥 또한 종종 등장하는 대목이다.

아무튼... 미저리에서 얻을 수 있는 재미 중 하나가 폴 셸던을 통해 창작의 과정이나 그 괴로움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일테고, 이미 미쳐있는 애니와의 싸움에서 살아남기 위해 같이 미쳐가는 폴을 지켜보는 것 또한 흥미진진하다. 죽기 싫으니 겉으로 표는 못내겠고 속으로 욕하고 비아냥거려야 하니, 그 원초적인 욕지거리의 수준이란게... 웃지 않을 수가 없을 지경.

킹의 작품에 종종 보이는... 다른 작품에 대한 언급도, 그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재미있을 부분이다.
오버룩 호텔이라고, 아주 유명하고 오래된 호텔이야. 10년 전에 불타서 무너졌어. 호텔을 관리하던 사람이 불을 질렀대. 미쳐 버려서 그랬다지. 마을 사람들 모두 그렇게들 얘기해. 하지만 신경쓸 것 없어. 그 사람은 죽었으니까.
애니가 폼로이란 뜨네기를 죽였다며 실토하는 대목인데... 오버룩 호텔은 <샤이닝>의 무대가 되는 곳이다. 관리하던 사람은 바로 애니만큼 미쳐버린 '잭 토렌스'일테고...^^

아...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여즉 효력있는 욕, '이 미저리같은 인간아!'는 상당히 잘못되었음을 확인게 된다... 폴 셸던의 소설 '미저리'의 여 주인공 미저리는... 주변인들의 넘치는 존경과 사랑을 받는 너무도 아름다운 마님이시니까.

정확히 하려면 이래야 맞다. '이 애니 윌크스 같은 인간아!', '이 애니 윌크스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