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情死)와 정사(情事)의 차이. '김치 애국주의'

사색거리들/책 | 2010. 11. 29. 19:01 | ㅇiㅇrrㄱi

사실... 일본이 싫다. 일본인도 싫다. 생김새며 하는 말이며,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행태며 그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싫다. 행여나 이런 반일감정을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스포츠 경기라도 있을라치면 나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긴장감에 '극일의 함성'을 드높이곤 한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상념... 왜 이렇게 저들이 저나라가 싫을까. 독도문제, 동해표기문제 등을 비롯한 일부 정치인사나 극우단체들의 망언 때문에? 위안부 문제나 강제노역, 일제 강점기 등에 대한 역사적인 피해의식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지만, 반일감정의 크기를 가늠해보면 직접적인 원인으로 열거하기엔 부족해 보인다. 또 다른 이유가 있으려나...? 
 
김치 애국주의 : 언론의 이유없는 반일
카테고리 정치/사회 > 언론/신문/방송 > 언론일반 > 언론일반서
지은이 최석영 (인물과사상사,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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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 애국주의>에서는 정치적·사회적 의도에 의해 검증되지 않은 보도를 생산해내는 국내언론의 보도행태가 적지 않은 원인이 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2004년 3월 24일 <日, 아들 성폭행하려 한 어머니 시신으로 발견>이란 뉴스가 보도된다.
정신지체아들과 성관계를 가지려다 실패한 친어머니의 엽기적인 범행이니만큼 큰 이슈가 될 것임은 명확한 상황이었겠다. 경찰은 집에서 유서를 발견했고 '아들을 사랑해 관계를 하고 싶어 했지만, 아들이 이를 거부해 살해하고 나도 죽겠다'는 내용... 모자간의 치정 관계로 인한 살인 여부를 조사 중... 주변 사람들에 따르면 아들은 심한 정신지체 증상이 있었던 것으로... 정신지체아들과 억지로 성관계를 가지려다 이를 거부당하자 화가 난 어머니가 아들을 숨지게 한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다. <노컷뉴스 2004년 3월 24일자>
인터넷 매체를 통한 일본의 이 엽기적인 사건소식을 대하는 한국 네티즌들의 반응은 굳이 본문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뻔했을 테다. 근친상간, 살인, 자살 중 하나의 키워드만으로도 집단적 분노를 불러일으켰을 진데, 이 엽기행각이 이웃나라 일본에의 일이라니... 반윤리적 행위에 대한 비난 그리고 이와 결합된 반일정서는 엄청난 시너지효과를 일으키며 댓글란에 흐르고 흘러내렸을테니 말이다.

그런데 이 기사의 원문은...?
장남이 쓰러져 있다는 신고를 받은 경찰은 현장에 출동하여 장남을 병원으로 옮겼으나 이미 사망한 상태... 현장에서 1.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불에 탄 승용차 안에는 자살한 것으로 보이는 장남의 모친이 숨져 있었다. 모친의 유서에는 ‘아들을 사랑한다. 아들도 죽고 나도 죽겠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장애가 있는 아들을 죽이고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요미우리신문 2004년 3월 22일자>
물론, 자식과의 동반자살을 꾀한 비정한 모정이 변호받을 일은 아니지만, 요미우리 신문의 원문과 노컷뉴스의 인용기사는 어마어마한 간극을 보인다. 바로, 어머니가 아들과의 억지 성관계를 시도했다는 부분인데, 이런 어마어마한 오역의 원인은 이렇다.

원문에 사용된 무리신주(無理心中)라는 단어는 어린이, 노인, 환자 등 힘이 없는 사람과 자살하는 동반자살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한사전에서의 풀이에서는 강제정사(情死)로 풀이된다. 여기서 정사(情死)동반자살을 의미하는 단어로 국내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 말이다. 하지만 동음이의어인 정사(情事)성관계를 의미한다.

이 한 단어에 대한 오역으로 원문의 내용이 한층 엽기적인 사건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정정보도나 해명보도 없이 슬그머니 사라져버린 이 해프닝(?)이 발생한 원인에는 검증을 통해 기사의 정확성을 담보하기 보다는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문구로 자사의 게시물 클릭수를 늘려야 하는 인터넷 언론매체의 태생적인 한계 탓일 수도, 이슈 한번 만들고 보자는 무책임한 기자정신의 발로이거나 단순한 실수 일 수도 있을테지만, <김치 애국주의>는 이의 심각성을, 자국민의 반일정서에 기반을 둔 무책임한 보도가 대부분의 언론매체에서 반복생산된다는 점에서 뒤돌아보고 있다.

우리가 일본에 대해 갖고 있는 악감정의 많은 부분이, 일본쪽의 잘못에 의한 자발적인 애국심의 발로 내지 정당한 비판 등과 같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기 보다는 국내 언론의 포뮬리즘적 행태에 의해 부지불식간 몸체를 키워왔던 기형적 현상일 수도 있음을 유의해야한다는 것이다.

일본프로야구 최고의 에이스인 마쓰자카는 이승엽이 두렵지 않다고 말해 국내 프로야구팬 뿐만 아니라 이승엽의 성공을 기원하는 많은 사람들을 도발했고, 일본의 극우신문 산케이는, 한국의 낮은 국민성 탓에 신종플루 감염자 파악이 안 되는 것이라 보도한다. 일본의 방송프로그램을 차용한 국내 프로그램은 언론과 시청자들로부터 두고두고 욕을 먹고, 우리의 막걸리 상표권을 일본기업이 선점했다는 기사가 공분을 불러일으킨다. 김희로씨는 차별철폐를 위한 민족적 긍지 하나만으로 야쿠자를 살인하고, 남대문이 전소된 후 일본관광객들이 그 앞에서 웃으며 촬영한 사진이 보도된다. 황우석사태에 대해 일본언론들은 그것보라는 비아냥을 숨기지 않고, 동해와 독도표기를 바로잡기 위한 대학도서관 습격사건이 민족의 혼을 계승하는 운동으로 전개된다. 허술한 보건의료제도 탓에 일본이 결핵후진국이라는 지적이 보도되고, 민족의 정기를 끊어내기 위해 일제가 곳곳에 박아놓은 쇠말뚝 이야기는 여전히 여러언론을 통해 기사화되곤 한다.

어디까지 사실이고, 만약 사실이 아니라면 어떤 의도로 거짓 보도가 남발되고 있는 것인가. <김치 애국주의>에서는 이와 관련된 여러 가지 예를 오역과 오류, 피해자 만들기, 침묵하거나 분노 만들기, 편견이나 증오의 확산, 도시전설의 맹신 등으로 구분해 반일보도의 형태를 분석하고 있다.

전 국가적으로 형성된 반일정서의 형성엔 국내 언론보도의 잘못된 행태가 한몫 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일본의 잘못을 비판하는 것이 나쁜 게 아니라 왜곡된 보도에 자극되어 증오를 키우는 현재의 행태는 반드시 극복되어야 할 과제임을 역설한다.

<김치 애국주의>는 일본이 매사 잘했다고 편드는 책이 아니며 더군다나 비판의 대상이 조·중·동으로 대변되는 국내의 보수언론매체로 제한되지도 않는다. 그 누구도 지적하지 않는 지적할 필요 없어하는 부분이지만,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을 막연한 반일정서의 근저엔 언론에서 저지르고 있는 과오가 깊이 관여되어있음을 일본 관련 기사의 낱낱을 통해 돌아보자는 것이다.

또한 언론의 자성과 함께, 이런 언론보도의 이면을 바로 볼 수 있는 매의 눈을 갖기를 독자들에게 촉구하고 있다.

한국의 반일정서 하나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진 않지만, 본문 중의 인용글엔 언론이나 독자 양편에게 각성을 요한다는 위 내용이 잘 담겨있다.
오보를 100퍼센트 없애기란 불가능하다. 어느 정도의 오보가 발생하는 것은 그 나라의 저널리즘이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오보를 냈다면 나중에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사죄'다.
싫다! 싫어! 에 막연히 휩쓸리기 보다는... 언론이든 내 자신이든... 찬찬히 돌아볼 수 있는 차분함이란게 중한 시절이다...